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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0615_수요일_06: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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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것에 대한 찬사 ● 막스 프리쉬(Max Frisch)는 그의 소설 '슈틸러(Stiller)'에서 인간에게 가장 본질적이면서도 동시에 접근하기 어려운 물음을 우리에게 던진다. "한 인간이 살아가야만 하는 그의 시대와 더불어 그는 무엇을 하는가? 나는 그 물음에 대해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은 내게 단순한 격앙과도 같았다." 그리고 이 심원한 문구를 접하는 사람이 조금이라도 영리하다면 다음과 같이 번안해낼 것이다. "내가 살아가야만 하는 이 시대와 더불어, 나는 과연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그러나 이 격정의 문구가 가리키는 바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실로 미미하기 짝이 없다. 세계를 인식시켜주는 우리의 의식(consciousness)이란 굉장히 명증한 것이어서 동물적 의식(animal consciousness)과는 그 종류를 달리한다. 그러나 그 의식을 시대에 연관지어 생각할 때는 문제가 사뭇 달라진다. 시대에 대한 우리의 의식이야말로 동물적 의식과도 같다. 왜냐하면 니체의 말처럼 "우리는 미래와 과거라는 벽에 가려져 맹목적으로 현재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거의 삶에 대해 알 수 있다. 그렇지만 과거의 삶을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미래에 대해 예측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예측한 미래란 고작 영화 '2001년(2001)'에 나오는 기괴한 우주복을 입은, 모호한 성의 개체들일 뿐이다. 즉 1960년대의 관점으로 파악한 1990년대만큼 깨는 것도 별로 없다. 좀처럼 보이지 않는 이 시대라는 개념은, 그러나 '삶의 형식(form of life)'이 어떠했나 살펴볼 때 각 시대의 의식의 내용에 총체적인 색채가 수여된다. 시대는 단순한 연대기적 단위가 아니다. 단순한 시간의 단위 속에는 내밀함이 결여되어 있지만, 삶의 형식에는 있다.
박윤경은 바로 이 삶의 형식에 대해 전면적으로 도전하는 예술가이다. 막스 프리시의 대전제에 답하고자 노력하는 예술가이다. 소위 우리의 시대를 이야기할 때 발터 벤야민의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이니,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니, '후기 자본주의의 물신주의'니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이 모두 샤르트르의 '대자(pour soi)'나 '대타(pour autrui)'의 개념을 벗어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자는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 현재에 대해서 생생한 경험을 하되,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 현재에 대해 정확한 의미를 수여해 주는 사람들은 미래의 사람들이다. 다시 말해 현재의 의미는 지금보다 후대의 사람들에 의해서만 총체적인 채색의 도움을 받기 마련이다. 따라서 우리는, 존 로크가 '인간의 이성에 관하여'라는 에세이의 서론에서 "이성이란, 마치 눈과도 같아서, 우리로 하여금 여타 모든 대상을 보고 인지하게 해주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것을 거리를 두고 자신의 대상이 되게 하는 일이란 실로 기술과 고통을 요한다"고 말했던 것처럼, 자기와 자기의 시대를 이해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박윤경은 서울 시내를 거닐다보면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는 대상을 예술작품으로 변용(transfiguration)시켜낸다.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는 대상'을 다루는 사람들은 허다하게 많다. '로리타 렘피카(Lorita Lempicka)'라는 향수용기나 '다이아몬드 반지,' 사과보다도 맛있는 '사과주스의 병'이 박윤경의 소재이다. 이쯤하면 팝아트와 비슷하다는 혐의를 받을만 하다. 그러나 시각적 경험은 예술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부차적인 요소에 불과하다. 