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2동 토끼

류지선 회화展   2005_0331 ▶ 2005_0409 / 일요일 휴관

류지선_502동 토끼_캔버스에 아크릴 채색_117×91cm_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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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0331_목요일_05:00pm

아트포럼 뉴게이트 서울 종로구 신문로2가 1-38번지 내자빌딩 1층 Tel. 02_737_9011

어느 눈 감은 토끼의 '일반적인' 자화상 : "눈 감은 토끼야. 그냥 앞으로 내달려라!" ● 더러 이런 엉뚱한 상념에 젖을 때가 있다. 세속적인 견지에서 성공한 미술인이 되기에는 작업 방식의 다원화가 허용된 지금보다, 순수 대 참여라는 선명하고 간결한 대립구도 속에 갇혔던, 하물며 정치적 외압마저 엄존했던 80년대가 전업 작가를 꿈꾸던 미술학도에겐 '좋은 시절'이었을 지도 모른다는. 당시 정황 속에 몸을 담근 바 없는 나의 이 같은 끔찍한 추측이 마냥 터무니없는 공상일까? 작금의 미술인이 사회와 맺고 있는 느슨하기 짝이 없는 긴장관계를 감안할 때 그 짐작이 몹시 부당한 수준인 건 아닌 것 같다. 당시 미술계를 양분한 두 고지(高地) 위의 전사들은 이제는 교직을 얻어 정착했거나, 그 무렵의 미술 지형도를 회고하는 숱 하디 숱한 기획전들마다 모셔지는 노병 대접을 받는다. 그때와 하나 달라진 점은 한때 고지를 달리했던 그들이 이제는 더 이상 '따로 놀지' 않는다는 점. 알쏭달쏭한 전시타이틀 아래, 한때의 적과 아군이 한 공간에서 아무 대립 없이 출품자로 참여하는 것이 더 이상 어색한 장면이 아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게 뭘까? 노장들의 빛바랜 현주소가 오늘의 미술 지형, 아니 좀 더 논의의 폭을 좁혀 이번 전시(류지선)와 대체 무슨 연관이 있다는 걸까?

류지선_사랑이 끝난 후_캔버스에 아크릴과 볼펜_130×162cm_2005
류지선_내가 지켜야 할 것_캔버스에 아크릴 채색_162×130cm_2005

이 바닥에서 지금 순수주의로 대변되는 '추상'을 지향하는 것은 결코 트렌드가 될 수 없다. 물론 그것의 반대급부에 해당하는, 프로파간다를 전면에 내세운 80년대 발 '리얼리즘'은 더더군다나 발붙이기 힘들다. 둘 다 정세(政勢)의 패러다임이 바뀐 오늘날, 일반인은 물론이거니와 미술계의 정서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하는 탓이다. 한국의 미술사에서 유서 깊은 계보를 지녔음에도 순수와 선동적 리얼리즘의 후예들은 다만 노회한 선배 격인, (유행과는 담을 싼) 그들의 지도교수들로부터 간신히 교감을 나눌 뿐, 교문을 벗어나는 순간 그들의 작품은 '철지나고 진부한' 습작 취급받기 딱 좋다. 그래서 택한 것이 주제로서의 '일상'에 대한 지겨울 정도의 천착과, 방법론으로 매체미술을 통해 캔버스를 저버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포착된 일상에 대한 자의식으로 요약되곤 하는 일기체 성격의 작업은 침묵을 신앙으로 굳게 믿어온 순수주의자의 눈에는 리얼리즘의 서자 정도로 보였을 테고, 미디어 기반 매체작업 역시 방법적 다원주의를 관철시킨 공은 인정되었지만 정적(靜的) 이미지에 오랫동안 단련된 노장들과 미술계의 정서에 딱 부합하는 것만은 아니어서, 관람 내내 "대체 언제 즈음 끝나지?"를 생각해야 하는, 소박하나 간과할 수 없는 문제점을 내장하고 있었고 영상미학은 아무래도 영화라는 별개의 장르에서 이미 원활히 수행되는 것만 같았다. 그렇다면 쟁점은 노병 간의 미학 전쟁이 어정쩡하게 휴전한 지점으로 되돌아오고 만다. 여전히 '순수'가 제일이다, '참여'가 우선이다 라는 소신을 굽히지 않으면서도 어정쩡하게 휴전을 그어버린 선배들의 봉합 지점으로 후배들이 귀환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과격한 미학적 쌈박질은 종적을 감췄고 후배들의 김빠진 계승 혹은 주제로서의 일상과, 방법론으로서의 미디어가 잠시 지형에 끼어들었었다는 얘기다. 그렇지만 그 정도 발버둥으로는 이 바닥의 큰 변화를 촉진시키기엔 세상이 너무 바뀌어있었다. 이 경우 해법은 다음과 같은 것이 될 터이다. 프레임을 포기하지 않고서(오해는 없길! 미디어 아트도 동일한 요구가 기대된다. 다만 이글의 대상인 류지선이 평면 작가이기에 논점을 프레임 작업에만 맞춰 기술한다.), 순수주의의 도그마와 리얼리즘의 단순함을 동시에 극복하는 길을 찾는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이게 가능할까? 이것을 미술인의 지상과제로 설정하고 있는, 류지선을 포함한 적지 않은 작가들은 전략의 이데올로기를 아도르노나 부르디외로 부터 지원받곤 한다. 쉽게 얘기해서 예술의 자율성과 현실과의 긴장감을 동시에 견지하겠다는 포부다. 말이 쉽지, 이걸 어떻게 한 평 안팎 흰 네모 칸 속에 구현한단 말인가? 지면도 한정되었으니 내가 그간 관찰한 바를 곧바로 털어놓을까 한다. 선배 작가들의 교전이 멈춰버린 90년대 이후, 미디어와 사진이라는 복병과 순수미술 전반의 침체라는 정서적 위축 속에서, 일부 후배들의 처세술은 그들이 극복하고자 했던 두 극단적 선배들이 방법론을 하나 씩 가져와 조합해버렸다. 어떻게? 이렇게!

