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속닥속닥이 2005년에도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문예진흥기금 예술정보화부문 지원사업으로 선정되었습니다. 계속 노력할 것을 약속드리며 다시금 독자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neoart.com 이미지올로기연구소
● 아래 글은 『월간미술』 2005년 2월호 특집 '소그룹 운동으로 보는 한국현대미술사'에 실린 글입니다.
'아비 없는 자식들' 그 이후
1990년대부터 현재까지 남한 젊은 작가들의 움직임과 환경에 대하여
솔직히 1990년대부터 현재까지 남한의 미술은 어수선하다. 2000년대 중반 들어서 그나마 나름대로 정리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아직도 어수룩하며 한마디로 딱 잘라 말하자면 후지다. 물론 이런 평가들이 미술지형에 대한 어리광 섞인 푸념이라면 어느 시기나 늘 있어왔기에 그 의미를 곱씹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다만 남한 미술계에서 아직도 해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다는 말의 우회적 표현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상황은 많이 달라진다.
지금은 상당히 유연해졌지만 기억컨대 1990년대 중반까지 남한 미술지형에는 극심한 민중/제도의 대립이 존재했었다. 당시 양극화된 미술계의 어느 편에 서있건 젊은(또는 어린) 작가들의 입장에서 득이 될 것이라곤 별로 없었다. 386세대들이 말하던 '1980년대의 거대한 환풍구'는 생각보다 거친 바람을 품고 있었으며, 그와 대립되었던 제도미술의 '철옹성' 또한 좀체 문을 열려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생적 시각문화의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스테레오 타입의 예각 또는 사각지대에서 새로이 만들어진 다양한 대안이 제시되었던 까닭이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1990년대 중반에 새로이 만들어진 대안들은 매우 빠른 속도로 남한 미술의 과거를 잊으려 노력했다.(물론 이 말은 남한을 잊으려 했다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남한 미술에 '그럴듯한 전통'이 없었기에 '모던한 상황'을 제대로 연출해보지도 못했으며, 또 그 모양이라서 '모던의 극복'이란 불가능할 것이라는 심각한 고민을 해왔던 1990년대 중반 이전과는 달리 그나마 후진 남한의 후진 미술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놀아보자는 주장이 더 설득력을 지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청출어람'식의 사고에서 '아비 없는 자식'으로의 전환을 이루었던 것이다. 좀 버릇은 없지만 그 '아비 없는 자식들'이 남한의 상황에서 '탈모던'을 가능하게 만들었다고 생각된다. 이는 1988년 서울올림픽 기념전시인 『세계현대미술제』와 1995년 이후 『광주비엔날레』에 출품된 작품들만 비교해 보아도 확연한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아비 없는 자식들'의 또 다른 특징은 로컬과 글로벌을 넘나드는 글로컬(Glocal:Global+Local)이다. 이에 대해서는 1999년 이후로 우후주순처럼 생겨난 대안공간의 전시들로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는 1989년 해외여행 전면 자율화 이후 급증했던 미술 유학생들의 힘이 컸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해외교류의 통로가 몇몇 기관들로 제한되었던 남한 미술계가 『광주비엔날레』 등 각종 대형국제미술행사와 작지만 다양한 해외교류를 모색했던 대안공간들의 노력들을 받아들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찌되었건 2000년대 들어 남한 미술계는 '지역'과 '세계'에 대한 보다 균형 잡힌 안목을 지니게 되었다는 생각이다. 특히 1999년 문을 연 '대안공간 루프'는 열악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제법 규모 있는 해외교류의 네트워크를 구축하였다.
