시간의 채집

윤성원 회화展   2005_0614 ▶ 2005_0623

윤성원_시간의 채집_종이에 유채_80×80cm_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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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0614_화요일_05:00pm

한전프라자 갤러리 서울 서초구 서초동 1355 한전아트센터 전력홍보관 1층 Tel. 02_2055_1192 www.kepco.co.kr/plaza/

보다 더 근원적인 것을 생각하게 하는 그림 - 윤성원의 시간채집 ● 윤성원이 그리는 대상과 소재는 바로 식물(植物)이었다. 그 중에서도 식물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땅속에서의 뿌리의 움직임과 뿌리의 형상들, 그리고 나무줄기와 나뭇잎의 변화, 그것의 연속적인 흔들림들, 이처럼 식물이 지니는 시간의 변화와 움직임에 그녀의 시선이 차분하게 응시되고 있었다. ● 식물은 식물의 본질에서 가장 근원적인 요소가 가지와 잎이 빛을 받아들이는 빛의 흡수성과 반대로 빛을 거부하는 뿌리의 속성인 빛의 역흡수성일 것이다. 잎은 빛을 쫓아다니지만 뿌리는 빛을 쫓아내는 이것 말이다. 그 사이 나무줄기는 이 빛의 흡수성과 빛의 역흡수성 사이에 자리잡아 줄기는 곧장 수직으로 상승하고자 하여 식물이 움직이지 않고 지탱하도록 도와준다. 이런 생태적 속성의 자연인 식물의 운동에 그녀가 관심을 지닐 때는 자연스럽게도 빛과 시간이라는 요소가 하나의 주요 명제로 의식되기 시작한다. 변화의 본질에는 시간이라는 요소가 삼투로 스미게 마련이다. 식물의 시간, 이것이 그녀의 미술적인 또는 회화적인 주요관심이 되면서 우리들의 시선을 조용히 붙잡아 두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 여기서 우리는 식물의 시간을 들여다보는 그녀의 회화적인 눈은 무엇에 근거하고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이 의문은 사실 그녀가 생명 또는 생태에 대한 스스로의 의문과 관심에서 비롯됨을 유추할 수 있으며, 이는 역설이지만 그녀의 관심이 차라리 식물이라기보다는 식물을 통한 인간이고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들 삶의 문제를 제기한다는 점이다. 이는 오늘날 생태나 환경에 대한 관심이 사회 인문적인 중요한 명제로 의식되기 시작하면서 실제로는 아주 구체적으로 우리들 삶의 근원을 뿌리 채 흔들어 놓기 시작하는 온갖 삶의 부정적 결과들과 행태들, 이것으로부터 식물의 명백한 힘은 지금 위협 당하고 있다는 자연스러운 깨달음과 발견에서 그녀의 회화적인 출발을 보게 된다.

윤성원_시간의 채집_종이에 유채_77×95cm_2005
윤성원_시간의 채집_종이에 유채_77×95cm_2005

생명과 근원에의 모성적인 시선은 차라리 부차적일 수도 있다. 우선 윤성원이 표현하고 있는 뿌리에서부터 생각해보자. 나무뿌리는 땅속에 묻혀있어 땅 밖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잘 보이지 않고, 잘 볼 수 없는, 그 뿌리는 그녀의 상상력에서 나무에 자양과 안정성을 공급한다는 사실을 넘어서서 어둠과 대지의 요소인 뿌리의 근거는 곧 뿌리가 삶과 죽음의 기이한 종합이라는 일단의 해석의 여지도 가능하면서, 아울러 시간의 흐름을 지속적으로 미시적으로 분석하고 채집을 해 나가는 회화적 상상력의 촘촘한 표현으로 드러난 대상일 수 있을 것이다. 연속적인 이미지의 연결을 보여주고 있는 스케치들, 조금씩 같으면서도 자세히 들여다보자면 다른 이미지의 연쇄성과 몽따쥬 같은 흑백의 거칠고 꼼꼼한 점묘들. 이는 마치 나무 뿌리를 통해 시간의 변화를 눈금 매기듯이 드러내어 보여주고 있다는 회화적 표현 사실에서 땅속에 있으면서도 뿌리는 강력하고도 은밀하게 성장을 계속하고 있으며, 아울러 땅 밖으로도 나무에 줄기에 잎에 성장을 부추긴다는 당연한 사실을 강조하는 듯 싶다. ● "나무 뿌리는 땅속에 묻혀있어 땅 밖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잘 보이지 않고, 잘 볼 수 없는, 그 뿌리" 시간의 변화와 시간의 틈새에서 시간의 흐름을 지속적으로 미시적으로 분석하고 채집을 해 나가는 회화적 대상인 「나무뿌리」는 꼼꼼한 태도로 작업에 임하는 그녀 삶의 모습에서 많은 긍정적인 가능태를 보는 것이다. "나무 뿌리를 통해 시간의 변화를 눈금 매기듯이 드러내어 보여주는 윤성원의 회화적 표현은" 자신의 일상의 변화를 맞는 그녀의 일상만큼이나 비례한다. 삶이 더 깊어진 것이다.

