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떠남의 논리, 노마디즘-지구는 나의 파렛트   김주영 개인展   2005_0509 ▶ 2005_0609

김주영_나무판 위에 그리기, 붙이기_가마솥, 거울, 고무신, 나무뿌리등_210×140cm_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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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0512_목요일_05:00pm_한전프라자 갤러리 초대일시_2005_0518_수요일_05:00pm_코아트 화랑

한전프라자 갤러리 서울 서초구 서초동 1335 전력문화회관 1층 Tel. 02_2055_1192 www.kepco.co.kr/plaza

코아트 화랑 서울 성북구 동선동 55 코아트빌 Tel. 02_926_5656 www.koart.co.kr

'떠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안에서 밖으로 '나간다?', '장소를 바꾼다?', '떠돈다(彷徨)?', 예술에서 그것은 분명히 새로운 공간을 창출해 내기 위한 역사적 관념의 이탈을 의미한다. 따라서 예술이 미술사 속에서 고집하였던 공간 개념의 아우라의 상실을 받아드려야 한다는 시각으로 그 미학적 입지를 설정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술에서 노마드nomade 적 개념은 이 점에서 시작되는 것으로 보여 진다. 그러한 컨텍스트에서 노마디즘은 산문적 사유의 소요유逍遙遊를 되새기게 한다. 그렇다면 우선 예술에서 노마드, 노마디즘적 사유란 무엇인가. "...전적으로 이질적인 타자의 땅으로 떠나는 돌아올 기약 없는 여행..."이라던가? 莊子에 의하면 "한 곳에 거처하여 편안해 짐을 알지 못하기에 어디엔가 고향이 없는 곳 無何有之鄕에 나무를 심는다."고 했다. 다음, "道즉 物"이라, 道 즉 大樹일 때 모든 경계는 철폐되고 유목민처럼 소요하다 황량한 벌판廣莫 之野에 나무를 심는다? 란 말일 텐데 본인은 여기서 깊은 無着根性을 음미 한다.

김주영_집_중말, 수수깡 흙벽돌, 양철 지붕_360×230×300cm_2003
김주영_소금이 내린다_석모도_설치 퍼포먼스_2004

방황彷徨errence(逍遙遊)의 의미는 '세상에서 길을 잃은 자유스러움'이라고 말한다. 세상은 아텔리에를 둘러싼 바깥뿐만이 아니라, 또 우리주변의 마을뿐만 아니라 역시 지구라는 것 자체가 복수로 열려 있는 창작 공간으로서 삶의 장소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기실 방황의 장소란 그 정체성이 감추어져 있다. 그렇다고 노마드에 '파괴'의 의미가 개입된 것은 아니다. 노마드의 과정에서 작품을 줍고, 버리고, 창조하는 일은 본질적 개념에서 파괴가 아니다. 모든 예술품은 과거의 목격자가 되어 향유하는 기능과 그리고 단순한 사물 적 기능(상품적)의 매카니즘만이 있었다. 또 도시 문명은 예술의 교감과 함께 세련된 규범의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기념비적 건축물들처럼 수학적 기술에, 그리고 인간 형태의 재현에 서로 맞닿아 강조된 것이었다. 노마디즘은 이러한 점에서의 이탈이다. ● 노마디즘nomadisme의 다른 말, 표류에 관하여, 벌거벗은 입술Les Levres nues이라는 벨지움의 잡지에서 '표류의 논리Theorie de la derive' 라는 제목의 글을 통하여 드보르 G. Debord는 이렇게 설명한다. : "다양한 상황을 통해서 무목적 적으로 흘러 지나가는 '표류'의 개념은 정신 지리학psycho-geologie적 자연의 재인식과 그리고 구조적 긴장성의 복합 구조의 확신과 절대적인 연관성이 있다. 그것은 고전적 개념의 '여행', '산책'과 모든 점에서 대단히 다르다."라고 하였다. 두아롱Doiron도 "우연한 감정을 일으키게 하는 이동의 방법으로서의 방황은 만연한 매체와 기술주의 mecanique의 소란스런, 그럼에도 공허한 삶의 윤리를 선회하려는 예술의 또 다른 욕망에 찬 하나의 코드다." 라는 말을 하였다. ● 그렇다면 노마드의 길 위에서 무엇을 하는 것인가. 예술가는 무언가를 할뿐만 아니라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길 위에 서있다. 그래서인가 예술은 그로발한 컨텍스트 속에서 노마드적 사유의 맥락을 시인하지 않는 한 저 예술의 종말 그 끝에서 방황하게 되고 말 것이다. 사유의 맥락을 위하여 그 혼미함의 우회로를 찾을 필요가 있을까? 아니 사선diagonale으로 직접 관통해 갈 필요가 있다. 사선 적 사유, 역사를 관통하는 사선 적 사유, 이정표가 섰다. 그것은 리좀rhizome의 구조를 갖는다. 그것은 노마디즘적 逍遙 遊의 길이다. 그러므로 "...노마드 예술은 직감적이고 고집스러우며, 결속력이 없고 불균형적이다."라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탈-의 맥락에서 풀이될 수밖에 없다. 어쨋거나 그것은 우리시대의 문화적 징후symptme culturelle군으로 보여 진다.

