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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05_0223_수요일_05:30pm
갤러리 라메르 GALLERY LAMER 서울 종로구 인사동5길 26 (인사동 194번지) 홍익빌딩 1층 Tel. +82.(0)2.730.5454 www.gallerylamer.com
NOTOUCH가 주는 뉘앙스는 참 많다. -개체로서 근접할 수 없는 거리를 만들어 놓는 언어이다. ● 나는 곤충을 싫어한다. 곤충이 내게 특별히 피해를 주었던 적은 없으나 아마도 어릴적 기억이 지금까지 영향을 준 것이 틀림없다. 작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상 이상의 복잡한 형상들이 꿈틀대고 있는것을 발견할 수 있다. 바둥대는 다리와 더듬이... ● 난 내 상상력을 자극하는 그 무언가에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2004년의 작업은 그런 형상들을 상상하여 NOTOUCH란 주제어로 작업을 했다. 그 후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보게 되었다. 곤충들이 나를 보았을때도 마찬가지일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 한껏 이쁘게 치장한 바퀴벌레를 보고 난 "징그러"라고 말한다면, 한껏 치장한 내게 그들은 "니가 더 징그러" 라고 말할지도 모른다는것이다. 아뿔싸! 이 얼마나 나 중심의 시각이었던가. ● 그 후에 모든 생물체들이 새롭게 보였다. 사람 썪은 시체는 무서워 하면서도 길바닥 횟집에 널린 죽은 오징어는 입맛을 다신다. 말 못하는 짐승이라며 동정심을 품고 바라보지만 정작 개(犬)들은 그런 우리를 비웃을지도 모를 일이다. ● 사람이나 짐승이나 꽃이나 별반 다를 것 없는 아니, 그렇다고 하찮다는 것은 아니다. 살아있는 모든것들은 각자의 우주를 지니고 있을터인데 누가 더 크고 작은지 알수는 없는 노릇이고 비교할 가치도 없을것 같다. 헌데, 내가 인간이다보니 같은 종족으로 인간을 보기에 자존심과 이기심과 복잡한 생각들을 똘똘 뭉친 모습들이 마치 새로운 형상의 덩어리로 다시 보여지기도 하는 것이다. 이렇듯 내 일상과 주변에 보여지는것들에 대한 재인식을 그림으로 다시금 재밌게 또는 진지하게 표현해내는것이 내가 작업에 재미를 붙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 오은정
'미물'들의 엄숙한 자기선언 ● way of seeing-보는 방법은 중요하다. 나는 내 주변 사물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한번쯤 진지하게 생각해 볼 때가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나만의 방식에 대해 스스로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결국 나라는 사람에 대한 깊은 성찰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오은정의 작품은 우리들이 세상을 보는 관습화된 방식에 독특한 방식으로 균열을 내고 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일반적인 전시장에서는 볼 수 없었던 풍경이 펼쳐진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벌레들이 날 보고 웃고 있고, 오징어 한 마리가 울고 있기도 하다. 백합인 것 같기는 한데 아름다워야 할 꽃잎이 어쩐 일인지 주르륵 녹아 흘러내리고 있다. 어루만져주고 싶은 귀여운 강아지는 왠일인지 거꾸로 매달려있다. 우리는 작품을 대하는 순간 어색함을 느끼게 되고 생각하게 된다. '이 어색함의 근원은 어디인가' 이 어색함은 우리가 일상속에서 너무나 당연하다고 여기던 사물이 스스로의 존재방식을 거스르기 때문에 발생한다. 작품속에 등장하는 사물은 하나같이 기존에 내가 그들을 인식하던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당황스러움, 어색함, 충격은 관람객을 새로운 인식의 차원으로 인도한다. ● 우선 소재가 새롭다. 전시장에는 이제까지 그림으로 그려지기는커녕 일상생활 속에서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던 사물들이 살아 숨쉬고 있다. 전시장을 들어서면 가장 처음 만나는 사물이 물자라인데, 많은 사람들은 물자라라는 존재에 대해 잘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런 존재가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는데, 그런 존재의 '살아 숨쉬고 있음'을 두 눈으로 확인해야 하다니! 인식의 충격은 여기서 시작된다. ● 현대도시사회에 익숙해진 우리들이 전시장에서 물자라라는 생명체를 바라볼 때 느끼는 신기함, 호기심은 우리가 평소에 접하는 사물이 얼마나 제한되어 있고, 그 사물을 인식하던 방식이 얼마나 고정되어 있었나를 여실히 증명한다. 아쉬운 일이지만 이제 물자라는 우리의 도시문명 생활 속에서 희귀하여 과학백과사전이나 자료용 비디오에서만 접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그렇다면 '존재하지도 않는' 물자라라는 개체를 우리는 왜 바라봐야 하며, 왜 그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 우리는 살면서 나와 다른 개체에 대해 이해해야만 하는 경우가 있다. 