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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0325_금요일_05: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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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빈 자리를 채우는 내 밖의 모든 것'을 담는 그릇으로서 디자인 ● 우리가 보아서 알고 있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교묘하고 세세하게 구분하여 이름 붙이는 가운데 미술의 자리가 생겨난다. 그 미술의 자리에서 우리의 나눔과 구별의 버릇은 또 작동하여 마치 오랫동안 인류가 그래왔던 것처럼 누누이 긴 설명을 붙여가며 자르고 나누어 그것을 전문영역이라 굳이 말한다. 이처럼 우리는 이미 우리가 보아서 알고 있는 것들을 실생활에서 아무런 소용에 닿지 않는 짓-행위를 통해 앎의 단초를 발견하는 듯 기뻐한다. 이것이 우리 생활에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다루는 기술-미술이어도 좋고 예술이어도 좋다-에 대해 최소한의 공감대를 유지하게 하는 기준선이 된다. 그 기준선 안에 디자인은 자리를 하나 차지하고 있다.
디자인, 분명 외래어인 이 단어의 말뜻은, 그러니까 순 우리말로 규정될 수 없는 이 개념은 사전적으로 우선 설계, 밑그림, 구상, 계획, 마음먹음(마음으로 정함)으로 정의된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디자인-Design이라 하면 시각적인 정보들을 만들어 내는 직업군으로 분류하고 이해하기 시작한다. 디자이너들도 그 유사한 정의에 동의하고 있다. 하지만 이 말뜻에 담긴 '계획'이랄지 '마음먹음' 또는 '마음으로 정함'에 대한 개념에 대해 우리는 한 번 더 깊이 생각해보지는 않는다. 오히려 디자인에 대해 우리는 우리 실생활에서 쓰임새 중심으로 생각하자면, 이 세 가지 말뜻을 좀 심사숙고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접근방식을 통해 얻어지는 이해는 결국 우리 디자이너들의 작업환경을 크게 확장할 것이고, 디자인 작업을 사회적으로 이해하는 행위의 정당성을 찾아내게 할 것이다. 특히 내게 있어 이 개념 접근은 개인적으로는 내가 알고 있는 디자이너로서 문승영을 '디자이너로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해석이 되기도 한다.
'계획'한다는 의미는 단순히 기본 작업, 작업을 위해 거치는 과정의 첫 단계가 아니다. 계획이란 무수히 많은 정보를 취합하고 골라내서 분석하는 일 따위를 총칭하는 말인데, 이 과정에 덧붙여 분명한 목적을 염두에 둔 행동 일체를 지칭한다. 따라서 디자인이란 무릇 계획이 전제되지 않는 어떤 행위를 생각할 수 없다. 이 경우 문승영은 매우 독특한 '계획'의 성질을 자신의 작업에 투사시키는 결과를 만들어 낸다. 그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대개의 디자이너들도 비슷한 과정을 치러내지만 대부분은 정보를 취합하는 데 그치고 만다. 문승영은 정보를 취합하는데 있어 어찌 보면 상업적 상투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작업과정은 디자인의 상대를 무시하는 행동으로까지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상대가 없는 정보취합에 독특한 자기 색깔을 보태는 데 그것이 바로 쓰임새에 정당성을 스스로 확인하려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현실에서는 이 방법이 확실히 도발적으로 보이게 된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문승영은 '계획'이 의미하는 온전함에 가장 가까이 가 있는 디자이너가 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무엇을 계획할 때(기획과 혼동하여 사용해서 생기는 오류지만) '계획' 자체가 매우 현실적이어야 한다든지, 객관화된 정보만이 유용하다든지, 목표에 공유성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착각한다. '계획'과 디자인의 개념적 동질성이 있다면 바로 과정과 결과에 대한 주체적 시각이 적극적으로 개입된 가상을 전제로 한다는 점일 것이다.
문승영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가 쉽게 동의할 수 있겠지만, 그의 작업만을 접한 사람들은 왠지 거부감이 생길 수 있는 평가 부분이 그의 작업에 있다. 그것은 바로 디자인이란 말 뜻 안에 있는 '마음먹음'에 대한 견해의 차이 때문이 아닐까 싶다. '마음먹음'이란 결과가 없는 상태, 예측만이 있는 상황에서 어떤 결과(또는 목표)에 이르기까지 전과정을 애둘러 표현하는 말이다. 디자이너의 현실세입에서 위상을 잘 표현하고 있는 이 풀이는 그래서 나에게 있어 디자인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뜻 말이기도 하다. 문승영의 작업(결과)은 우리가 전과정을 애써 이해하는 데 무척 곤혹스럽게 만든다. 그의 '마음먹음'을 쉽게 결과물로서만 가지고는 알아차릴 수 없다는 말이다.