류지선_살진 소파_캔버스에 아크릴 채색_162×130cm_2005
류지선_오늘도 무사히_캔버스에 아크릴 채색_112×145cm_2004

첫째 캔버스는 구상과 비구상, 어느 한쪽으로 크게 치우침 없이 단조롭고 장식적으로 간다. 보기에 좋아야 하며, 명상과 동의어로 간주되었던 단색조 혹은 그와 정반대로, 시각적 부담이 되었던 난삽한 채색 모두로부터 비껴가야 한다. 이 두 부류는 과거를 상기시키는 색채 이원론이므로. 둘째 무거운 형이상학적 주제에 함몰되거나 현실에 대한 직설법을 표명해선 안된다. 둘 다 노회한 선배 냄새가 나니까. 그렇다면 무슨 수로 선배의 그늘을 피해가지? 알레고리를 빌어 화면의 단조로움도 피하고 그 특유의 간접화법에 편승해 현실에 대한 작가의 자의식을 증거 하면 된다. 류지선도 바로 이런 케이스이다. 1회부터 6회까지의 개인전 연보는, 그리기에 대한 작가의 한계와 고민을 담은 9년간의 고해성사다. 그동안 그가 만들어 낸 화면은 시끌벅적하지 않았고 이야기를 담되 동물(원)을 대동해 알레고리로 현대인의 난처한 입장에 관해 빗대어왔다. '동물'은 사람의 정서를 투영하기에 부족함 없는 적자였을 것이다. 거대한 소파에 무력하게 앉은 인물상의 머리통만큼은 토끼의 몫으로 남겨둬야 했고, 그로인해 신체의 균형미는 간발의 차로 무너진다(토끼의 머리가 인체보다 작기 때문에). 균형미의 붕괴는 두말할 나위 없이 인간 실존의 붕괴까지 함의한다. 잠든 (팝콘) 애인을 뒤로 하고 담배를 입에 문 남자의 얼굴도 토끼의 몫이다. 그 효과는 앞의 작품과 동일하다. 자 그런데 좀 꼼꼼히 얼굴을 뜯어보자. 어깨 위에 '올려진' 토끼의 머리통은 이미 죽어있다! 숨이 끊어진 포유류의 눈과 표정을 우리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일련의 토끼 연작이 보여주는 부조리는 소파에 앉은 문약한 사내의 어깨 위에, 그리고 방금 정사를 마치고 담배를 입에 가져가는 사내의 몸통 위에 토끼 머리가 부조리하게 '얹혀있어서'이기보다는, 그 토끼 머리마저 이미 '죽은' 채이기 때문이다. 힘을 꽉 주고 질끈 감은 눈의 토끼는 이미 인체라는 유기체와는 동떨어진 독자적인 무기체에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그 무기물을 응시하며 관객은 인간이 놓인 아슬아슬한 처지에 관해 감정이입을 해야 마땅하며, 그 같은 관객의 시선을 통해 비로소 토끼 연작은 '조리에 맞춰' 간다. 소위 '토끼 머리 연작'을 그 맹아로 하는 이후의 이미지 병치 작업들 역시 무관한 이미지를 결합하여 주제의식을 변증하려는 방법인데 이런 이미지 조합법이 미술판에서는 새로운 것은 아니다. 따라서 흑백으로 뭉개진 진압 전경들 사이로, 혹은 총천연색 화훼 사이로 솟아오른 뜬금없는 토끼 귀는 결국 나약한 현대인의 알레고리로 토끼를 통해 매개된다는 점에서 '죽은 토끼 머리' 연작의 변형태일진대, 비주얼은 전자보다 우세할지 몰라도 메시지 전달력은 떨어진다. 직설법을 피하라는 아도르노의 주문은 무관해 보이는 이미지들 간의 병치로 이어졌고 다만 그 위로 토끼 귀 한 짝만 공허하게 올려졌지만, 작품을 마주한 관객은 그 의미를 찾기 위해 작가의 설명을 기다려야할 지도 모른다. 이런 견지에서 류지선의 고민은 5회 개인전 혹은 바로 지금 현재 수행 중인 동물 머리 연작에 조금 더 천착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작업 모티프의 시작과 끝을 토끼에 올인 할 개연성은 현재로선 선명하지 않지만, 그래도 여전히 동물과 인간 사이의 결합이 만들어내는 효과는 류지선에게 실보다 득이 많은 배팅이다. 마두인(馬頭人), 미노타우루스라는 아주 오래된 전례부터 근자에 이르러 거미와 인간을 결합한 초인에 이르기까지, 동물적 속성과 인체미를 결합하려는 갖가지 상상력이 가져온 미학적 효과와 파생 의미는 연고가 깊다.