나와 다른 존재, 나와 다른 집단은 때로는 그 존재자체가 스트레스가 되기도 하며, 나와는 다른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 스스로를 변화시켜야 하고 지속적으로 나를 재구성하지 않으면 안된다. 변화에의 두려움. 이것은 타집단을 이해해야 할 때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는 하나의 망령과도 같다. ● 우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거나 이해하기 싫은 존재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취하는가. 망각은 가장 깔끔하고 확실한 타자에 대한 폭력이 될 수 있다.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것은 최소한의 관심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는가. 무관심은 가장 효과적인 타자에 대한 폭력이자 가장 끔찍한 처벌방식이다. 우리는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얼마나 많은 개체의 존재를 잊고 사는가? 이 각박한 현대도시사회에서 우리는 과연 얼마나 많은 존재를 망각하고, 또 망각할 것을 강요받고 살아가는가. 내가 보는 세상이 전부일꺼라 믿으며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시각자체가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아집일 수 있는가를 작품은 웅변하고 있다. ● 우리는 누구나 타인에게 하나의 의미있는 존재이고자 한다. 하지만 이러한 타인에 대한 관심과 애정 어린 손길은 망각이라는 강을 건너게 될 때 타인에 대한 철저한 무시, 배제, 억압, 폭력으로 변질된다. 누구도 이러한 폭력의 대상이 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그 누구도 잊혀지기는 싫은 것이다. 잊혀짐은 가장 지독한 형벌이기에.
이제 우리들의 시각의 협소함으로 인하여 평소에 미처 고려되지 못하고 살았던 존재들이 아우성치기 시작한다. 나 여기 있어요! 날 좀 봐주세요! 하지만 작가는 그동안 우리의 시야에서 배제되었던 사물들을 세상속에 부활시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작가는 일상속에서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사물들로 존재하는 개체들을 세상 속에 새롭게 '데뷔'시킨다. 생활 속에서 귀여운 재롱동이에 불과했던 강아지의 포악한 모습과 냉소적인 모습. 그저 먹음직스러운 안주거리에 불과할 것 같은 오징어가 보여주는 심장 밑바닥을 쇳소리나게 긁어대는 듯한 처연한 눈물의 바다. 우아한 포즈의 백합이 보여주는 의외의 음산하고 기괴한 모습. 우리는 사물들이 존재하는 또하나의 방식을 접하고선 불편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다. 왜 물자라가 사람의 얼굴을 달고 웃고 있는가. 강아지의 입을 한 여성은 사람인가 강아지인가. 나와 다른 타자,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한 나의 포용력의 한계는 어디인가? 작가 오은정은 작품을 통해, 타자를 대하는 우리들의 인식의 한계지점을 넘나들고 있다. ● 이 같은 타자에 대한 포용력의 한계를 저울질하는 작가의 의도는 모든 작품에 일괄적으로 새겨져 있는 문구인 NOTOUCH에서 극대화된다. 우선 전시회의 전체주제인 NOTOUCH가 작품속에서 존재하는 양태를 살펴보자. 세상속에 고정된 형태로 갇혀있던 개체들이 널부러지고 낄낄대며 제멋대로 세상속으로 몸부림치는 이때에, 모든 작품의 화면에 적지않은 비중을 차지하면서 일정하게 새겨진 대문자 영문 알파벳이 주는 무게감은 적지 않다. NOTOUCH는 지극히 정제된 '인쇄체'인데 이 문구가 모든 작품에 '복제'되어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복제는 작품의 원본성의 유무를 떠나서 복제품 스스로가 발현하는 새로운 맥락의 장이 갖는 생산성에 주목하는 포스트모던 미술양식의 대표적인 방식이다. 그러니까 NOTOUCH는 모든 작품에 일괄적으로 '새겨져' 있지만 이같은 '새겨짐'은 의례적이거나 수동적인 것이 아니며 각각의 개별작품들 속에서 각기 다른 존재감을 형성하는 다채롭고도 생산적인 의미교환의 장으로 기능하고 있다. 그러니까 거꾸로 매달린 강아지 그림에 새겨진 NOTOUCH와 웃고 있는 물자라 그림에 새겨진 NOTOUCH는 서로 유사한 의미를 공유! 하면서도 각기 다른 개성을 뿜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별 작품은 각자의 독립된 의미와 가치로 존재하지만 동시에 이 모든 작품이 한 공간에 전시됨으로서 모든 작품은 자기만의 빛깔을 냄과 동시에 하나의 의미망으로 수렴되는 효과를 갖는다. ● 또한 NOTOUCH는 우리말로 하면 '건드리지마'이다. 