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oom

이익재 사진展   2005_0221 ▶ 2005_0304

이익재_The Room-홈키파_디지털 프린트_50×60cm_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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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의 대화_2005_0225_금요일_03:00pm

숙명여자대학교 문신미술관 빛 갤러리 서울 용산구 효창원길 52 Tel. 02_710_9280 / 02_2077_7052 www.moonshin.or.kr

사진의 변화와 새로운 내러티브의 가능성 ● 이익재의 사진은 의식적 표현이나 개념적으로 세련된 예술적 표현을 미학적으로 능숙하게 범주화 시켜 제시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저명한 사진가들의 작품에서 보이는 미학적 순간들 혹은 예술적 해석의 은밀한 의미연관의 차원을 제시하지 않고 우리 삶의 일상적 풍경과 사건들이 가지고 있는 시점을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에, 이미지로 드러나는 표상들은 의식이 존재를 깨닫는 순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삶을 하나의 객관적 대상으로 느끼도록 만들어 준다. 그러나 그런 일반화된 삶의 요소들을 사진 이미지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사진은 그 자체로 객관화 되고 사진 속의 인물들은 이미지로 대상화됨으로써 인물사진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상황에 대한 언급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즉 객관성을 이야기 하지만 그 객관성은 사진이라는 물리적 범주 안에서 주체와 대상간의 통일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하여 이미지들은 오히려 파편적으로 개성화됨으로써 우리가 현실을 느끼는 방식에 대해 숙고하게(pondering) 만드는 것이다. ● 그러나 사진은 현실을 포착하지만 사진 속에 포착된 이미지들은 본질적으로 많은 부분 환영주의(Illusionism)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는 사진가들이 환영의 속성에 대해 연구한다거나 아니면 환영적인 요소들을 자기 사진 작업의 기반으로서 도입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진이 발명된 이후 사진이 어느 정도 회화의 역할을 대신해 왔기 때문이다. 즉 사실주의적인 회화의 많은 특성들이 사진으로 전이되었고 회화는 다른 차원의 예술로 변화되어 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술사진이라 불리는 수많은 이미지들로부터 19세기 이전의 회화들에서 느낄 수 있는 묘한 향수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익재의 사진에서는 회화적 구도에서 낯설지 않게 볼 수 있는 비범함을 지닌 고전적인 혹은 모더니즘적인 사진의 특성들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작품들에서는 그의 주변의 동료들 모습이 그들의 일상적 삶의 공간과 함께 포착되어 있다. 사진 속의 주인공들은 그들 삶의 퇴적층 속에서 막 기어 나와 그들의 일상적 활동의 공간으로 복귀한 듯이 보인다. 이런 이미지들은 일상의 기록으로 이해될 수 있는 단서들을 가지고 있다. ● 사진이 기록적인 특성에서 전혀 벗어날 수 없는 매체라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우리는 사진의 한 대표적 장르로서의 기록사진에서 증거로서 기능하는 인물과 풍경들을 볼 수 있는데, 이런 사실적인 이미지들은 사진이 가지고 있는 본래적인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미지들은 어떤 특정한 주제를 가지고 관객들에게 이미지의 정당성을 설득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만일 가난을 주제로 사진을 찍는다면 우리는 사회적 특권과 혜택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인물들이 그들 삶의 지난한 순간들을 느끼는 특정한 순간들을 포착하는 것으로 주제를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고, 반대로 풍요를 주제로 사진을 찍는다면 사회적 특권과 혜택을 마음껏 향유하는 인물들이 무엇인가로 인해 기뻐하고 있는 순간들을 포착하는 것으로 목표를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예로 들어 이야기 한 것은 극단적인 경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우리 삶은 가난하지만 가난하지 않고 풍요롭기도 하지만 그 속에서 다양한 고통을 느끼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미지는 기록적인 특성이 두드러지기도 하지만 또한 언어와는 달리 복합적인 삶의 상황들을 비정의적이면서도 직관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탁월한 예술적 수단인 것이다.

이익재_The Room-슬리퍼_디지털 프린트_100×140cm_2004
이익재_The Room-전기장판_디지털 프린트_100×140cm_2004
이익재_The Room-침대위에 라이타_디지털 프린트_50×60cm_2004

