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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0215_화요일_05:00pm
관람시간 / 평일_10:00am~06:30pm / 일요일_10:00am~05:30pm
금산갤러리 서울 종로구 소격동 66번지 Tel. 02_735_6317 www.keumsan.org
세계의 중심인 나무 ● 이창분은 적막한 배경을 바탕으로 지닌 화면 중앙에 단촐하게 자리한 한 그루의 나무를 그려 넣었다. 가늘고 긴 가지들이 허공을 향해 솟아오른 나목이다. 상대적으로 광활해 보이는 배경은 새벽녘이나 황혼, 해거름의 시간대를 연상시키면서 나무의 존재를 특정한 상황성, 서정성 짙은 문학적 정취로 감싸준다. 황토색이나 올리브그린색조를 머금은 두터운 질감으로 뒤덮인 화면은 하늘/대지가 뒤섞인 공간, 환경을 보여주는 한편 더러 화면 하단에 약간의 색 층을 두어 산의 윤곽 혹은 대지의 육체성을 희미하게 부감 시키는 것도 있다. 두툼한 볼륨과 체적을 지닌 화면 자체가 대지가 되고 물리적인 기반이 되어 촉각성과 질료성을 두드러지게 드러내는 편이다. 따라서 하나의 그림은 자족적이며 그 자체로 완결된 세계의 풍경으로 자립하는 느낌이다. ● 높고 넓은 하늘, 공간에 위치한 이 작은 나무는 자기 스스로 나무가 되어 대지에 직립하고 있다. 태양과 흙, 물로 이루어진 나무는 생과 사를 거듭 반복하며 변함없는 진리를 인간에게 가시화 하는 시각적 존재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늘 나무를 바라보고 나무 밑에서 자기 생을 조용히 마감하는 한편 그 나무 밑에 묻혀 즙이 되어 다시 나무로 살아나기를 원했었다. 이창분은 나무 한 그루를 바라보며 그 존재에 대한 깊은 사유를 압축한 하나의 결정적인 이미지를 원했다. 그것이 이 나무그림이다. 작업실 창가로 보이는 산과 나무, 잎사귀와 줄기를 바라보면서 새삼 자연계와 생명체, 시간과 죽음 등에 대한 생각의 무게를 의식하고 있는 마음의 반영인 셈이다. ● 땅에 뿌리를 박고 스스로 광합성을 하며 자존하는, 자립하는 식물의 삶, 나무의 생애는 더러 눈물겨운 부분이 있다. 자연계에 존재하면서 인간의 눈에 위안이 되어 다가오는 하나의 표식이자 이정표로, 숨을 고르는 풍경으로, 자연의 이치를 전해주는 견고한 책 같은 나무는 동물성의 인간이 도달하기 어려운, 결코 가늠할 수 없는 희생적인, 스스로 충만한 생애를 선명하게 윤곽 지으며 살고 있다. 나무의 나이테는 그런 시간의 엄정함을 내부로 응결시킨 상처들이며 그 외부는 안으로부터 밖으로 터져 나가는 생명을 보호하는 모든 이타성의 결정으로 완강하다. 그것은 또한 대지에 저당 잡혀 사는 인간들에게 천상으로 가는, 하늘을 올려보게 하는 매개이기도 하다. 오래 전부터 나무의 존재가 신령과 종교성을 지니게 된 이유는 그것이 대지와 천상(영원) 을 연결하고 있는 구조 때문일 것이다. ● 우리 조상들 역시 나무를 삶의 근원으로 여겨왔다. 나무는 땅에서 음기를 빨아들이고 하늘에서는 양기를 빨아들이며 사는 존재다. 나무를 통해 천지가 교감하며 삶의 원동력을 생성해간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무는 하늘의 소리와 땅의 소리를 듣고 전하는 신령스러운 존재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서구에서도 나무는 옴팔로스, 그러니까 세계의 중심으로 여겨졌으며 태양의 힘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는 존재였다. 그런가하면 나무는 여성성과 밀접하게 맞닿아있다. 또한 기독교에서도 나무는 성성의 현현이나 그 대변자로 자주 등장한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올리브 나무와 월계수, 독일의 전나무와 보리수, 러시아의 자작나무, 레바논의 씨트론, 중국의 대나무, 한국의 소나무 등은 신화와 종교, 상징의 세계에 자리한 대표적인 나무들이다. ● 이창분의 나무는 저 먼 곳에 등대처럼, 별처럼 자리하고 있다. 그것은 모든 시욕에 지친 인간의 눈에 구원처럼, 희망처럼 자리했다. 나무들은 한결같이 잎사귀를 떨구어 헐벗은 상태로 서있다. 실핏줄이나 뼈 같은 줄기만이 모여 수직으로 겨냥되어 있을 뿐이다. 