이것은 관람자와 대상간의 거리두기의 필요성을 가장 강력하게 제기하는 문구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건드리지마'를 말하는 자가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사실 우리는 평소에 그들을 건드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들을 건드릴 줄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물자라의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결코 본적이 없으며, 보려고 노력한 적도 없다. 또 알을 낳는 바퀴벌레를 밑에서부터 올려다 본적도 결코 없다. 그러므로 '건드리지마'는 작가를 통해 구현된 개별 사물들의 자기주장이며, 자기 존재에 대한 엄숙한 선언이다. 우리는 이 엄숙한 자기선언의 장에 과연 동참할 것인가? ● '건드리지마'는 결국 역설적이게도 '제발 날 좀 건드려 줘'인 것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건드리지마'가 액면 그대로 정말 가까이 오지 말라는 의도일 뿐이라면 화면 속에 재현된 각종 벌레, 동물, 식물들은 애당초 전시회장에 걸리지 말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전시장에 걸리지 않아도 그 누구도 '왜 물자라를 그리는 작가는 없지?'하고 의아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작가는 역설의 미학을 매우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게다가 명령문이라는 가장 강도 높은 문법을 구현함으로써 사물들의 자기존재에 대한 발언은 한낱 '중얼거림'이 아닌, '선언'의 경지로 격상되는 것이다. 이처럼 '건드리지마'문구는 관객이 즉각적으로 스스로의 경험을 열어젖히고 작품으로 성큼 다가서게 하여 결과적으로 적극적으로 작품에 동참하고 교감하는데 효과적임을 볼 수 있다. ● 입을 어설프게 벌리고 있는 강아지를 아래에서 포착한 작품의 경우, 강아지의 입은 정돈되지 않고 벌어져있고, 콧구멍은 벌렁거리고 있고, 수염은 정신없이 뻗어있다. 그 왠지 모를 '아마추어틱함'에서도 이유를 알 수 없는 당당함, 자존감이 찌를듯 경쾌하게 다가오는 건 '건드리지마'라는 문구가 발휘하는 매우 놀라운 효과이다. 즉 사물은 '스스로의 목소리'로 자기선언을 감행함으로써 더 이상 타자로 대상화되지 않고 꿋꿋한 자기존재를 세상 속에 각인시키는데 성공하고 있다. 그러므로 관객은 기존에 강아지를 바라보던 인습화된 방식을 잠시동안 '건드리지 않고'서, 기존에 스스로가 세상을 바라보던 방식에 잠시 거리를 두고선, 지극히 열린 마음으로 '새로이 탄생한' 강아지를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강아지는 작품을 통해 새로 태어났지만, 관객도 강아지처럼 작품 앞에서 새로 태어나는 측면이 있다. 그러므로 관객은 작품을 통한 우리 모두의 '재탄생'을 축하하며, 새로 태어난 이 강아지의 '당찬' 자기선언에 기꺼이 귀를 기울여 그 당당함을 지지해 줄 수 있게 된다.
작가 오은정은 세상을 바라보는 독특한 자기만의 시각을 보유했을 뿐만 아니라 그 시각을 작품으로 풀어낼 수 있는 자신만의 시각언어를 꾸려가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신선한 충격을 선사하고 있다. 아무리 하찮게 보이는 개체라 할지라도, 사물이 지어내는 다양한 표정과 숨결을 섬세하게 포착하고 소중하게 다듬어서 하나의 예술적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재주는 가히 놀라운 것이다. 이것은 작가 스스로의 세상을 바라보는 무한한 아량과 포용력의 발현이기도 할 것이고, 무엇보다도 작가가 세상에 대한 애정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닌가 한다. 이것은 작가도 이야기하듯 결국 자신과의 싸움이기도 하고 오은정이라는 작가가 세상 속에 우뚝 서는 또 하나의 존재방식이기도 할 것이다. ● 우리는 앞으로도 '존재하는',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모든 것에 다양한 이름과 목소리를 부여하는 작가 오은정의 예술세계에 기꺼이 동참할 수 있으리라 본다. 그것은 이번 전시와 같은 '선언'의 형태일 수도 있지만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전시장을 방문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을 작품과 관객과의 끈끈한 교감은 결국 이 신진작가의 작가로서의 역량이 단지 개인적인 넋두리가 아닌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번 첫 개인전은 매우 값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 작가 오은정이 펼쳐 보여준 세상은 '또 하나'의 세상일 뿐 그것이 세상의 전부는 아닐 터이다. 작가는 이번 개인전을 계기로 하나의, 그리고 또 하나의 세상들이 구현하는 다채로운 삶과 호흡의 결들을 헤아리는 긴 여정의 출발점에 서있지 않은가 한다. ■ 정필주
Vol.20050228a | 오은정展 / OHEUNJUNG / 吳恩定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