예컨대 우리는 뒤샹의 '샘'이나 워홀의 '브릴로 박스'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소재는 주제라는 개념과 천양의 차이가 난다. 박윤경의 주제는 워홀이 말한 "사물을 좋아하는 방법"도 바바라 크루거가 말했던 "나는 쇼핑한다. 고로...."나 "얼간이가 되지 말라(Don't be a jerk)"고 강하게 외치는 여성 계몽적 진부함은 더더욱 아니다. 주위를 둘러봐라. 나를 나일 수 있도록 해주는 요소가 전무함을 누구나 쉽게 느낄 수 있다. 이미지는 넘쳐난다. 스피드나 물신이 판을 친다. 나를, 내가 사는 시대를 생각할 틈새를 주지 않는다. 세계는 풍요로워 보이지만 외롭고 허무한 것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연상시킨다. 박윤경은 그 가벼움을 물리치기 위해 전면적으로 몸을 던지는 사람이다. 단순한 재현과 예술작품의 큰 차이는 "세계를 단지 보는 것"과 "세계를 바라보는 방법"의 차이이다. 소재와 주제의 차이이다. 단순한 재현으로서의 숨막히는 이미지 범람의 시대에서 박윤경은 자기만의 "세계를 바라보는 방법"으로 사물에 온기와 애정을 불어넣어 의미를 담아낸다. 바로 그녀가 수십의 성상이 지나도록 매진해왔던 회화성(painterliness)의 투영이다. 그녀의 손과 눈과 노력과 영혼을 다 바쳤던 회화성의 투영이다. 이때 두서 없이 떠돌며 자기 정체성의 의미를 상실했던 세계의 요소들 그 모든 멤버는 박윤경의 예술세계라는 품속에서 고요하게 진정되어 자기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바로 이젤 페인팅이라는 장구한 역사 속에서 사람들이 울고 웃으며 그토록 찾고 싶었던 '삶의 의미'들이 녹아든다. 그리고 박윤경의 예술세계가 무엇인지 더욱 극화시키기 위해 헤겔을 인용하고픈 욕구를 억누를 수가 없다. 헤겔이 설명한 정치의 네러티브를 살펴보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 내용은 "처음에는 단 한 사람만이 자유롭다. 그 다음에는 아주 소수의 몇몇이 자유롭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사람이 자유를 얻게된다"와 같다. 이는 놀랍게도 예술의 네러티브와도 일치한다. 스스로 '거듭난 헤겔리언'이라고 선언하는 철학자 아서 단토(Arthur C. Danto)는 "예술의 네러티브에서 처음에는 재현예술(미메시스)만이 예술이다. 그 다음에는 몇몇이 예술이지만 각자간에 경쟁자를 제거하려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스타일이나 철학적 강제가 확실히 없어진다. 예술작품이 반드시 어떠해야한다는 길이 사라진다"고 말한다. 역사를 "내적인 구조와 필연성으로 짜여진 역사"로 파악하는 헤겔의 관점의 요지는 이른바 '절대정신'의 구현과정이다. 외부와 '나(I)'라는 주체의 의식 사이에서 일말의 간격이 모두 사라져버린 상태를 일컫는 이 절대정신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 역사는 그 끝을 맺고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는데, 이를 가리켜 헤겔리언들은 역사후기(post-historical)라고 말한다. 역사는 강제와 고통을 수반한다. 그리고 외부세계와 나 사이에는 그 골이 깊고도 넓은 간격이 존재한다. 따라서 모든 이가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역사후기에는 절대정신이 구현되어있기 때문에 그 어떤 고통과 강제가 사라진 자유의 시기이다. 인간의 역사에서 절대정신이 얻어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 중에 적어도 예술에서만큼은 절대정신이 구현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술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예술에서만큼은 누구나 자유롭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할 수 있는 시대에서 살고 있다. ● 또 한가지, 헤겔의 절대정신의 과정은 각각 예술, 종교, 철학이다. 예술이라는 발원지를 전부 이해해야만 비로소 종교라는 거대한 강줄기와 철학이라는 이름의 바다도 볼 수 있다. 따라서 한없이 자유롭고 풍요로운 역사후기의 예술은 다가올 인간사의 정치적인 것의 예고편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언젠가 모든 이가 자유롭고 풍요로울 수 있다는 이 믿음만큼 아름다운 것은 세상에 흔치 않다. 그리고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의 아름다운 경구가 있다. "모순처럼 보이지만, 더구나 모순이란 언제나 위험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이 삶을 모방하는 것보다 삶이 훨씬 더 예술을 모방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Ⅱ 예술이란 시대의 의식이라는 씨줄과 개인의 의식이라는 날줄이 짜여져 만들어진 정교하고 아름다운 직물과도 같다. 