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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0318_05:00pm_금요일
가일미술관 경기도 가평군 외서면 삼회리 609-6번지 Tel. 031_584_4722
스트라이프에 의한 순수형식 ● 회화는 흔히 그려진 그림을 말한다. 이는 물론 구상적이거나 추상적인, 그리고 직접적이거나 암시적인 그림 모두를 아우른다. 이러한 정의를 받아들인다면 적어도 백희경의 작업은 회화의 일반적인 의미로는 범주화하기가 어렵다. 물론 바탕처리를 위한 안료 층이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바탕일 뿐이고, 화면에는 온통 테이프가 드러나 보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작업은 화면에다가 다양한 유형의 평면 오브제(예컨대 인쇄물과 같은)를 부착한 오브제 미술의 한 형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알려진 바와 같이 오브제 미술은 정통 회화와 일반적인 사물(성)이 만나는 접점에 주목한 현대미술의 산물이다. 작가의 작업은 이처럼 오브제 미술에 그 맥이 닿아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현저하게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평면회화의 형식논리를 따르고 있다. 그러니까 평면 오브제와 평면회화의 형식논리가 유기적으로 만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그 관계의 선후와 경계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왜냐하면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강화하는 상호 내포적이고, 상호 보충적인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백희경의 작업은 테이프를 이용한 조형작업이다. 이는 흔히 기하학적인 선이나 면을 얻기 위해서 테이프를 부착했다가 도로 떼어내는 식의, 단순히 작업의 과정에 테이프를 도입하는 경우와는 구분된다. 너비가 다른 흰색 테이프(실제로는 엷은 미색에 가까운)와 검정색 테이프를 평면의 캔버스 위에다가 번갈아 가며 부착한 작가의 작업에서는 최종적인 화면에서도 여전히 테이프가 부착된 채로 남아 있으며, 따라서 순수한 의미에서의 테이핑 작업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작업의 핵심은 아마도 흰색 테이프와 검정색 테이프가 부착된 화면에 드러난 선의 띠(스트라이프)가 주는 시각적 효과와, 그 조형적 의미에 맞춰져 있을 것이다. 이 일련의 스트라이프 작업들은 작가가 구상하고 있는 프로젝트의 일부이다. 이를테면 작가는 각각 「반복 - 점으로부터」,「반복 - 선으로부터」, 그리고 「반복 - 면으로부터」로 연이어진 일련의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있으며, 근작은 그 한 단락으로서 실현된 것이다(이 가운데 점으로부터 시리즈는 한지 오브제 작업의 형태로 이미 실현된 바 있다). 이 일련의 제목들에서도 암시되고 있듯이 작가의 작업은 회화의 장으로부터 일체의 재현적인 암시들, 단서들, 계기들을 배제한 대신에, 점, 선, 면, 색채, 양감, 질감, 그리고 평면(성)과 같은 순수한 회화적 요소에 천착한 모더니즘의 회화 관념에 그 맥이 닿아 있다. 그리고 이를 추동하는 계기도 회화의 장 외부보다는, 예술의 자율성이나 회화의 내재율과 같은 회화의 장 내부로부터 온다. 무엇보다도 일련의 제목들에 앞서 그 전제로서 주어진 '반복'의 논리가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말하자면 '반복'이란 감각적 행위를 가급적 절제함으로써 오히려 회화의 본질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일종의 전략적인 장치로서 도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백희경의 작업은 모더니즘 회화 원리로부터 추출된 평면(성)의 개념을 일종의 오브제적인 대상(성)으로까지 발전시킨 미니멀리즘의 한 형태로도 볼 수 있다. 여기서 미니멀리즘의 오브제(리터럴 오브제)와 대상성의 개념은 모더니즘 회화의 논리적 정점이며, 따라서 작가의 작업은 모더니즘으로부터 미니멀리즘에 연이어진 논리적 스펙트럼을 그대로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심플한 구조(최소한의 구조)와 함께 소재(테이프)의 물성을 함축하고 있으며, 여기에다가 벽면의 표면 위로 돌출된 구조체가 일말의 공간적인 점유마저 내포한다. 이는 말하자면 일상적인 물건이나 상황을 재현한 것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정통 미학에서의 예술작품(예컨대 절대추상에 나타난 회화적 평면과 같은)에도 속하지 않는 문자 그대로의 특이한 오브제를 실현한 것이다. 아마도 이처럼 그 정체성과 의미가 불투명한 오브제를 중성적인 오브제, 간(間) 오브제, 사이 오브제로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작가의 작업은 선명하게 드러나 보이는 외관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비교적 명료한 논리적 프로세스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이처럼 불투명한 정체성에 엇물려 있으며, 이는 작가의 작업을 미니멀리즘 이후 즉 후기 미니멀리즘의 한 형태로 보게 한다. ● 또한 작가의 작업은 그 드러나 보이는 구조가 최소한의 형식으로만 구조화돼 있다는 점에서 구조주의에 그 맥이 닿아 있다. 구조주의는 모든 상황과 현상 그리고 사물 속엔 이를 명료하게 밝혀줄 수 있는 최소한의 구조가 들어 있으며, 따라서 세계의 감각적이고 현상적인 국면을 이런 최소한의 구조로 환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작가의 작업에서 세계를 자기의 인식 채널 안쪽으로 불러들여 재편하려는 욕망의 형태로, 세계에다가 일종의 인공적인 체계를 부여하려는 질서의식의 형태로 나타난다. 말하자면 주어진 회화적 평면 자체를 일종의 인공적인 장, 인공적인 체계로 보고는, 그 속에다가 감각적인 세계를 불러들여 이를 최소한의 기하학적인 형태로 환원하고, 또한 현상적인 세계를 관념적인 세계로 환치한 것이다.
