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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0216_수요일_06:00pm
갤러리 라메르 서울 종로구 인사동 194 홍익빌딩 Tel. 02_730_5454
배의 기원은 BC 5000년경 이집트의 나일강으로 거슬러 올라 갈 수 있다. 지식의 발달과 함께 배는 발달하며, 늘 우리와 함께 했다. 1492년 콜롬버스는 '산타마리아' 호를 타고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 신대륙의 발견은 나아가 지동설의 입증이자. 지구의 둥글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는 중요한 일이기도 하다. 신대륙... 이렇듯 배의 항해는 또 다른 세계를 찾아 나서는 모험이자, 세계의 진실을 찾아 나서는 것이었다. 그러나 21세기의 한국에는 배가 산으로 올라가 있다. 그럴듯한 분위기를 찾아 안주하여 정박하고 있다. 더 이상의 항해는, 모험은 없다. 마치 유토피아를 찾은 듯 산 혹은 한적한 시골, 강가에 한적하게 안주하여 있다. 모험을 찾아 혹은 보물을 찾아 떠나기 위해 펼쳤던 지도는 이제 의미가 없다. 대신 우리가 이정표를 보고 배를 찾아간다. 작고 소박한 행복이 거기 있는 듯 하여. 자본주의의 궤적을 따른 문명화와 발전은 원래의 용도를 변형시킨다. 아주 이질적으로.. 하지만 이런 이질적 공간은 우리에게 가벼운 유토피아를 제공하는 듯 보여 진다. 이렇듯 문명 혹은 자본의 논리는 원래의 것과는 아주 다른 어떤 것으로 만들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이질적인 문명에 아주 쉽게 길들여 지고 있다. 환상은 우리들의 생존본능이기도 하다. 환상이 거짓임을 알 때 우리는 또 다른 환상을 찾아 갈 것이다. ● '산타마리아'호와 함께 작은 유토피아를 꿈꾸며.. ■ 전은선
산으로 간 배들 ● 어느 날 우연히 산타마리아 호를 보았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기 위해 타고 떠난 그 산타마리라 호를 꼭 빼닮은 가짜 배를 경춘가로를 달리다가 본 것이다. 하긴 그와 유사한 배를 도시 한복판 혹은 여기저기에서 본적이 있다. 타이타닉 호나 커티샥 같은 배들 말이다. 전은선은 바로 그런 배들을 낯설고 의아하게 바라보면서 찍었다. 원거리와 근거리에서 배들은 다양하게 포착되었다. 멀리서 보면 진짜처럼 그렇게 정박해 있어서 갑자기 주변 풍경이 환상적으로 다가온다. 시공을 초월한 어떤 순간이 환각처럼 안기는 것이다. 있어야 할 곳이 아닌 곳에 덩그러니 배가 있는 이 풍경은 더없이 초현실적이다. 왜 저 배들은 바다나 물가가 아닌 대지에 정박하고 있는 것일까? 노아의 방주 마냥 40일간을 헤매고 떠다니다 드디어 비가 그쳐 산중턱에 앉아버린 걸까? 작가는 그런 의문의 꼬리를 감추지 못한다. 어느 순간 우리들의 공간 곳곳에 이국적이면서 낭만적이고 화려하면서도 어딘지 이질감을 던져주는 건축물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놀이공원, 레스토랑과 웨딩 홀, 모텔의 외관 등이 그 대표적인 장치들이다. 이들 공간은 실용성과 현대성이 아닌 한결같이 복고와 환상, 낭만과 이국취향이 추구되고 있다. 그리고 '서양적인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강박아래 인테리어와 외장이 이루어진다. 특히 서양적인 것 중에서도 현대보다는 과거의 것, 가능하면 중세 서양건물의 어떤 요소들이 모방된다는 점도 공통된다. 다시 말해 신분계급의 차별이 뚜렷한 시대의 이미지가 추구되는 것이다. 음식점이나 모텔, 예식장의 외양에서 사회 계급적으로 지향되는 것이 다름 아닌 중세서구의 상류층 계급, 귀족과 왕족의 표식이다. 그 표식의 가장 단적인 예는 귀족이나 왕족들이 살던 중세의 성이다. 유년시절에 읽었던 동화에 등장하는 궁전, 왕자와 공주, 무도회의 이미지가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현대 서울의 전문예식장, 놀이공원, 음식점, 모텔, 사우나 또는 전국 대부분의 유원지 주변에 세워진 건물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해석에 따라 중세 서양 귀족들의 성에서 따왔다고 생각되거나, 그것을 상상해 가져다 붙인 장식적 요소들로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다. 서양귀족들의 성이나 범선 등을 현대 한국의 도시 한복판에다 그대로 짓는 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 결과 건물의 외벽과 내부의 천정 및 바닥, 기둥 등에 서양의 성채를 상상하게 만드는 모호하고 아리송한 장식적 요소들을 대충 갖다 붙이게 되며 국적 불명의 외양을 갖춘 정체를 알 수 없는 건물형태가 일종의 규칙이 되었고 이를 모방한 건물들이 전국적으로 우후죽순 세워지고 있다. 수많은 외래 문화적 요소들이 디시 한국 현대의 도시 맥락 속에서 뒤섞이고 쪼개 붙여져 새로운 의례공간과 형식을 낳은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이 같은 문화적 원전과 규칙은 보이지 않는 강제로 작용하지만 사람들은 실제로 그것이 어떤 원전에 의해 자신들이 움직이는지 잘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우리의 도시 공간, 공간은 국적 불명의 문화적 혼합물을 동원해 가상현실을 제조하는 공간, 마법의 성, 이국적 배로 자리 잡았다. 그곳에서 어설프고도 모호한 환상을 담은 낭만과 꿈이 날마다 생산되고 있다.