개인의 의식이란 이른바 '영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혼을 표시해줄 수 있는 공간은 예술밖에 없다. 이 영혼이야말로 예술을 설명하는 유일한 통로이다. 이는 애초에 자연으로부터 부여받은 능력이며 결코 배울 수 없는 성질이다. 그리고 이는 '세계를 바라보는 방법'과도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지오토(Giotto)는 복음서에 대한 신실한 믿음으로 세계를 보았고, 렘브란트는 살찌고 늙은 그의 아내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고흐는 별을 하느님의 목소리로 바라보았고, 로버트 매플소프(Robert Mapplethorpe)는 관능의 눈으로 남성의 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를 보는 우리는 예술가의 영혼으로 변용되어 그들이 세계를 바라보았던 방법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이때 '예술은 삶의 거울'이라는 말이 실감나게 된다. 우리는 예술 속에서 예술가의 세계를 바라보았던 방법, 즉 영혼을 배우며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그 발견 속에서 감동하며 뉘우치고 행복을 얻는가 하면 분개하고 탄식하기도 한다. 따라서 예술을 일컬어 '영혼의 관상(the physiognomy of the soul)'이라 말했던 쇼펜하우어의 표현만큼 적절한 것도 없다. ● 그리고 여기 헨리 제임스(Henry James)의 소설 '여인의 초상'의 첫 단락을 수놓는 아름다운 문장과 같은 예술가가 있다. 그 첫 단락은 "인생에서 오후의 홍차라고 알려진 의식에 헌납되는 시간보다 기분 좋은(agreeable) 시간은 거의 없다"로 시작한다. 박윤경은 인생에서 가장 풍요하고 행복하며 긍정적이면서도 기분 좋은 오후의 홍차와 같은 마음을 지닌 예술가이다. 그는 우리가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는 모든 것에 그 기분 좋은 마음을 부어준다. 시들했던 화초가 신선한 물을 만나면 생기를 차리듯, 우리 주위에 있는 그 어떤 진부한 대상이라도 그의 손과 마음의 애무를 받으면 놀랍도록 행복의 생기를 누리게 된다. 예컨대 그는 신발을 만난다. 그리고 신발에게 이야기한다. '너를 신으면 넌 나를 좋은 곳으로 데려다줄 것만 같아.' 이어 저 룸펜과도 같은 보잘 것 없던 신발은 놀라운 예술작품으로 변용되게 된다. 그리고 그 놀라운 메타포로 우리는 동화되어 우리의 신발을 바라보게 되며, 어느새 우리 역시 좋은 곳에 가볼 것만 같은 기분에 빠져든다. 골치 아프게 난해해서 등을 돌리고픈 학술서적들이 있다. 이 기분 좋은 예술가는 그 책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휴... 읽을 것도, 알아야 할 것도 너무 많아. 너를 그려서 극복 해야겠어!' 그리고 나서 이 난해하고 골치 아픈, 온통 잿빛 무생물 같았던 활자 속의 어지럽던 유영들은 봄날의 옷과 꽃처럼 화사하고 따뜻한 세계로 바뀌어버린다. 이미 비어서 버려져야 할 맥주캔들은 그의 예술세계로 초대되어 친구들과의 유쾌했던 대화나 사랑의 분위기를 돋구어 주었던 고마움, 혀끝을 쏘았던 시원한 기억으로 변용된다. 이런 식으로 그를 둘러싼 모든 대상들은, 가령 진통제나 열쇠, 자동차의 휠이나 와인병들은 모두 따뜻한 의미로 변하게 된다. 박윤경은 말하자면 예술계의 마법사다. 해리포터가 '가장 두려운 것을 물리치는 마법은 무엇인가'를 찾아 과제를 해결하는 여정이라면, 우리의 예술가의 과제는 '삶을 통째로 사랑하는 마법을 보여주는 방법'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일상(everyday life)은 실재세계(real world)이다. 이 실재의 일상을 인내를 불허하는 참기 힘든 대상으로 파악하는 사람들은 부지기수로 많다. 가령 작가 미시마 유키오나 조르주 바따유와 같은 사람들은 일상을 칼로 갈라야만 하는 대상으로 바라보았다. 그때 인간이 본래 지녔던 초절적인 것이 회복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수단은 삶이라기보다는 어김없이 죽음에 해당한다. 또 뉴욕스쿨의 대부분의 화가들은 일상을 멀리했다. 예컨대 아돌프 고틀립(Adolph Gottlieb)과 마크 로스코(Mark Rothko)가 서로 주고받았던 편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우리에게 예술이란 미지의 세계를 향한 탐험입니다....상상의 세계란 자유로운 환상이며, 상식과는 정반대에 놓여있습니다." 이들은 현실을 도피하면서 자기들만이 볼 수 있는 세계를 꾀했으며 소위 영웅주의에 경도되어 있다. 따라서 대중들은 이 영웅주의에 의해 철저하게 소외되었고 소수 몇 사람만이 입장허가를 받는 단단한 철문에 막혀있었다. 하지만 모든 이에게 입장허가를 내린 예술가들도 있다.
