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5_0126_수요일_06:00pm
관훈갤러리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5번지 Tel. 02_733_6469
선과 선의 자장이 만드는 황금빛 '상생'의 공간 ● 박소현의 작업은 매우 화려하고 강렬하다. 화려하게 빛나는 금색의 바탕화면은 언뜻 보아 일본 장식화의 금박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며, 그 위에 얹혀진 청록의 산수는 형체의 간결한 생략과 단순한 색채의 대비와 유비로 인해 흔히 일본인들이 자신의 그림에 대한 특질이라고 일컫는 '자연물의 장식적 변형'으로 보일 만큼 인상적이다. ● 그러나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일본식 장식화의 전통과는 매우 다른 출발점을 지니고 있다. 박소현의 채색화는 일본 장식화의 '쌓아올림'식 방법과는 거리가 멀다. 역설적이게도 그의 농도 짙은 채색화는 '스며들기'식의 수묵 전통을 따른다.
그의 작업은 긋는 획으로부터 출발한다. 그 획은 생지(生紙, 가공을 하지 않은 종이)에 수묵으로 그려져 역동적인 화면을 구성한다. 생지 위에 그은 선은 농채화에 주로 쓰이는 숙지(熟紙, 농채를 하기 위해 생지 위에 아교를 포수하여 만든 종이) 위에 그어진 선과는 매우 다른 느낌을 지닌다. 생지에 그은 선은 농담의 표현이 자유롭고, 의도하지 않은 스밈과 번짐의 표현이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선의 변화를 예측하기 힘들며 즉흥적이다. 또 같은 느낌 비슷한 감흥을 반복하여 나타내기 힘들다. 이에 비해 숙지에서는 작가가 오랜 필선의 숙련을 거쳐 같은 성질의 선을 언제나 다시 재현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역사상 오랜 세월동안 토론의 쟁점 되었던 화원화와 문인화의 가치에 관한 담론도 사실 어느 정도 이러한 물질적인 재료의 속성에 기인하고 있는 것이다.
박소현 작업의 기초는 바로 선이다. 언제나 푸른 소나무와 대나무, 난과 매화 역시 선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나무들이 뿌리를 박고 서있는 땅 역시 준(?)으로 불리는 짧은 선이다. 그의 그림에서 이 준이 극도로 짧아져 점으로 보이고, 규칙적인 율동으로 나타난다. ● 선으로 대상을 구륵하는 백묘는 동양회화의 기초이다. 그래서 동양의 회화는 선의 예술로 불린다. 동양의 회화에서 백묘는 그림을 완성하기 위한 화고(畵稿)가 될 뿐 아니라, 나아가 독립된 회화 양식으로서도 평가를 받아왔다. 실재로 박소현은 이러한 전통적 인식을 기초로 화면을 구성하고 있다. 그의 그림은 조형이라는 공간 구성으로 이미지가 구현되는 것이 아니라, 선의 율동과 그 선이 만들어내는 기세로 화면이 이루어진다. 이 선의 느낌을 증폭시키기 위하여 박소현이 선택한 매체가 바로 생지이다. 숙지는 감각의 변화와 감정의 진폭을 민감하게 받아줄 수 없기 때문이다.
박소현은 또 생지의 스며드는 느낌, 그 즉흥의 세계를 채색의 범주로 확대했다. 그의 채색은 매우 강렬하다. 그의 색채는 수묵을 보조해주는 수묵담채의 모습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인 농채의 성격을 띤다. 동양회화의 전통에서 수묵과 농채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매체로 여기거나 혹은 농채를 직업화가의 전문영역으로 교양인 즉 지식인의 자아 표현과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금기시 했던 것을 상기하면 그의 이러한 시도는 전통 안에서 매우 파격적인 것이다. ● 물론 이처럼 화려한 채색과 수묵의 만남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어서, 박소현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원대 금벽산수의 대가였던 전선(錢選)의 그림이 떠오른다. 섬세한 필치와 화려한 색채, 그러나 뛰어난 시적 운치로 사대부의 개성주의 화풍을 표현했던 그의 그림은 박소현의 작업과 서로 통하는 면이 있다. 특히 현존하는 「부옥산거도(浮玉山居圖)」의 수묵과 청록의 결합은 매우 대담하게 화려한 채색으로 청담의 가치를 표현하고자 한 것으로 박소현이 지향하는 가치를 표현하는 방식과 닮아 보인다.