해외교류의 새로운 네트워크로 '대안공간 루프'가 구축되었다면 남한 미술계의 새로운 네트워크로 '대안공간 풀'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문을 연 이 두 대안공간은 영문표기의 오름과 내림(순환을 의미하는 LOOP와 웅덩이를 의미하는 POOL)을 같이하며 남한 미술계의 만만치 않은 일들을 감당하고 있다. 특히 '대안공간 풀'을 중심으로 구성된 작가, 큐레이터, 평론가들의 모임인 '포럼A'는 마땅한 이슈를 찾지 못했던 남한 미술계에 적지 않은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2000년을 전후로 작가들이 특정 이슈나 조형의식을 주창하며 집단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일은 급격하게 힘을 잃고 있다. 그래서 요즘 작가들은 발언의 장으로 기획전이나 그룹전보다는 개인전을 더 선호하고 있는 것 같다. 이제는 더 이상 스테레오 타입의 단순한 미술계도 아니며, 특정 집단의 이익만을 고집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생각들과 정보들이 교류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커미셔너, 큐레이터, 전시기획자들의 역할이 확연해지면서 굳이 예전처럼 몇몇 작가들이 모여 수고롭게 DIY(do-it-yourself)를 고집할 이유가 없어진 까닭이다. 이 말은 남한 미술계의 개별창작을 제외한 전시기획 및 미술행정, 미술저널 등 여타 부문이 흡족하지는 않지만 나름의 성장을 인정받고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1993년 '나무아카데미'를 필두로 '동아갤러리', '보다갤러리', '서남미술전시관', '한원미술관', '대안공간 풀', '일주아트하우스', '아트센터 나비', '스페이스 빔', '아트컨설팅서울' 등에서 각자 여건에 맞추어 공개 프리젠테이션 또는 세미나식 창작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하였고, 2000년대 들어 '쌈지스튜디오', '영은미술관 창작스튜디오', '창동미술스튜디오', '고양미술스튜디오' 등이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정착시키면서 국가와 민간차원의 각종 창작지원시스템들은 뭇 작가들의 관심을 받기에 충분하였다. 그 과정 중에 당연히 기존에 명망을 누려왔던 대형 그룹전 및 공모전은 작가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갔다.
2000년대 남한 미술의 또 다른 성과로는 온라인 미술계의 구축을 들 수 있다. 세기말의 막다른 분위기로 치달았던 시기에 시작한 온라인 문화는 '사이버 예술'로서의 기대를 저버리고 재빠르게 생활로 편입되었다. 물론 몇몇 거대 미술단체 및 기관들의 썰렁한 홈페이지는 예나 지금이나 그 깔끔함을 자랑하며 '온라인 명함 또는 간판'의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 온라인 미술계의 구축은 생각보다 늦은감이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2004년 '미술인회의'가 창립되면서 이제는 더 이상 '아비 없는 자식들'만 온라인에 연결된다는 사고가 불식되었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어찌되었건 '미술인회의'는 온라인 미술계의 평균연령을 높이는데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
환경의 변화는 창작물의 변화를 가져온다. 2000년대 남한의 미술은 그 장르마저 포기할 정도로 심하게 불안한 지형을 딛고 있다. 반면 개별창작을 제외한 여타 부문의 성장이 두드러지면서 작가들끼리만 전시를 꾸린다는 것은 왠지 빈약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기사 개인전이라 하더라도 요즘 작가들은 경제적인 이유가 아니라면 혼자 전시를 꾸리는 무모한 짓을 하지 않을 것이다. 설치와 영상이 다반사인 요즘의 개인전 작품들은 사실 개인의 작품이라기보다는 창작자 주변 사람들의 손과 발 그리고 머리와 눈이 함께 하지 않으면 결코 실현될 수 없는 공동의 작품인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비록 가시화되지는 않았지만 비슷한 생각의 작가들끼리 특정한 목소리를 내는 그룹은 아직도 건강하게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이 가시화 되기 위해서는 개별창작 이외 부문의 좀더 세심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예전 DIY시절에 어쩔 수 없이 작가들이 해야했던 일의 상당 부분이 개별창작 이외의 부문에 맡겨진 까닭이다.
남한의 현실경제와 미술시장은 늪에 빠진 것처럼 좀처럼 회복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반면 문예진흥기금 등 창작지원을 위한 여건들은 차츰차츰 좋아지고 있다.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혹자는 벌써부터 '정부와 지자체의 추동력이 민간을 압도하고 있다'며 우려한다. 행정권력의 지원이 많다는 것이 아니라 민간의 여건이 너무 열악한 까닭이다. 그래서 행정권력이 '아류적 발전'을 꾀할 경우 '문화는 넘치는데 예술은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남한 미술의 현재 상황도 결코 다르지 않다. 그리고 이를 좀더 세분화된 영역에 적용해보면 '전시는 많는데 작가는 없다'는 말에 다름 아닐 수 있다. 벌써 2005년, 해방 60주년이다. 더 이상 후진 남한의 후진 미술이 아니었으면 한다. ■ 최금수
Vol.20050101a | '아비 없는 자식들' 그 이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