인물사진은 보편적으로 인물의 특성을 가장 잘 반영할 수 있는 순간들을 포착한다. 그러나 인물이 하나의 풍경으로서 그리고 풍경과 대등한 차원에서 포착되는 경우 아무리 클로즈업을 통해 인물을 포착한다고 해도 사진 속의 인물들은 풍경의 차원으로 평면화 되어버린다. 평면성은 모더니즘 회화의 두드러진 특성이기도 하다. 즉 작가가 사건을 개념적으로 받아들여 자신의 회화적 언어로 해석하는 과정에서 일반적인 사진 이미지가 가지고 있는 형상적인 솔직함을 배제하고 주관적인 톤으로 변형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의미로부터 증거를 배제하는 그런 것이라기보다는 증거를 가지고 의미의 세계를 추상하는 작업이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인물사진들에서는 인물들의 개성을 드러내는데 방해받지 않기 위해 배경의 요소들을 최대한 생략하거나 배경적인 요소들이 많지 않은 그런 장소와 순간을 선택한다. 그러나 이익재의 이미지들에서는 배경이 배제되어 있지 않다. 그런 면에서 이익재의 이번 작품들은 초상화 같은 종류의 사진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게 된다. 이것은 그의 작품의 제목과 이미지의 관계에서 보아도 암시되는 것이다. 자신의 친구이거나 주변사람들인 젊은 남성과 여성들의 사진에서 사진의 제목은 그들의 이름이 아닌 사진 속 공간에 존재하는 인물이 아끼거나(?) 아니면 그들 인물들이 소유하고 있는 일상의 기물들 - 이런 사물들은 삶의 특수성과 연관되어 있을 뿐 자본주의적인 시각에서 볼 때 그 가치를 평가하기는 힘든 것들이다 - 의 이름이 제목으로 되어있다. 그 물체들은 인물들 개인의 인성을 특별하게 반영한다거나 하는 상상을 하기 힘든 것들이다. 그것들은 너무 사소하기 때문에 그냥 일상의 물품들 이상의 의미를 가지기는 힘든 것들이다. 여기서 사진의 공간과 인물과 제목의 관계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이미지들이 이미 포스트모더니즘의 차원을 넘어 한국적 현실에서 21세기에 이야기 될 수 있는 인터넷 세대의 새로운 집단적인 감성과 단절적인 풍경들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모더니즘 예술의 특징이 정형화된 계급적 질서를 반영하는 단서들을 이미지를 통해 보여주는 경우가 많았다면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그런 정형성을 개인의 감성적 차원을 통해 투영된 모습으로 보여주는 경우일 것이다. 이런 이미지들 속에서 우리는 우리 시대의 감성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익재의 이미지들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성들이 한국적인 현실의 순간들과 다분히 얽혀 있을 뿐 아니라 이미 다른 어떤 것을 이야기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사진의 공간은 현실의 공간이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발견할 수 없는 공간의 순간들을 포착하는 것이다. 독일의 예술이론가 벤야민은 사진을 통해 우리가 시각적 무의식의 세계를 발견할 수 있었다는 말을 한다. 이것을 다른 각도에서 해석한다면 공간이 살아있다는 것과 그 살아있는 공간의 미묘한 부분들을 사진을 통해 재현(representation)한다는 관점을 이야기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다른 관점은 어떤 질서를 창조하고자 하는 모더니즘과 그런 질서의 창조에 아예 관심조차 없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범주에서 이야기 되는 예술에 대한 언급들을 다루는 것과는 다른 방식이다. ● 20세기 후반 이후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예술작품들에서 작품의 맥락 속으로 사물을 도입하는 방식은 사소한 것들을 그동안 중요하게 취급되어 왔던 곳의 자리에 놓고 다른 방식으로 의미의 컨텍스트를 바라보는 것이다. 위치를 바꾸어 놓음으로서 생경함을 창조하고, 생경함 속에서 주관적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문화적이고 시대적인 감성들이 드러나게 된다. 이것이 20세기 후반의 공간을 해석하는 방식이 된다. 그런 공간속에 거주하는 인물들은 개인적으로 두드러지는 특성을 보여주거나 주제의 특성을 적절하게 반영하는 그런 구도 속에 있지 않다. 인물 역시 풍경의 특성 안에서 소화될 뿐이다. 예를 들면 사진을 가지고 예술작업을 하고 있는(사진가라고 하기에는 작품이 지시하는 의미의 범주가 다르기 때문에) 미국의 작가 신디 셔먼(Cindy Sherman)은 자신이 스스로 분장을 하고 미국인들의 가슴 속에 들어있는 유명한 영화의 장면들을 재현한다. 여기서 신디 셔먼 자신이나 혹은 영화 속 인물의 인간적인 특성은 배제되고 영화가 가지고 있는 명성의 아우라가 작품의 주제가 되고 작가 자신은 그런 스펙타클 속에서 적응해 가는 다양한 정체성을 지닌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곧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언급하는 스펙타클의 의미와 관련이 된다. ● 스펙타클은 보여주기 위해 만드는 일종의 시각적 장치(vehicle)이다. 이런 장치들의 특성은 삶의 본질이나 예술의 의미를 천착하는 미학적인 개념의 특수성을 배제하고 자본주의의 대중적인 전략의 차원에서의 화려함 자체를 만들어냄으로써 구조가 아니라 사회적 분위기에서 투영되는 표면적인 특성들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 적인 환영을 창조하게 되어 결과적으로는 생산성과는 관련이 없는 우울함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이런 면에서 현실의 부정적인 측면들이 부각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익재의 작품 제목은 작품이 가지고 있는 광범위한 의미의 구성 가능성을 거세시키고 또한 사회적인 보편성을 포기하는 그런 방식으로 의미의 전체적인 맥락을 구성하는 것을 거부한다. 의미의 생산이 가능한 맥락을 거부하고 작가의 개인적인 차원의 주관적 제시(presentation)가 이미지를 해석하는 열쇠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방식의 접근을 표상하는 이미지들에서 우리는 의미를 발견한다거나 의미를 부여하는 고전적인 미학적 사색을 포기해야만 한다. ● 그러나 위에서 설명한 공간, 인물, 제목의 관계를 통해 가능한 의미의 구조적 생산 가능성에 대한 포기가 21세기 예술의 방향에 대한 언급으로 적절한 것이라면, 이런 언급들은 적극적으로 이익재의 사진들에도 적용시킬 수 있겠지만, 미묘한 차원에서 그의 이미지들이 가지는 특수성들을 이야기 해야만 한다. 이는 이익재의 작품에 스펙타클이 지배하는 사회의 결과적인 결함들이 보여 지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작품의 제목들은 이런 결함들에 대한 언급조차 거부하는 듯이 보이고, 파편적인 의미, 그리고 의미나 아니면 다른 특성들에 서로 연결되지 않는 생산성들이 일상의 상투성을 정당화 시켜주는 아우라가 되어 버린다. 여기서 우리는 현실에 대한 감각적 체험의 가능성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의 이미지들은 어떤 구도를 지향하거나 구조를 수립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멀리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범주 자체를 규정지울 수 없다. 이것은 모더니즘의 규범적인 세계관에서 상상할 수 있는 삶의 일관성으로 해석될 수 없는 것들이고 또한 포스트모더니즘이 이야기하는 세계와도 다르다. 게다가 그의 사진 이미지들은 기억에 대한 심리적인 요구도 제시하지 않는다. 관객은 이런 이미지들 속에서 젊은 시절의 한 순간을 기억할 수도 있겠지만 이와 같은 기억은 단지 특수한 상황으로 끝날 뿐이다. 즉 이미지가 언급하는 범위 자체가 일반화 될 수 있는 기억의 포스트들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그의 이미지들은 질서의 붕괴나 무관심 혹은 창조 같은 그런 측면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익재_The Room-백설공주_디지털 프린트_50×60cm_2004
이익재_The Room-모빌_디지털 프린트_50×60cm_2003

