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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0411_월요일_06:00pm
갤러리 아트링크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2-11번지 Tel. 02_738_0738 www.artlink.co.kr
먼저 이필두가 구상한 전시공간에 대해 묘사해 보자. 우리가 전시장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바닥에 설치해 놓은 23대의 텔레비전 모니터와 벽에 투시된 영상물이다. 바닥에 깔린 모니터들은 일면 무질서한 듯 보이면서 동시에 어떤 질서에 의해 통제받고 있다. 더욱이 이 모니터들은 그 규격이 제각각인 만큼 서로 독립적이면서 동시에 상호의존적이다. 마치 중앙으로부터 영양분을 공급받아야 생존할 수 있는 장치처럼 하나의 분배기로부터 배분되는 영상물을 토해내는 이 모니터들을 연결하는 전선들은 그런 의미에서 에너지의 통로이자 서로를 연결하는 모니터들을 살아있게 만드는 생명의 끈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이필두의 영상설치작업에서 바닥에 늘어놓은 모니터와 그것들을 연결하는 선들, 그 밖의 기계장치, 이 모든 것들이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이자 작품자체이기도 하다. 이 기계장치들은 공감을 장악하고 또한 활성화시킨다. 따라서 그의 작업에 있어서 이러한 설치의 형식과 구조는 모니터 속의 영상만큼이나 중요하다. 완제품의 상자 속에 감춰진 내부공간을 노출한 듯한 이러한 설치의 방식은 그의 작업에 있어서 주제이자 내용이기도 한 언어의 구조를 떠올리게 만든다.
이필두의 영상작업에서 중요한 모티브는 언어이다. 이때 언어란 표정이나 손짓 등의 신체로 표현하는 언어도 포함할 수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성대로부터 나오는 소리이거나 소통을 위해 작성된 글을 일컫는다. 구조언어학자인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는 언어에는 불변하는 구조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언어를 '표시하는 것'인 기표(signifiant)와 '표시되는 것'인 기의(signifie)로 구성되어 있는 '기호들의 체계'로 파악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언어를 구성하는 기호에 대해 '한 사물(대상)과 한 명칭(개념)이 결합된 것'이라고 이해하기 쉬우나 소쉬르는 "언어기호가 결합시키는 것은 한 사물과 한 명칭이 아니라, 하나의 개념과 하나의 청각영상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기표 없는 기의나 기의가 배제된 기표란 정상적인 언어로 자리할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 관계가 지극히 자의적이란 데 있다. 즉 우리가 꽃이라고 할 때 그것이 무엇을 기시, 의미하는지 금방 이해하지만 '플라워'라고 부르는 사람에게 꽃은 단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에 불과하다. 나아가 내가 언어를 이해한다는 것은 문법이라는 사회적 약속과 규칙을 이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소쉬르는 언어란 사회적 규칙이라고 했고, 이 사회적 규칙으로서 언어를 개인이 수행하는 언어의 체계인 파롤(parole)과 분리하여 '랑그(langue)'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필두가 이 설치작업을 통해 보여주려 하고 있는 것은 사회적 언어인 '랑그'의 소통불가능성일 것이다. 작가는 그 원인의 하나를 급진적인 현대화 과정에서 야기된 지식의 불안정성으로부터 찾고 있다. 그러나 언어 자체가 얼마나 불안정한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이미 성서나 신화를 통해 경고, 예견된 바 있다. 창세기에서 바벨탑의 붕괴는 곧 하나의 언어로 소통할 수 있는 만국공통언어란 불가능함을 예견한다. 이필두의 작업에서 파편화된 영상들은 붕괴된 바벨의 파편과도 같은 것이다. 태초에 말이 있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로고스는 '말 해진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말은 모두에게 고루 통용되는 언어라기보다 특정민족에게만 소통 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에 바벨탑 이전의 하나의 언어는 말 그대로 이야기(mythos)에 불과하다. 사실 에스페란토의 시대보다 방언(vernacular)의 시대가 열등하거나 미개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지만, 소쉬르가 말한 것처럼 언어구조의 뿌리인 기호체계가 자의적으로 언어를 이용한 공평무사한 소통은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이란 특이동물의 희망사항에 불과한지 모른다. 수많은 방언의 존재는 역사와 문화를 풍부하게 만든 자양분이자 그 결과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바벨탑 이전의 만국공통어를 그리워한다. 그것은 인간이란 종족이 그만큼 할 말이 많고 자신이 하는 말을 다른 사람이 단지 들어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해해주기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언어를 통한 완전한 소통이 불가능할지라도 언어는 여전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크 라캉(Jacques Lacan)은 아기가 언어를 습득함으로써 자아를 형성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어느 면에서 불가해한 듯 보이는 무의식조차 언어처럼 구조화 되어 있다고 말한 것은 라캉이었다.
이필두의 작업이 이러한 무의식의 세계를 천착하고 있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모니터 속에서 표류하거나 질주하고 있는 독해불가능한 문자, 조각난 글자와 더불어 다소 몽환적인 배경음악, 서로 상관없이 보이는 듯한 영상들의 돌출과 소명, 중첩과 병치 등은 오리무중의 심층무의식으로부터 건져 올린 '기억의 파편'들처럼 보이기도 한다. 유희적이면서도 심각한 이 '마음의 기록물'은 궁극적으로 소통의 단절과 부재에 대한 불안한 증언이자 고백이다. 더욱이 새로운 매스미디어의 과다출현은 전통적인 의사소통방식의 전면적인 재편을 통한 소통의 새로운 패러다임 설정을 요구하고 있다. 지금은 바벨탑에의 향수에 사로잡혀 있을 때가 아니라 그 폐허를 수습하는 설계도를 그려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의 언어에 대한 통합은 그의 작품이 제시하는 대안이 아니다. 그가 편집해 놓은 영상물은 텔레비전 모니터로부터 탈출하려는 듯이 사각앵글의 틀을 거부하고 바깥으로 흩뿌려지고 있다. 이러한 시도는 권위와 형식을 부정하는 작가의 자유의지에 대한 심리적 진술이자 하나의 언어에 의한 사고(思考)와 표현의 획일화를 거부하려는 의지의 표출인 것이다. ■ 최태만
Vol.20050411b | 이필두 영상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