김주영_신성한 소금_스위스 시옹, 론강의 원천인 만년 설빙 지대에서 론강이 끝나는

남불 마르세시산 천염의 제식_퍼포먼스_2003

김주영_어느 농사꾼 이야기_퍼포먼스_다큐의 현장, 영암, 광목, 쌀_2003

노마디즘 작품으로서의 오브제, 행위, 사유의 영역은 또 다른 의미, 또 다른 가치에 의해 기능을 갖는 세상, 또 다른 표준에 응하는 세상, 그리고 사물과 사람들 사이에 더 특별한 관계를 가져오도록 유도하는 세상으로 매김 되어 진다. 이를 화이트Kenneth White는 "모더니즘의 끝자락에서 다양한 방식의 노마디즘에 대한 일련의 이끌림은 이동과 공간에 대한 욕망이며 변증법적으로 풀이되는..." 라고 했다. 변증법 적이란 안/밖의 연결고리를 위한 제3의 합류을 말하며 "존재의 에너지를 펼치기" 위한 새로운 방법의 탐색으로 이들에게 닥치는 문제들을 해결해 가는 직설법이 아닌 은근한 알레고리다. ● 여기서 '현장site'과 '산문recite'으로서의 노마드는 아마도 예술가가 역사들 사이를 이어주는 사건으로 풀이된다. 이는 예술이라는 영역에 개입하는 정치, 사회와 긴밀한 미학적 뿌리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인문적theorie 관계가 있음을 강조한다. 따라서 사회학적 변형transformation의 공개념은 노마드를 통해 작업이 이루어지는 자리바꿈 deplacement의 특별한 형태며 동시에 개별적 양상으로 나타나는 '예술을 한다pratique'는 의미와 맞닿는다. 이는 지금까지 쟁점이 되었던 순수와 참여의 이분법적 잣대가 경직된 안띠 테제의 개념으로 고정되어 버릴 위험성을 환기 한다. 가령 아텔리에로부터 나온다는 컨텍스트에서 본다면, 이미 예술이 개인의 내면에서 라는 서구 모더니즘에서 자연(여기서 인간은 당연히 자연의 요소로 보고), 세상과 만나려는 열려진 창작과정과 같은 신념의 개입이 노마드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되고 따라서 노마드는 지리학적, 생물학적, 그리고 사회, 역사, 인류학 등 삶의 현장과 만나며 예술가들의 관심은 시간과 공간 속에 복합적으로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술가들에게 무한한 이데idee를 제공하는 노마드는 그 자체가 예술적 실체로 놓인다. ● 분명히 새로운 유랑주의는 우리시대 문화의 두터운 층을 형성해 나가고 있다. 티베리엔의 '작품의 유랑 적 특성'에서 "...머물 곳을 잃은, 그래서 이미 이동을 내포하고 있는 낌새를 목격하게 한다."고 했다. 노마드 과정의 작업realisation에서 현장은 서술(일기나 기록부, 뎃상, 사진 등)의 완곡한 방법에 의하여 그 이동자체를 확장시켜나가며 작품의 장소는 이 경우 대지 예술가들에게서 보여 지는 여정과 여정사이의 영역, 장소lieu로 나타난다. 노마드에 대한 서술은 보다 서정적이고 무엇보다 이 나레이션은 작업과의 관계를 이어주는 매개체로서 충분하다. 이때 장소의 기능은 흔히 난해할 수 있거나 엘리트적이라고 혹자는 보겠지만 그 역시 대단히 관념적 엘리트주의다. 예술의 고고학(우리들의 저 낡은 지식)에서 나와 보면 가령 이동으로서의 여정旅程(로路)은 그 자체가 장소가 되며 그래서 노마드는 목동의 현실처럼 작품의 불가분한 영역에 통합하는 벡터로 보아진다. 마치 초원을 이동하는 유목민의 삶의 현장과 같다.