이익재가 제시하는 이미지들은 젊은 시절 혹은 현재 젊은이들의 일상의 초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앞에서도 암시했듯이 그의 작품은 그런 수식어를 통해 설명되지 않는 상황들의 현상일 뿐이다. 즉 공간, 시간, 인물, 제목 등의 것들이 모두 단편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진 이미지들의 단편적인 특성들은 서로 아무런 연관성 없이 어느 한 순간에 충실한 것들일 뿐이다. 이런 단편적 특성들은 작품 전시의 제목인 방 The Room 을 통해 물리적인 통일성을 얻을 뿐이다. 다시 말해 이미지들의 물리적인 통일성은 상황의 연관성 속에서 연결시킬 수 있을 뿐이다. 상황적인 통일성은 위치의 변동에 의해 이미지들이 하나하나 독립적으로 존재하게 되면 사라져 버리는 그런 통일성으로 영속성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들이다. 그러므로 이익재의 사진이미지들에서는 사회적으로 결정될 수 있는 계급적인 특성 혹은 개별적 작품들 간의 개념적인 연관성에 대한 것들 보다는 이미지가 스스로 가지고 있는 독립적인 진화의 상황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들로 관객은 사진 이미지들과 어떤 특정한 관계를 맺지 않고 자유롭게 이미지 앞에서 부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에서는 기억을 기반으로 한 현재와 과거의 심리적인 연속성은 특별하게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방 시리즈에서 개인은 특수한 상황적 속성을 지닌 개인들이다. 물론 일상적인 공간에서 포착된 일상적 인물들의 이미지는 초상사진들이 가지고 있는 인물의 특수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더욱이 작품의 제목들은 그런 특수성을 적극적으로 외면하고 있다. 물론 이것을 시대를 깊이 통찰하려고 한다기보다는 언어적인 말장난(pun)처럼 표면적인 기호들을 그 자체로 즐거움의 대상으로 외화의 상태로 지속시키려는 의도로 해석될 가능성이 크기도 하지만 - 물론 이것은 이익재의 앞으로의 작품들 이미지와 이미지가 생산하는 방향성의 문제와 긴밀히 연결될 것이다 - 그런 것들은 이익재의 이미지들에서 발견되는 또 다른 특성들에 의해 불식될 수 있을 것이다. 이익재는 소위 이런 이미지들을 통해 사진의 변형(metamorphose)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변형의 기반에는 물신주의(fetishism)적인 시각이 내재하고 있다. 이것은 작가의 의도일 수도 있고 작가의 시각에 내재되어 있는 시대적인 분위기일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제목들은 그런 물신주의적인 성격을 발견할 수 있는 단서들을 보여준다. 거대한 개념이나 물질의 소유에 대한 욕망이 거세된 상황에서 젊은이들은 그들만의 비밀스런 소유의 코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물신적 대상들은 그들이 사회에서 끊임없이 목격한 것들의 환상들이 내면화되어 욕망의 시선으로 투영되어 있는 것들일 뿐이다. 일반적으로 이런 물신주의적으로 변형되어 드러나는 욕망에는 성적인 시선과 소유의 욕망이 함께 교차되어 드러난다. 그러나 이익재의 작품을 내밀한 욕망의 내러티브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그런 욕망의 시선들이 적극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일상의 사물들에 숨겨져 있다. ● 이익재의 이미지들에서 일상의 사물들은 사진 속 인물들의 속성을 대변하는 것도 아니고 사진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강화 시키는 것도 아니다. 즉 의미는 속성을 강화시키는 작용을 하지 않고, 사물들은 의미를 만들어내지도 않는다. 개인의 사회 혹은 삶의 체계에 대한 저항을 보여주지도 않고, 추상화된 개념의 특수한 지평을 열어 보이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21세기 예술의 특성에 관해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익재_The Room-곰돌이가방_디지털 프린트_100×140cm_2004
이익재_The Room-섹시한 입술_디지털 프린트_50×60cm_2004