전은선은 그렇게 만들어진 다양한 배들을 찾아 다녔다. 어느 날 우연히 눈에 들어온 배를 찾아 전국을 다니다보니 이외로 그 배들은 남한 전역에 산재해 있었다. 한결같이 지표에 붙어있는 배들은 뱃머리를 먼 물가 쪽으로 갖다대거나 산이나 들에 정박해있다. 21세기 한국에는 배가 산으로 올라가 앉아있다. 기이하고 어색하고 희한한 풍경이다. 그런가하면 도심 한 복판에, 주택가에도 커다란 범선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 배들에게 더 이상의 항해, 모험은 없고 다만 배를 흉내 낸 인테리어로 위장되어 있을 뿐이다. 경춘가도를 달리다 만나는 산타마리아 호란 레스토랑의 외관은 500년 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할 당시의 기선인 산타마리아 호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착각을 받는다. 보는 이들은 정교하고 웅장한 그 외관에 우선적으로 압도당한다. " 이곳을 찾는 사람들 대개가 배에 몸을 맡기면 정말 잘 왔다는 만족감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항해를 하게 된다"(선전문구) 중세 범선의 웅장함 속에서 안온하게 연인끼리, 가족끼리 모여 생일이나 결혼기념일, 데이트 장소로 이용하는 이 곳은 라이브 음악이 깔린 레스토랑이다. 축하연과 피로연이 벌어지고 북한강과 동해바다를 한 눈에 바라보는 조망이 충족되어있다. 이곳은 먹고 마시는 장소가 아니라 문화를 아우르는 이른바 문화공간이 되었다. 그러니까 자본주의의 궤적을 따른 문명화와 발전은 배의 원래의 용도를 변형시킨 셈이다. 이제 사람들은 밥이나 술을 먹기 위해서 이왕이면 시각적인 공간연출, 특정한 상황으로 꾸며진 가상공간에 가고 싶어 한다. 가짜이고 모조이며 환영에 불과할지언정 잠시나마 그 공간에서 낭만에 잠기고자 한다. 이 욕망은 현실로부터의 부단한 이탈과 가짜가 실체를 끊임없이 대체하는 동시대 문화의 전형적인 특징에 다름 아니다. 이 같은 이질적 공간은 우리에게 가벼운 유토피아를 제공한다. 그리고 이런 이질적 문명에 우리는 아주 쉽게 길들여져 가고 있다. ● 배의 기원은 B. C 5000년경 이집트의 나일 강에서 최초로 발명되었다고 한다. 알다시피 문명은 강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수상 운송의 역사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후 1492년 콜럼버스는 '산타마리아'호를 타고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 이제 배의 항해는 또 다른 세계를 찾아 나서는 모험이며 세계의 진실을 찾아 나서는 것이 되었다. 그러니까 15, 16세기 들어 유럽 각국의 힘의 식민지 쟁탈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면서 선박의 중요성이 새삼 강조된 것이다. 지리탐험대라고 불리는 이 시대에 배는 필수적인 운송수단, 무기가 되었다. 그 배로 제국주의의 역사를 써나갔다. 당시의 대표적인 선박은 3개의 마스트를 갖추고 대양을 종횡무진 하던 캐랙선이었다. 15세기 후반기에 들어와 범선을 크게 혁신시키는 결과를 몰고 온 변화가 일어났는데 바로 같은 돛대에 여러 장의 가로 돛을 층층이 다는 방식이 그것이다. 그 과정에서 다음 4백년 동안 바다를 지배하게 되는 배, 곧 세 개의 돛대에 여러 장의 돛을 층층이 단 전장범선이 등장했다. 콜럼버스의 산타마리아 호가 바로 그 5장의 돛으로 이루어진 쾌속 범선이었다. 그 배들은 신항로 개척의 역사를 만들어갔으며 서구제국주의의 영토를 확장시켜나갔다. 그런데 그 배가 왜 지금 남한 땅에서 고스란히 재현되어 산 속에, 물가 근처나 도로변에 세워져야 할까?
