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중기 - 느슨한 충돌

금중기 개인展   2005_0531 ▶ 2005_0630

금중기_전시 풍경_2005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갤러리 세줄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5_0531_화요일_05:00pm

갤러리 세줄 서울 종로구 평창동 464-13 Tel. 02_391_9171 www.sejul.com

"세계는 경우인 것들의 총체이다." 금중기의 사진 작업을 처음 보았을 때 이미지가 아닌 언어라는 생각이 들어서 일까 나는 그의 작업이 언어논리철학적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고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를 이루고 있는 이 첫번째 명제가 떠올랐다. 사물들의 총체가 아닌 사실들의 총체인 세상을 어떻게 언어가 표현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논고」에서 언어란 세계에 대한 일종의 '그림'이며 그러한 한에서 언어는 의미를 갖는다고 했다. 그러나 세계의 '논리적 그림'으로서 언어는 명확한 한계를 갖고 있고, 그에 따르자면, 삶의 의미나, 아름다움, 선함과 같은 가치대상은 "보여질 수는 있어도 말하여 질 수는 없는 것"이므로 침묵해야 한다. 여기 그 '말할 수 없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금중기는 사진을 찍는다. 마치 비트겐슈타인이 파리에서 일어난 교통사고 정황을 모형 자동차와 인형을 사용해 설명하는 사진을 보고 「논리철학논고」를 썼듯이.

금중기_전시 풍경_2005

늦은 밤 자유로를 달려 도착한 그의 작업실 선반에는 그가 파리의 벼룩시장과 서울의 황학동을 헤매고 다니면서 찾아낸 물건들이 잔뜩 놓여 있었다. 사실 금중기에게 오브제는 그리 낯선 게 아니다. 지금까지 발표한 작업들을 보면, 초, 연탄, 비누, 먼지, 방독면 등과 같은 현상으로서의 세계를 이해하는 기호로서 오브제가 계속해서 등장했었다. 아뜰리에와 전시장이라는 현실공간에서 직접적으로 그 이중적인 실재성을 보여주던 오브제들이 이제 카메라의 어둠 속으로 빛이 되어 들어간다.

금중기_Loose collision, No.8_컬러 프린트_200×150cm_2005

금중기의 사진작업은 서로 다른 두 사물을 병치 시키는 것으로 의외로 간단하다. 하지만 이것이 그를 다른 사진 작가와 확연히 구분 짓게 만든다. 세계라는 표상 위에 카메라를 무작정 들이대지 않음으로써 그의 사진은 기록이 아니며 세상을 바라보는 창도 아니다. 금중기는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드러내기 보다는 조합과 재배치를 통하여 가능한 사실들을 만들어 내는데 주력한다. 그에게 사물은 언어임과 동시에 세계를 사유하는 도구일 뿐이다. 고양이와 쥐덫, 낡은 카메라와 아름다운 소녀 등 다소 이질적인 두 사물을 병치 시킨다는 점에서 초현실주의자들이 즐겨 쓰던 데페이즈망(depaysement)과 유사하지만 그것이 심리적 충격이나 무의식의 세계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두 사물 사이의 인식론적 의미고리를 찾는다는 점에서 확연히 구분된다. 사물들을 세계의 표상으로 작용하는 기호 자체가 아니라 가능성의 조건들로 즉 그들의 형성규칙(形成規則)을 탐구한다는 점에서 오래되고 낡은 사물들과 만화 캐릭터 인형들을 바라보는 금중기의 시선과 사유는 고고학자의 그것과 닮아 있다. 이처럼 사물들의 병치가 만들어 내는 구조적 현상으로서의 사건에 주목하는 금중기의 사진은 사진 바깥에 실재가 존재함을 부정한다. 기표(signifiant)도 없고 기의(signifi)도 존재하지 않는 그의 사진 속에는 지시체(reference)가 아니라 사건으로서의 '경우인 것'과 '의미'만 존재하는 것이다.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 속엔 오로지 사건(event)만이 존재할 뿐이다.