우리는 예술의 본질적인 기능중의 한가지로 해방적 기능을 이야기 한다. 역사적인 성격을 획득하면서 고착된 기존의 사회적인 질서로부터 개인의 해방을 이야기 할 수 있고, 개인의 특수한 억압적인 심리적 상태로부터 치유적인 차원의 해방이 있을 수 있고, 삶의 보편성에 의해 끊임없이 요구되는 통일적인 질서를 교란시키는 해방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이익재의 사진 이미지들은 위에서 이야기한 것들과 관련되어 해방적 성격을 획득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그에게 아니면 그의 동료들에게서 삶의 고유성(authenticity)의 정의(definition)가 변형되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속성을 지닌 해방은 30대 이하의 젊은 사람들의 시각에서는 자연스러운 나름대로의 질서를 가지고 있는 것들이다. 예를 들면 머리 모양이나 색깔의 변화 같은 외면적인 것들 이외에도 우리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삶에 대한 다른 시각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물신주의적인 특성들, 특히 기존의 사회제도의 측면에서 바라보고 평가하는 물신주의의 특성들에서 삶의 일탈을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사진 속 인물들과 상황은 일탈적인 특성들을 공유하고 있다. 이 일탈은 삶의 중심으로부터 빗겨 나와 삶의 표면적인 유희의 차원에서 부유하고 있고 또한 이런 속성들을 통해 그들은 삶의 주변에 거주하는 존재가 되어버리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과 끝이 논리적인 모양을 갖추어야 만족해하는 모더니즘적인 세계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평가일 뿐이다. 여기서 해방은 단순히 물리적인 억압의 사슬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자아를 깨닫는 - 깨달음의 질적인 차원을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다 - 그리고 자신의 깨달음 속에서 자아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과정 - 어떤 면에서 정체성의 확립과 관련될 것이다 - 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차원에서는 단지 그들이 충족시키고자 하는 욕망이 사회적인 관계 속에 존재할 수 있는가 아닌가의 문제만이 남을 뿐이다. ● 그러므로 이익재의 방 시리즈 작품에서 우리시대 20대 젊은이들의 생각과 삶의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미지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떤 특정한 공간과 시간 속에서 발견되는 삶의 유형들에 관한 보고서가 아닌 마음으로 느끼는 이질감과 동질감 같은 것이 될 것이다. 이런 면에서 방 시리즈 작품들은 예술을 통해 개인의 삶과 일상을 억압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일상을 내세워 삶의 본질을 간과하는 그런 것으로 이야기 될 수도 없는 것이다. 이익재 인간을 바라보는 혹은 삶의 특정한 한 순간을 바라보는 다른 시각을 충실하게 제시하고 있고, 이것은 존재론적(ontological) 혹은 사유존재론적(onto-epistemological) 범주의 변화라는 시대적 조건들에 의해 요구되는 새로운 사진적 내러티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정용도

Vol.20050222a | 이익재 사진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