간혹 나무 밑 둥에 새끼줄을 감싸 묶어놓은 것들도 있다. 벌레를 잡기 위해 또는 냉혹한 추위로부터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장치인데 작가는 그 모습이 무척 감동적이었다고 말한다. ●한결같이 짙은 검은 색으로 마감된 나무는 흡사 실루엣 같기도 하고 그림자처럼 보인다. 개별성의 자취와 흔적을 지우고 나무란 존재성을 단순하게 기호화한 이 그림은 그래서 현실계에 존재하는 나무의 외형을 빌은 마음속의 나무 혹은 특정한 의미를 저장하고 있는 상징체로 다가온다. 그래서인지 종교성의 내음이 짙게 감지되는 그림이란 생각이다. ● 아울러 그 나무에 자신을 의탁하고 투영한 자전적 내용도 감촉된다. 작가는 그 나무를 빌어 자신의 생애를 추스리고 보는 이에게 적막과 고요, 한 순간의 텅 빔과 침묵을 선사한다. 역설적으로 작가는 보여주기를 극히 절제하고 오히려 덜 보여줌으로써 사색과 감정의 동요가 잔잔하게 흐르기를 바란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바로 그런 상태, 상황으로 유인하는 하나의 통로로서 기능 한다. 화면에는 그저 황량한 배경에 검은 나무, 식물이미지가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이 세상에 태어나 저 나무처럼 홀로 자존하며 살아가야 한다. 아울러 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저렇게 혼자 고독하게, 세상을 등지고 죽을 것이다. 잔잔한 서정성과 감성이 흐르는 동시에 엄숙한 죽음의 메시지가 공존하는 그런 그림이다.
화면은 대체로 작은 크기의 박스형으로 이루어져있다. 두툼한 질감효과를 연출하기 위해 여러 번의 수고로운 공정이 요구되며 이 작업과정 자체가 또한 작가에게는 자연과 자기 존재를 관조하고 이해하는 소중한 시간을 제공해준다. 패널 위에 한 차례 흙을 바르고 그것이 온전히 마르기를, 습기가 모두 증발되어 마른 흙의 지표가 설정되기까지 기다린다. 그 후에 메마른 흙의 살갗을 또 다른 습기를 머금은 색채에 의해 적시고 그것이 또 마르기를 기다린다. 다시 수 차례에 걸쳐 흙을 바르고 난 후 물감을 스미게 하고 또 흙을 바른다. 무광택의 건조함이 깃든 재료에서 느껴지는 황량함, 그리고 흙빛이 주는 적막과 고독감이 있지만 또한 그 이면에서 베어 나오는 따스함도 있다. 모든 식물들이 몸을 담그고 있는 세상의 흙은 누구도 알아차릴 수 없는 느리고 끈기 있는 침묵의 수동성으로 그것들을 품어준다.
오랜 시간 기다리고 그리는 과정을 반복하는 작업공정에서의 기다리는 시간은 작가에게 긴 공백, 여유, 틈을 부여한다. 그 행위가 자신의 감정과 마음속에서 출구를 찾지 못하고 들끓는 감성과 언어들을 진정시키는 시간이자 틈이 된다고 한다. "흙을 바르고 마르기를 기다리고 색채를 입히고 또 마르기를 기다리며 소란스런 세상의 한 귀퉁이에서 정적이 깃든 식물들의 실루엣을 조심스레 키운다"(작가노트) ● 그 틈 사이로 은유의 옷을 입은 마른 나뭇가지와 풀잎들의 실루엣이 슬그머니 드러난다. 그것은 형체이자 그림자며 존재이자 기호와 이름을 지닌, 명명된 존재다. 마치 어떤 한 장면이 문득 멈춘 듯이 고정되어 있다. 절제된 침묵 속에 결정으로 축약된 자연이 그곳에 존재한다. 검은 색으로 그려진 나무와 풀은 살아있음과 죽음 사이에서 멈췄다. 모든 잎사귀를 떨군 나무가 막막하고 장엄한 자연, 하늘과 흙을 배경으로 그렇게 직립한 풍경이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실 창가 너머로 보이는 산과 나무와 잡풀들이 우거짐과 헝크러짐을 매일같이 보았다. 나무 둥치 밑에서 소리 없이 썩어 가는 수천의 마른 잎들 또한 보았다. 그 장면이 작가에게 작업의 실마리를 부여하고 여러 생각의 갈래를 흐르는 물줄기가 되어 준 것이다. ● 작가는 식물성의 본래 의미를 찾고자 한다. 풀잎이나 나무의 핵심에 가 닿아 그 모든 것들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듯, 이 세상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것이 이 그림의 진정한 메시지다. ■ 박영택
Vol.20050214b | 이창분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