류지선_촛불_캔버스에 유채_96×154cm_2005
류지선_흔들리다_캔버스에 콘테와 실_91×117cm_2004

나의 요구는 간단하다 이미지 병치보다 알레고리에 보다 몰두하라는 것이다. 나의 요구가 없더라도, 그가 '동물'로부터 벗어나진 못할 것이다. 왜일까? 류지선의 인품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전무한 내가 한 가지 겁 없는 '추측성 폭로' 하나를 여기서 터트릴까 한다. 그것은 바로, "류지선은 이미 스스로 토끼이다!"라는 사실이다. 짐작컨대 그는 서울대에 적을 둔 근 10여 년간 교수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던 적은 없었을 '것이다.' 나처럼 교수와 각을 세운 앙숙관계는 당연히 아니었을 테고, 보수적인 교수들의 정서에 비교적 발 맞춰간 학생이었을 '것이다.' 교수와 의견이 분명 달랐지만 나처럼 정면에다 직격탄을 날리는 무모한 후레자식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서울미대처럼 보수주의가 만연한 학풍 속에서 10여년을 무난하게 버텨온 걸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설령 자신의 미적 취향이 "회화 고유의 존재성이나 평면성에 대한 환원적 관심보다는 예술은 시대의 반영이라는 입장에 동조하며", "예술의 영역을 사회를 구성하는 하나의 특수한 영역으로 규정하고 있는 부르디외의 입장과 유사"(이상 류지선의 대학원 세미나 발표문 발췌)할 지라도 자신과 견해를 달리 하는 교수들과 그럴듯한 불화에 이르지 조차 못했을 '것이다.' 그는 거대한 아버지의 그늘 아래 있다. 그늘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바로 소심한 토끼가 되는 일이다. 그리고 그 토끼는 마땅히 눈을 감고 있어야 한다. 엄한 아버지와 맞짱 뜰 수 없었던 토끼는 그저 눈을 질끈 감고 알레고리를 향해 내달릴 뿐이다. 완고한 유태인 아버지를 평생 두려워했던 카프카가 바로 그 아버지로부터 인정을 받으려 노심초사 했다는 역설을 우리는 잘 기억한다. 끝내 아버지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도, 대들 용기도 없었던 카프카는 소설 속 주인공으로 분하여 자신을 결국 딱정벌레로 격하시킨 「변신」을 발표했다. 류지선의 토끼를 필두로 한 동물 연작은 현대성의 가속도와 마주한 도시인의 무력한 휴머니티를 고발하기 보다는 스스로 '토끼'인 자신과 그를 둘러싼 미술계에 관한 알레고리다. (* 내 짐작의 진위 여부는 류지선이 자신의 모교 교수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면밀한 내적 관찰을 통해 판명될 거라 확신한다. 이건 작가의 몫~!) 글이 좀 길어진 관계로 시간이 지체됐다. 이제 글을 잠시 접어두고 내달릴 시간이다. 앞을 향해 분주히 내달리는 것 말이다. 여기서 잠깐! 내달릴 때에는 모두들 눈을 질끈 감아야 한다. 잊지 말자. ■ 반이정

Vol.20050401b | 류지선 회화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