'허공 속에 연기를 보았다 하지 말라'는 불가의 선문에 쓴 소리가 있다. 이 말 뜻을 새겨보자면 문승영의 작업과 그의 면면이 곧 잘 겹쳐지곤 한다. 또한 말이 품은 의미에서 '마음먹음'에 대한 절묘한 해석이 담겨져 있음을 눈치 채기도 할 수 있다. 그의 작업은 간혹 부러 못나게, 일부러 서툴게 보이기까지 한다. 그의 작업은 구성적 측면에서 허술하고 조형적 질서가 뭉그러져 있기 일쑤다. 그의 손 글씨는 서예도 아니고(서예 치곤 골품骨品이 약하다) 타이포그라피라(타이포그라피라 부르기에는 데이터로 정리가 되어 있지 못하는 벽치癖癡의 취흥이 크다) 부르기에도 적합하지 않다. 그의 평면상에서 공간감은 어긋나 있어 깊이가 부족하고 색감은 철저하게 공간을 무시한다. 그의 형태감각은 매우 단조로우며 작은 차이로 인한 긴장감도 없다. 그래서 그가 무슨 '마음먹음'을 가지고 이런 결과들을 만들어 내는지 갈피를 잡기 곤란하다. 그런데 이 모든 합의 가운데 그의 가상의 세계가 온전하게 현실 투사되어 있다는 점이 매우 특이하다. 그가 선호하는 손글씨는 그의 작업 안에서 늘 문승영(디자이너로서 사회인)이 설명할 수 없는(그는 굳이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거나 설명할 공력이 없는 듯 하다.) 빈 자리를 만들어 낸다. 그의 조형세계에서도 발견되는 부분이 바로 빈 곳이다. 사실 '마음'은 이처럼 남이 채워주어야 가득해지는 빈 자리다. 당연히 '마음먹음'='디자인'은 내 밖의 사람들이 자리할 곳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가끔 상업적 상투성에서 이 합리성은 곧 잘 무시되는데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디자인은 수입원을 확실하게 챙겨야만 그 생명력을 유지하게 된다. 반대로 문승영의 작업은 아직 생명력이 꽃을 피워 활짝 열리지는 못했지만, 상대적으로 수입원이 없음으로 인해, 꽃이 활짝 핀 후 열매가 가득하기를 기다릴 수 있다.
디자인을 진리 또는 참으로 인식하는 일은 어렵다. 아니 어불성설로 치부되어도 할 말이 없다. 그것이 오늘, 우리 사회의 디자인 현주소다. 하지만 퇴색된 미술사 책갈피에서 발견하게 되는, 디자인의 눈부신 자취는 한 사회의 정신을 고스란히 담아낸 그릇의 모양이었다. 옛 우리 조상들이 남겨 놓은 옷, 그릇, 그림, 장신구, 가구들을 보면 불교의 가르침, 유교의 합목적성을 고스란히 전도시키고 있다. 그들의 생활에서 맛과 멋을 그대로 반영하고 투사시키고 있다. 서양의 근, 현대 디자인 결과들은 더욱 첨예화된 실상을 짐작하게 한다. 다만 지금, 우리의 디자인은 그 역할에서 매우 단조롭기만 하다. 아마도 '마음먹음'과 '계획'이 지나치게 상투적 상상력 안에 가두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디자인을 가지고 지금, 이렇게, 스스로 물어봐야 한다. 참된 것은 불완전해 보일 수 있다. (그런가?) 그러면서도 온전하게 드러나는 것이 참된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는가?) 따라서 참된 완성은 마치 비어 보이기도 한다. (지나치게 동양사상에 근거하는 취향만을 고집하는 것은 아닌가?) 비어 있음으로 완벽하게 끝마쳐져 있는 것이다.(현실성은 어떻게 담보되는가?)
문승영의 작업을 보면서 삶의 편편을 모아 보는 것 같아 즐거움이 생긴다. 마치 참된 인생이 (바른 길로만 점철되지 않고) 구부러져 있는 것처럼, 참도 앎과 지혜 또한 휘어진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그와 같아 참된 기교는 어리석어 보이는, 말 그대로 기교가 없어 보이는 것이다. 슬기로운 쟁이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것들이 바라는 대로 바라본다. 그리고선 한 옆으로 비켜서 사물이(현실이) 스스로 말하기를 기다린다. 이 어리석음이야말로 우리가 그렇게 목 놓아 울며, 바라는, '계획'되고, '마음먹은', 한 개인의 노고의 결과다. 비로소 우리는 그것을 들어 예술의 모습이라고 겨우 이야기할 수 있다. ■ 이섭
Vol.20050317c | 문승영 개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