"예술을 삶 속으로!(art into life!)"라는 외침을 그 기치로 삼은 사람은 소비에트의 위대한 예술가 알렉산더 로드첸코(Aleksandr Rodchenko)이다. 그는 '붉은 시월 과자 공장'을 위한 작품에서 미소를 예쁘게 머금고있는 소녀의 입 속으로 하나둘 사라지는 쿠키를 그래내며 그 소녀의 노래를 등장시킨다. "붉은 시월 공장에서 나온/ 쿠키를 먹어요/ 국가 식료품점에서만/ 쿠키를 사지요." 그는 또 야채 기름에 대한 그림을 만들면서 "요리에 쓰는 기름/ 주목하세요 노동계급이여/ 버터보다 세배는 싸며/ 그 어떤 기름보다도 영양이 풍부해요"라는 문구를 전파하면서 소비에트의 전 국민을 행복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의 예술혼은 언제나 "진정한 행복은 동이 트는 어스름에 살아있는 것에 있었다(Bliss was it in that dawn to be alive)"는 사회주의의 삶의 형식에 대한 찬사와 깨우침에 있다. 또 이는 폴란드계 미국인 앤디 워홀의 세계관에 깊은 원천이 되었다. 잭슨 폴록(Jackson Pollock)과 드 쿠닝(De Kooning)이 동시대 대중과 정치로부터, 불만으로 가득한 현실로부터 등을 돌린 채 자기들만이 알아볼 수 있는 무의식의 영역에서 소위 '신비하고 숭고한' 이미지를 건져 올려 소수의 엘리트에게 봉헌했지만, 워홀은 현실로 뛰쳐나와 모든 이를 행복하게 했다. 그리고 앤디 워홀이 남긴 많은 말 중에서도 특히 다음과 같은 세 가지가 가장 유명하다. "이봐, 난 여기가 좋은데!" "팝아트는 누군가 브로드웨이를 걸어오면서 순식간에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을 이미지로 만든다. 만화, 피크닉 테이블, 남자들이 입는 바지, 유명한 사람, 샤워 커튼, 냉장고, 콜라병, 이런 모든 것들은 추상표현주의자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던 모던의 위대한 것들이다." "팝아트는 사물을 좋아하던 방법이다." 워홀은 이런 식으로 아메리칸 스타일의 삶을 축복했다. 그리고 이들의 최대 수혜자라 할 수 있는 제프 쿤스(Jeff Koons)는 그의 선배들에 대한 화답으로 "그 어떤 관람자라 할지라도, 그리고 그가 어디 출신임을 막론하고, '그래, 나 그거 좋아(Yes, I like it)'라고 반응하며 말할 수 있을 작품을 만들기 위해 애써왔다. 만일 그들이 그럴 수 없다면, 이는 순전히 그래서는 안 된다고 누누이 들어왔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지금 만나고 있는 박윤경은 "나의 작업은 지금의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즐거운 상상의 풍경을 담아냄으로써 지금의 시대를 읽고, 더불어 즐거움의 예술적 기능을 찾아보는데 그 의미가 있다"고 속삭인다. 이 예술가의 속삭임은 보통 놀라운 것이 아니다. 경이롭고 아름다우며 행복한 나머지 가슴 저미기까지 한다. 감동적인 것은 비단 그녀가 로드첸코와 워홀, 쿤스로 이어지는 같은 선로에 놓여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앞서 헤겔의 정치 네러티브에서와 같이 "처음에는 합스부르크나 부르봉, 엘리자베스나 로마노프만이 누릴 수 있었던 예술이 소수의 계층으로 넓어지며 급기야 모든 사람이 예술을 향유할 수 있게 된다"는 취지였다. 모든 일상의 대상이 놀라운 메타포의 예술작품으로 승격될 수 있을 때, 너와 나를 비롯한 모든 이가 부르봉 왕조나 엘리자베스 왕가의 자식과 같다는 메타포를, 박윤경은 우리에게 현시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의 현실에서도 이 예술가의 메타포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는 것보다 아름다운 것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위대한 문호 괴테가 "매일 한결같이 자유를 쟁취해내는 자만이 자유를 얻는다(Nur der die Freiheit sich verdient, der taglich sie erobern muss)"고 말했듯이, 우리의 소중한 예술가 박윤경은 나날을 얻어내고 자유를 지켜낸다. 그것은 비단 혼자만을 위한 자유가 아니다. 우리 모두에게 선사하는 삶의 찬사이자 축복이기 때문이다. ■ 이진명
Vol.20050620b | 박윤경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