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05_0615_수요일_05:00pm
두아트 갤러리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5번지 Tel. +82.(0)2.737.2505 www.doart.co.kr
…바느질, 이 흔한 삶의 모습이 가지는 수공적 아름다움은 내게 자연스럽고 매력적이다. 아주 작고 소극적인 행위로써 큰 구조를 만들어내기도 하고 인위적으로 사물을 가리거나 억지로 붙이지 않고 모든 재료를 엮고 아우르는 방법이므로, 자연적이고 '어머니적'이라고 느껴지기도 한다. ● …내가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작업을 함으로써 즐거워지는 카타르시스의 순간인데, 집중하여 시간을 들여 반복행위를 하는 것, 나는 이러한 과정에 일차적으로 중점을 두고 있다. 그것은 빈 화면에 보이지 않는 가상의 선이 그어지고, 그 선을 따라 실 땀으로 이어가는 그 반복적인 행위에 몰두함으로써 더더욱 정신을 집중하게 되는 과정이다. 기억의 언저리를 맴돌던 공상은 지금 바로 그 시각, 내가 되짚고자 하는 과거의 어느 위치로부터 상상만이 가능한 미래의 어느 시공간으로까지 끊임없이 이동하고 여행하면서 자기중심적인 치유의 과정까지로 이어진다. ■ 정지현
회화 전공인 작가가 물감과 붓 대신 실과 바늘을 사용하였다는 것은 단순히 재료의 전환이라는 물리적 변화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작가 정지현은 붓이 지닌 즉흥성과 표현력을 과감히 포기하고, 실과 바늘, 천을 이용해 기존의 회화성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붓과 물감을 대체하는 새로운 재료의 사용은 모더니즘 이후 여러 작가들에게서도 나타나는 현상으로써 이 때문에 우리는 자연스레 왜 하필 실과 바늘을 택하게 되었는가라는 다소 사적인 의문을 가지게 된다. 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실과 바늘을 선택하게 된 배경에는 '수(繡)'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 작용하였다고 한다. 작가는 어릴 적 할머니가 수를 놓는 모습을 보아왔고, 이 때 바늘이 천을 뚫으며 내는 짧고 소박한 소리에 향수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작가의 기억에 존재하는 할머니의 자수처럼 실과 바늘, 천은 여성적인 재료이다. 만약 정지현의 작품이 남성의 작품이라고 가정해 볼 때, 그것이 얼마나 생경할지 충분히 상상이 된다면 앞의 명제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20세기에 들어서 몇몇 여성주의 작가들은 정지현과 같이 실, 바늘, 천을 이용한 작업을 보여주었는데, 이들의 작품은 때때로 지금까지 우위를 지켰던 남성성에 대항하는 여성성의 우월함이나, 또는 성(性)의 구분을 완전히 무시한 흐물흐물한 물질 그 자체로도 읽혀졌다. 그러나 가장 설득력을 가진 해석은 로지카 파커와 그리젤다 폴록이 쓴 것처럼, "여성을 배제시킨 사회구조에 의해 생성될 수 있었던 여성적인 작품"이라는 것이다.1) 정지현의 작품 역시 전면에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여성으로 교육받고 사회화된 작가, 즉 '여성작가로서' 표현해낼 수 있는 자연스러운 여성성을 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실과 바늘을 사용하여 만든 첫 작업 「부치지 못한 편지 (묶음)」(2002)은 정통의 아카데믹 배경을 가진 작가로서는 꽤 힘겨운 시도를 시작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첫 째, 남성의 영역으로 여겨진 추상회화를 극복하였고, 둘 째, 붓이 지닌 속도감과 즉흥적인 표현력을 과감히 포기하는 대신 실과 바늘, 천이 유기적으로 빚어내는 조형성을 추구하였기 때문이다. 4호로 이루어진 작은 캔버스에 시간과 정성을 투자해야하는 자수 작업은 남성작가들이 특히 취약한 '크기 콤플렉스'나 '마초적 액션'에 대한 강박으로부터 자유로운 모습을 보인다.
이후의 작품 「자가치유」(2003) 연작들은 몬드리안을 여성적인 시각으로 재해석하고, 하드에지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해방된 것으로 자유자재로 풀려버린 올과 겉으로 드러난 스티치, 무늬가 다양한 조각 천들을 통해 권위적이고 강압적인 예술로부터의 탈피를 가시화하였다. 풀어진 실밥과 숨겨지지 않은 스티치, 찌그러진 네모는 예술에 대한 고정관념이나, 암묵적으로 강요된 추상미술에의 동조, 그리고 미니멀리즘의 견고한 모서리 등으로부터 순화된 작가 자신을 표현한 것이자, 이것들에 억눌렸던 자아를 치유하는 과정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치유의 과정은 섬세한 수작업과 인내심, 그 과정에서 얻은 몰입을 통해 풍부해졌다.
「부치지 못한 편지 (묶음)」에서 다음 작품으로 이행하면서 잠시 멈칫하였던 정지현의 구상 작업은 「자가치유」의 '치유'와 '순화'를 거친 후, 「시냇가에 심은 나무」에서 보다 풍부하고 화려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 작품에서 동물의 형상들은 2차원의 캔버스에서 벗어나 보다 확장된 3차원의 공간 속에서 부유하고 있으며, 천의 화려한 색상에서 '형상(figure)'을 대하는 당당한 작가의 시선을 느낄 수 있다. 그녀의 동물 형상들은 유년의 기억을 자극시키기도 하고, 상상의 촉매가 되어주기도 하는데 공중에서 미세하게 흔들리는 작품 밑에 서 있으면 동심에서나 느낄 수 있었던 순수한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시냇가의 심은 나무」에서 순수함과 유희를 표현하였던 동물 형상은 인간의 모습으로 대체되는 동시에 구체적인 형상은 좀 더 드로잉적으로 단순화되었다. 첫 개인전을 통해 선보이는 「댄싱 퀸」은 팔이나 다리 등 인체의 한 부분이 길게 강조되었는데, 때문에 춤추는 듯한 인상을 리드미컬하게 표현해 낼 수 있었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이 작품은 마티스의 「재즈」 시리즈와 많이 닮았다. 또한 앞 서 소개된 「시냇가의 심은 나무」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무늬와 색상의 천은 형상을 한층 더 자유롭고 활발하게 표현하는 데에 도움을 주고 있으며, 이를 통해 우리는 작가가 자기 치유를 거쳐, 구상과 추상, 남성과 여성 등 예술 내외적인 문제를 벗어나 보다 더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였고, 작가의 '있는 그대로'를 드러냄에 있어 즐겁고, 경쾌하며, 독립적인 시각을 보이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 이상윤
Vol.20050618c | 정지현展 / JUNGJIHYUN / 鄭智賢 / mixed 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