금중기_Loose collision, No.16_컬러 프린트_150×200cm_2005

사물들의 잠재적 공존의 복수성을 탐구하는 방법으로서 그가 사용하는 병치는 유희가 되고 의미구조를 변화시키는 차연을 생겨나게 한다. 니체의 '언어유희'와 데리다의 '해체'를 동시에 떠올리게 하는 금중기의 사진작업은 이미 사용된 기성의 사물들을 다시 차용하여 동일하면서도 동일하지 않은 이중적 의미의 반복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렇듯 하나의 언표로 작용하는 각각의 사물들과 또 그것들에 대한 사유를 가지고 하나의 가능성을 찾는 것, 즉 사건을 만들어 나가는 금중기의 모습은 언어논리학자에 가깝다. 여기서 금중기는 무속성의 존재(즉 언표)인 사물의 결합을 통하여 언뜻 서로 고리처럼 연결되는 논리를 가지는 명제를 만들어 낸다. 가능성의 조건들을 보여주기 위한 사물들의 병치는 직관적 지각을 함축하고 있는 '논리적 그림'이 되지만 그것이 언어로 환원될 때 모순되는 사물의 병치는 '거짓명제'가 되고 만다. 그의 사진은 곧 거짓명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명제의 진위(眞僞)가 아니라 거짓명제가 가능하다는데 있고 또 그 명제에서 의미가 도출된다는데 있다. 명제(언어)는 참이거나 거짓이다. 하지만 이 명제를 구성하는 언표들인 사물은 진실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다. 그것들은 진위의 밖에 존재하는 것이다. 금중기는 이 문제를 두 사물 사이의 긴장이 만들어 내는 '은유'로 극복한다. 규칙과 구조에 의존하는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 도상으로서의 사진은 여기서 거짓명제를 '은유'로 만드는 실제적인 구조를 형성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사진은 거짓명제를 형이상학적 영역으로 끌어 올린다. 그의 사진은 언어규칙을 초월하는 시각적 은유를 통하여 언어가 가지는 규칙이나 논리가 궁극적으로 환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진위를 떠나 명제는 그 본질이 그 대상의 논리 기호학적 가능성임을 침묵으로 말하고 있다. ● 이 점은 금중기가 수 많은 단어들의 조합을 실험한 끝에 최종적으로 결정한 이번 전시회의 제목 "느슨한 충돌"에서 잘 나타난다. 다소 모순적인 두 단어(언표)로 이루어져 있는 이 제목의 구성원리는 바로 그의 세계관을 보여준다. 우선 '충돌'이란 단어는 그 의미만으로도 충분히 파괴력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는 '충돌' 앞에 '느슨한'이라는 형용사를 붙임으로써 충돌이 주는 파괴력을 무력화 시키고 있다. 이로서 이질적인 두 사물 사이에는 의미적 유사성과 공간적 인접성으로 인한 교집합이 생겨나고 충돌은 연접으로 바뀌어진다. 따라서 "느슨한 충돌"은 상호 파괴가 아니라 서로 관계 맺음인 것이다. 여기서 보듯 금중기의 작업은 사물과 사물이 맺는 관계, 사물과 사물 외적인 요소들이 맺는 관계를 탐구하고 있다. 즉 사물들이 서로 관계 맺음으로써 형성하는 관계들과 또 사물들과 선험적 인식들이 맺는 관계들을 은유의 망을 통해 드러냄으로써 사람과 사물 그리고 환경이 서로 하나의 고리로 엮어져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물들의 구조에서 은유를 발견하고 그것을 거짓명제 안에 담을 줄 아는 금중기는 논리학자라기보다 수사학자라 하겠다.

금중기_Loose collision, No.17_컬러 프린트_70×50cm_2005

금중기의 작업에서 또 하나 주목하여야 할 요소가 유머이다. 니체 이후, 예술을 가상의 영역이 아닌 삶의 영역에 보다 가까이 접근시킨 아방가르드나 다다이즘의 웃음은 의미상실에 대한 반응으로서 세계의 전복과 해체를 의미한다. '난파되어 가라앉은 여객선 위에 예쁘게 걸터앉은 인어공주'나 '쥐덫 위에 앉아 도도한 눈빛을 보이는 고양이' 또는 '지구를 주먹으로 내려치는 철인 28호의 모습' 등 같이 장난스럽기까지 한 두 사물의 병치가 가져오는 웃음은 아이러니와 조소의 수사학일 뿐 아니라 의미의 해체를 요구하는 후기구조주의적 수사학이기도 하다. 이처럼 선험적 의미의 절대적 포기에서 나오는 금중기의 유머는 두 사물 사이에서 드러나는 존재와 비존재, 의미와 무의미의 차이를 해소 하면서 세계 속에 감추어진 새로운 삶의 의미를 역설적으로 창출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의미의 해체로서 삶의 부정성과 예술의 침묵을 극복할 수 있는 기능을 지니고 있는 금중기의 유머는 의미세계에 접근하기 위한 노력인 것이다. ● 사물 사이의 인식론적 충돌을 실험하는 금중기의 사진작업들은 거짓명제를 이용한 은유행위이며 그것은 사유의 도움을 받아서 실재와 진리를 찾아내는 작업인 것이다. 이번 전시에 그가 사용한 매체인 사진은 여기서 무엇이 진리인가를 확인해 주고 사물들 사이의 숨겨진 진리 (고리)를 드러내는 논리기호학적인 장(場) 역할을 한다. 그리하여 세계에 대하여 우리가 사유하지 못하였던 것, 말하지 못하였던 것 혹은 세계를 이루고 있는 사실들 즉 "경우의 것(what is the case)"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그의 사진은 우리를 아포리아(aporia)로 이끈다. 아포리아가 주는 놀라움에서 철학이 시작된다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 수사학자 금중기가 만드는 거짓명제가 주는 놀라움으로부터 사진읽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 노순석

Vol.20050531d | 금중기 개인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