박소현이 표현하고자 하는 가치는 신의 섭리를 담은 자연의 영속성이다. 물론 그 영속성이란 현상의 지속성이 아니라 자연의 원리의 순환과 그 영원함을 뜻한다. 그래서 그의 주제는 '장수(長壽)'이다. 이는 단순한 생명의 지속이나 연장이라는 차원의 장수가 아니다. 그는 언제나 푸르른 소나무나 대나무, 또는 고결한 품성의 뜻으로 매화나 난초 같은 사군자의 상징을 통해 도덕적 가치 또는 삶에 대한 원리의 영속을 이야기 하고자 한다. 자연을 이해하는 이러한 세계관은 자연의 이법(理法)을 따라 형성된 것이다. 박소현은 자연의 궁극적인 모습을 끝없이 살아 생동하는 생생불이(生生不已)의 순환 속에서 발견하고 그 상징과 기호로 사군자를, 그 현상의 표현방식으로 선(線)을 선택한 것이다. ● 따라서 그의 자연에 대한 묘사는 실재에 의지해 있으면서도 실재에 대한 직접적 진술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박소현의 형상화 작업은 순수하게 작가의 의식적 변형을 거친 원리와 그에 대한 작용, 즉 도(道)와 덕(德)의 이미지에 대한 투영이며, 이상적 경계에 대하여 선으로 표상되는 시간과 대상의 본질에 대한 조술(祖述)이다.
그의 작업에서 보이는 선은 결국 영속적 자연의 순환을 나타내는 수단인 동시에 대상에 대한 작가의 인식을 반영한다. 그러므로 그의 작업을 이해하는 관건은 그의 선을 이해하는 것에 있다. 그의 감정의 기복을 따라 변해가는 선을 느끼는 견필(見筆)이야 말로 화면의 구성과 조형에만 익숙해져 있는 우리세대가 읽지 못하는 그의 그림과 교류할 수 있는 최대의 공구이기 때문이다. ● 견필은 곧 필적의 흐름을 보는 것이고, 필적은 필력을 나타낸다. 필력은 사실 보여 지는 필선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며, 선과 선의 자장(磁場)이 이루어 내는 공간을 내포한다. 일반적으로 여백이라고 부르는 이 공간은 필선의 자장이 공명하는 공간이다. 드러난 현상에 생명을 불어 넣는 동시에 끊임없이 현상으로 환원되어가는 이 공간을 박소현은 금분으로 차분히 채워 넣었다.
여기에는 그의 장식유희, 즉 '꾸밈'의 정열이 들어있다. '꾸밈'은 살아 있음에 대한 증명이다. 인간의 문명창조 정신 역시 보다 큰 범주에서 보면 이 '꾸밈'의 정열의 연장선에 있다. 이런 점에서 '꾸밈'은 인간의 본성에 가깝다. 다시 말해 빈 공간으로 상징되는 생명의 근원에 대한 찬양이 금분을 사용한 여백처리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의 '꾸밈'의 열정은 이 공간을 금박으로 붙여 놓은 무표정한 공간이 아니라, 금분의 필선이 모여 생동하는 '자연'의 배후로써 여운의 떨림까지 드러나는 본질적 공간으로 환원한다. '꾸밈'의 여백은 변하지 않는 원리로써 황금빛 '상생'의 공간을 암시하며 그가 무한한 생명을 가진 '자연'에 보내는 최대의 찬사이기도 하다. ■ 김백균
Vol.20050125a | 박소현 채색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