공간은 비어있는 장소가 아니라 무언가로 끊임없이 채워지는 장소다. 또한 시간과 문화가 서식한다. 현재 우리의 공간은 여러 모습의 다차원적인 문화와 욕망, 서구문화의 유입과 소비의 욕망으로 채워지고 만들어져가고 있다. 그렇게 공간은 새롭게 증식되고 변종을 산포하며 새로운 지형을 그려내고 있다. 우리의 공간을 들여다보면 거기 숨길 수 없는 우리 사회의 초상이 서늘하게 투영된다. 그래서인지 그 공간에 주목하는 작업들을 최근 자주 접한다. 자신이 살고 있는 현재의 이미지에 대한 일차적 관심일 것이며 자기 삶을 규정하고 추동하며 굴절시키는 장치에 대한 주목일 것이다. 도시 공간, 나아가 삶의 공간이 인간과 인공물들의 단순한 집합체가 아니라 문화적 실천, 의식, 행동들이 수직적, 수평적으로 구조화된 텍스트로 간주되는 것이다. 기호학적으로 '도시 공간 텍스트 읽기'라는 일련의 해석 방식을 취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날 공간은 작가들에게 거대한 텍스트가 되었고 그 텍스트의 행간을 읽으려는 부지런한 눈들에 의해 분해되고 수집되고 배열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물질과 허상과 기호로 가득 채워진 공간에서 산다. 결코 진공상태에서 살지 않는다. 주지하다시피 현대의 공간은 소비의 목적을 위해 실재가 아닌 여러 코드가 작용하여 모방 혹은 유사 이미지를 만들고 채워간다. 욕망을 자극시키는 유혹의 시각적 이미지와 물질체, 그것을 복제시킨 인공의 이미지는 사물과 현실 그리고 실재를 오히려 유사화 시키고 모방화 시켜 환상과 환영을 유발하며 따라서 현실의 공간은 인공의 이미지로 재현되고 대체된다. 이미 이런 인식은 상식이 되었다. 결국 오늘 날 한국의 공간은 소비 공간의 욕망으로 장식되고 그 안에서 사물들의 의미 또한 부단히 변질되어 가고 있다. 그런데 이 상품의 소비영역에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대립도 공간에 깊숙이 각인 된다. 이러한 개인적 욕구에 대한 자극과정의 귀결은 바로 사물 자체에 가치가 부여되고 문화, 예술, 여가 등에 사물로서의 가치가 부여되는 물신 숭배적 논리, 즉 소비의 이데올로기의 강화로 드러난다. 이제 사물의 가치는 공간과 공간 속의 인간 기호에 의해 결정되며 나아가 공간 속에서 강제된 차이의 질서, 즉 차별화의 기능이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도시 공간에서 소비의 본질은 공간 속에서 하나의 차이와 위계를 생산해내는 계급적 제도에 다름 아니다. 간추려 말한다면 도시 공간 속에서 제품들은 그 자체로서는 의미를 갖고 있지 않는다. 그것들의 집합적 배치와 전체적인 모습, 이 사물들 간의 서로간의 관계, 그리고 그것들이 인간과 엮어내는 기능에 따라 의미를 갖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제 소비는 계급적 차이의 구분에 따른 차별화 속에서 디자인된다. 예를 들어 음식을 먹는 것 역시 건강과 미각이 체험되는 공간, 미학적 차원에서의 식 공간( 테이블 세팅, 푸드 스타일링, 식공간의 분위기 등), 인테리어와 건물의 외양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른바 푸드 데코레이션의 영역은 바로 미학적 차원에서 식 공간의 총체적 데코레이션을 연출한다. 이는 장소와 공간연출, 인테리어, 배의 형태를 지닌 레스토랑으로 나간다. 전은선이 찍은 배의 외양을 빌은 음식점건물은 동시대 한국 사회의 공간연출과 소비욕망 등등의 여러 의미 망으로 촘촘히 직조되어 있는 복합적인 텍스트다. 작가는 그 텍스트를 읽어나가면서 한국 사회의 여러 공간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배가 산으로 간 까닭은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만큼이나 어려운 문제다. ■ 박영택
Vol.20050216a | 전은선 사진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