백희경은 평면의 캔버스에다가 테이프를 부착하는 식의 스트라이프 작업에만 머물지 않고, 이를 장방형이나 정방형의 입체 구조물 작업에로까지 연장한다. 벽면 위로 돌출된 이 구조물들은 평면과 입체를 넘나들며 전시 공간을 작업의 일부분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그런가하면 캔버스나 입체 구조물 대신에 아예 전시 공간의 벽면에다가 직접 테이프를 부착하는 식의 일부 작업에선 이러한 공간 개념이 보다 적극적인 의미를 띠고 나타난다. 이를테면 캔버스에다가 테이프를 부착한 평면 작업이 그 속에 평면 오브제와 함께 정통적인 평면 추상회화의 형식논리를 함축하고 있다면, 그리고 입체 구조물 작업이 평면과 입체를 동시에 실현하고 있다면, 벽면에 테이프를 부착한 이 일련의 작업들은 실제와 이미지와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 그리고 그 자체가 벽화의 또 다른 한 형식을 열어 놓고 있기도 하다. ● 이로써 작가의 작업은 이미지에 한정된 조형 조건(캔버스의 평면으로 나타난)으로부터 전시 공간으로, 그리고 재차 실제의 장(벽 곧 일상성에 그 맥이 닿아 있는)으로까지 논리의 촉수를 미치고 있는 것이다. 이와 함께 작가는 흰색의 테이프와 검정색의 테이프를 가로 세로로 교차하고 중첩시키는 방법으로써 일종의 빛의 일루전 효과를 꾀하기도 한다. 다른 평면 작업들도 그렇지만 특히 이 작업들에서는 일루전과 함께 마치 화면이 움직이고 있는 것과 같은 착시효과가 느껴지며, 이에 따른 옵아트의 가능성마저 엿보인다. 그런가하면 작가의 띠 작업은 바코드의 한 형태를 연상시키며, 이 경우 작업의 논리는 일종의 경제사회학적인 논평에로까지 확장된다. ● 이처럼 캔버스의 평면에다가 테이프를 부착하는 방법론에 바탕을 둔 백희경의 작업은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고 확장된다. 때때로 이는 단순한 형식실험의 확장에 머물러 있지 않고, 그 자체로서 논리의 다변화를 불러오기도 한다. 즉 작가의 작업은 그 바탕이 되고 있는 논리적 프로세스(예컨대 모더니즘과 미니멀리즘의 논리와 같은)에 머물지 않고, 대신 상대적으로 더 중첩적이고 다의적인 의미의 지층들을 향해 열려 있다. 하지만 그 논리와 의미는 언제나 어김없이 모더니즘의 논리(예컨대 평면성과 같은)에로 되돌려진다. 감각적 행위를 최소화한 반복의 논리와 절제된 화면에 나타난 질서의식, 그리고 기하학적 추상을 통해서 순수한 형식미를 추출하고자 한 작가의 의지는 이처럼 모더니즘에 바탕을 둔 형식논리에 그 맥이 닿아 있으며, 이와 더불어 모더니즘의 시제가 현재진행형의 시제로서 여전히 유효함을 말해주고 있다. ■ 고충환
Vol.20050327c | 백희경 개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