윤성원_시간의 채집_종이에 유채_95×77cm_2005
윤성원_시간의 채집_종이에 유채_95×77cm_2005

윤성원의 회화는 사람이 삶을 영위하는 올바른 방식은 무엇일 수 있는가, 그 생각의 단서를 「나무뿌리」를 통해서 말하고 있다. 이는 윤성원의 메타포이지만 조금이라도 윤성원의 회화에 대해서 들여다본다면 이내 그녀의 회화적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다. 나무뿌리를 통해서 「사람의 삶」과 「사람의 시선」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윤성원의 회화에 젊은 화가의 역량이 더없이 소중함을 새삼 강조하고자 한다. ● 오늘날 회화 또는 미술이 온통 상업적 소비의 무차별 경쟁 속에 빠져들어 소모되며 상품으로 팔릴 것을 안달하는 현대미술 세태에서 한 젊은 작가의 뚜렷하고 집중적인 「나무뿌리」의 회화적인 관심과 표현은 참 대견한 것이다. 이는 생태적(生態的)인 대상과 관심이란 회화의 주제적 측면도 있지만 질박(質朴)하고 단순하지만 보다 더 근원적인 것들에 대한 질문으로 진실하게 회화작업과 마주하고자 하는 이제 20대 후반의 이 젊은 작가의 정신은 이 땅의 미술 풍토에서는 상찬(賞讚) 받아야 마땅하다. ● 윤성원이 회화로 그리고 있는,'눈에 보이지 않는'지하(地下)의 「나무뿌리」를 드러내어 보여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역설이지만'잘 보이지 않고 잘 드러나지 않는'땅 밑의 생태를 통해 인간 생존의 터전 자체가 무너져 내리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윤성원 회화를 통해 「사람의 삶」과 「사람의 시선」을 새삼 일깨우게 된다.

윤성원_시간의 채집_종이에 유채_200×90cm_2005
윤성원_시간의 채집_캔버스에 유채_45.5×45.5cm_2005

오늘을 살고 있는 한국인들 대부분은 지난 100여년간 근대화 콤플렉스에 중독되어 경제발전과 계속적 성장이라는 미몽(迷夢)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때때로 예민하게 촉수(觸手)를 세우고 세상을 살고 있는 일부 사람들 중에서, 우리 사회와 삶의 터전에 대한 문제를 지적하는 얘기를 왕왕 들을 수도 있지만,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인식하기보다는 적당히 문제를 가리고 곡해(曲解)하여 문제를 더 희뿌옇게 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비록 눈에 잘 띄지 않는 땅 밑에 있는 「나무뿌리」에 윤성원은 시선을 두고 있지만, 그 「나무뿌리」의 뻗어남과 엉킴과 끊어짐에서 자연의 절멸(絶滅)과 순환과 생기(生起)를 통해서 자연은'강제하거나 외면하거나 왜곡(歪曲)한다'고 그 자연성(自然性)이 결코 달라짐이 아니라는 사실을 회화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 「나무뿌리」를 통한 시간의 경과와 채집은, 인간이 땅 밑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힘을 잃게 된다면, 인간의 영혼은 외로움으로 죽게 될 것이며 우리들 삶은 만물과 서로 맺어져 끊임없이 삼투(渗透)하여 상관하며 관계한다는 자연성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 인식을 요청한다. 자연의 「나무뿌리」와 인간, 우리들은 윤성원의 「나무뿌리」를 통해서 우리가 딛고 서 있는 땅 밑의 어둠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기회를 갖는 것이다. ■ 김상수

Vol.20050624c | 윤성원 회화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