김주영_하늘로 가는 배_어느 농사꾼 이야기의 프로로그_모심기, 거울, 중 말화실_2003
김주영_姬 觀音像_설치 퍼포먼스_2003

노마드는 창작행위의 어떤 제도화된 규범이 아니다.(Idem., la logique atonale) 마치 롱Richard Long의 걷기가 그대로 '예술 창작'이 되는 예와 같이 노마드는 낮선 장소의 방문뿐만 아니라 낮선 문화에 불확실하게 접근한다. 노마드 예술가는 이 장소에서 저 장소를 경험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이 시간과 다른 시간을 경험한다. 이를 팬더는 '실존의 경험'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몇km를 가는 물리적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이동을 경험하는 만남의 상태다. 자리 옮김은 그렇기 때문에 사유의 맥락을 질서 있게 이동시킨다. 그 질서는 대단히 낮설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영토territoire'의 탈영토화deterritorialisation라고 말한 것도 그것이 암시하는바 역사에 가치 있는 장소를 제공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인류의 물리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것을 함유하는 역시 탈-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마도 땅과 친숙해진 후에 세상을 투명한 눈으로 바라보고 싶은 바램 때문인가. 메를르 퐁티의 말처럼 때로는 소통에 이르는 '또 다른 경험, 금지된 경험, 가능한 경험,' 즉 타자의 경험임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지극히 단순한 현실presence의 시인이다. 그리고 경계표시가 되었던 안 되었던 그들의 도정道程( 땅, 바다, 하늘)에로 전통적 창작 '영역'을 확장하였다는 사실realite이다. 이 과정은 형이상학적인 재 영토화reterritorialisation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Nomadisme이란 새로운 삶을 탐사하는 사유의 여행이다. 그러나 그것은 볼모가 된 땅을 버리고 떠나는 이주가 아니라 거기에 달라붙어 새로운 생성의 지대로 만들려는 실험이다. ( 이진경, 노마디즘 1 )그 재 영역에 경계는 없다. 무한한 이탈, 떠남sortir만 있을 뿐이다. 이제 흙(대지)은 작품의 장소로서, 작품과 같은 요소의 공간으로서 의연하게 거기la에 있으며 예술가들에게는 아직도 이 처녀지에 관하여 지속적인 관심을 갖는다. 길 떠남은 이전까지만 해도 마치 사진처럼 대중에게 작품을 보여주는 방법의 도구로만 충분했다. 그러나 재료이며 작품의 장소이며 오가는 방법으로서의 노마드는 작가와 공유하는 in situ; 상황 를 설정하게 된다. 따라서 노마디즘은 작품을 제작하는 곳의 현장 공간이란 이유 때문에 설치Installation라는 영역의 특별한 개념을 낳는다. 여기서 설왕설래하는 공간 세계는 그들에게 본질적인 미학의 디멘션dimension을 획득하게 하는 핵심이 되는 것이다. ● 그럼 '떠난다.'라고 하는 이 결정이 지향성intentionalite을 갖는다면 노마드', 결국 '떠남의 지향성'은 무엇인가? 이제 예술가들은 '떠난다.'고 하는 행위를 통하여 조건 없이? 무방비상태로 다른 곳으로 움직인다. 시공의 확장, 경험의 이동, 이런 과정의 노마드를 통해 작가는 자신에게 되돌아간다. 세계로 되돌아간다. 삶의 현장에로 되돌아간다. 고하는 지향성이다. 가령 예술가들은 작가와 작품, 작품과 관객/독자를 묶어주는 하나의 또 다른 형식을 취하는데 현장의 이야기 식narration 서술 recit도 그 중의 하나다. 이 때 오브제의 실체성은 장소lieu의 '영역 권'領地mouvance'을 방기, 즉 비 영역non-lieu 화하며 사유로, 개념으로 전개된다. 결국 팬더가 드뢰즈Gilles Deleuze와 가타리 Felix Guattari의 표현을 빌려서 표현한 경우처럼, "예술적 제스츄어 속에서, 그리고 자전적인 차원에서 재해석되어질, 특별한 이동 deplacement인 노마드의 '산문recite'의 의미는 비 영역 화 deterritorialiser다. 그런데 다시 떠난다partir라고 하는 것은 '현장site'이란 공간으로서, 그리고 그 공간의 개념으로서 재 영역 화reterritorialiser에 연류 된다." 그래서 추상적이지 않으며 대단히 구체적이며 더욱 허구적이지 않으며 현실적이다. 이렇게 보면 떠남과 돌아옴, 비영역과 재 영역 사이에 어떤 회기성(J. Baudrillard)을 감지한다. 이점이 미학적 혹은 미술사적 맥락으로 볼 때 파생되는 모호함과 비 규범성에도 불구하고 예술/인간을 대립이 아닌 旋回의 장에서 바라보는 노마드 예술의 감추어진, 그러나 명쾌한 정체성이다. 크라식한 어구를 빌린다면 "지구는 나의 파렛트"이기 때문이다. ■ 김주영

Vol.20050509a | 김주영 개인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