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반 서울 중구 필동 3가 26번지 동국대학교 수영장 옥상 Tel. 02_2260_3424
인류는 탄생부터 끊임없이 "나는 누구인가?"를 스스로에게 반문(反問)하면서 살아간다. 고대부터 현재까지 대부분의 예술가, 철학자, 과학자들이 인식(認識)의 출발과 진리를 여기에 두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은 반문(反問)을 거듭할수록 거역할 수 없는 운명처럼 성(性)과 대면하는 자아를 발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류는 모든 것의 출발을 성(性)에 두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성(性)과 인간 존재는 서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밀접하면서도 중요한 관계라는 것을 보여준다. 본래 성(性)은 아름답고 즐겁고 숭고한 의미를 지녔으나, 현대의 성(性)은 상업이라는 거대한 자본과 만나면서 퇴색한다. 그 효과는 엄청난 속도로 모든 것들을 변화시키면서 인류를 더 이상 추락할 곳이 없는 늪으로 빠뜨린다.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성(性)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여기서 세 번째 전시회의 주제는 시작된다. 미술이라는 예술형식에 성(性)은 새로운 모티브를 제공해 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왜곡된 성(性)이 아닌, 아름답고 즐거운 본래의 성(性)의 모습을......
본인의 작업에서 보여주는 첫 인상은 성(性) 형상의 단순성과 해학성이다. 무거울 수도, 가벼울 수도, 천박할 수도, 조잡할 수도 있는 성(性)을 단순과 해학이라는 형식에 넣었다. 이것은 현대 미술의 형식들과 비교하면, "낯섦"보다는 "친숙"을, "따분"보다는 "흥미"를, "어려움"보다는 "쉬움"을 드러내고자 했다. 절제된 형태와 색의 사용으로 표현된 여러 형상들은 어린 시절 봤던 만화의 한 컷 같기도 하고, 사춘기에 숱한 밤을 고민하면서 만든 낙서장의 일부 같기도 하고, 학창시절 미술 시간에 풍경화 대신 그린 그림 같기도 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성(性)이 가지고 있는 특성을 자연스럽게 만난다. 성(性)은 우리에게 낯선 존재가 아니라 하루에 세 번 먹는 밥과 같이 익숙한 존재인 것이다. 이런 만남은 어둡고, 불결하고, 추한 성(性)을 밝고 경쾌하게 나타내기 위해서 부조적 표현 기법과 해학적 드로잉의 주선(周旋)으로 가능하게 하였다. 먼저, 성(性)과 빛과 무채색을 근원(根源)이라는 일직선상에 놓아서 만물의 근본인 성(性) 문제로의 접근을 이끌었다. 다음으로는 성(性)의 중요성과 아름다움, 맑고 경쾌한 즐거움을 부조적 기법을 이용하여 표현하면서 빛과 만남을 유도하여 왜곡된 성(性)이 아닌 깨끗하고 즐거운 본래의 성(性)의 모습을 부각시키고자 하였다. ● 작품에 나타난 형식은 부조라는 형태를 취하면서 착시현상을 허용한다. 현대 미술에서는 회화와 조각의 구분이 모호하지만 전통적 해석으로 부조는 형상을 도드라지게 새기는 조각법으로 회화와 조각의 중간 형식으로 볼 수 있다. 이번 전시회 작품에 나타난 부조의 형상은 빛과의 만남을 가진다. 빛은 예로부터 여러 가지 철학적ㆍ종교적 사색에 커다란 영향을 끼쳐왔다. 빛의 존재는 일차적으로 사물을 보고 판단하는 것으로 우리를 충만하게 한다. 다음으로는 어떤 세계를 성립시키는 근원적 존재다. 작품에서 빛은 단순하고 비유적인 사용과 세계를 성립시키는 근원적 존재의 장과 관련된 표현으로 새로운 형이상학(形而上學)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빛은 본인의 작업에서도 관람자의 보는 시각과 머무는 공간, 방향에 따라 형(形)과 뉘앙스(Nuance)가 달라지는 모습들을 보여준다. 부조적 형상과 빛에 의한 착시현상으로 "보여주기"를 실시한 이번 전시회에서 성(性)은 새로운 모습으로 서서히 드러난다. 그것은 아름답고 밝고 즐거움을 주는 희망의 중요한 요인으로서 어느 누구에게나 행복의 가장 큰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적극적 표현으로서의 성(性)인 것이다. ■ 백종기
부조적 착시 회화의 해학성 ● 백종기가 첫 개인전을 연 것이 4년 전이었는데 그 때 서문을 썼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요즘의 작업을 지난번에 비춰 보자면 화면구조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당시에 그의 회화는 충분히 부조적 착시 회화라고 부를 만한 것이었다. 다시 말한다면, 그의 회화는 바탕 화면 위에다 또 다른 패널을 이중으로 겹침으로써 형성된 부조적 구조를 기본으로 삼아, 그 위에다 검은 줄무늬로 단순한 형태감이 있는 형상들을 그려서 화면을 평면인 듯 입체인 듯 착각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하얀 바탕 위에 강하게 대비되는 검은 줄무늬들, 기하학적 형태의 윤곽선이 마치 작도를 하듯이 기계적으로 그려졌다. 이는 실재와 가상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참다운 진리보다 말초적 감각이 앞서는 현실에 대한 반성과 비판을 담아내려는 의식이 잘 드러난 작품이었다. ● 이번 전시회에서도 착시적 화면구조를 창출한다는 의식이 유지되는 가운데 방법적으로 새로운 모색이 나타난다. 이제 화면은 캔버스의 사각형 패널 구조를 벗어나 변형된 구조를 갖는다. 부조처럼 돌출된 것도 중첩된 패널이 아니라 어떤 모티브의 형태 자체다. 그 표면에는 형태의 윤곽선이 착시적으로 그려져, 조명에 의해 드리워진 실제 형태의 그늘진 윤곽선과 충돌을 빚는다. 표면 질감과 광택의 처리도 두드러진다. 이런 특징들은 그의 작업의 위치를 옵아트의 착시 실험이나 미니멀 아트의 평면구조의 형식적 실험이란 맥락에서 가늠케 한다. ● 그런데 이번 작업에는 형식적 실험의 측면말고도 주목되는 측면들이 있다. 즉 새로운 화면에서는 착시적 구조만이 아니라 모티브의 형상적 의미가 각별한 주의를 끈다. 전에는 검은 줄무늬의 선조적 의미가 강조되었다면 이제는 모티브 형상이 갖는 성적인 의미가 부각된다. 이런 차이에서 작품의 내용에 있어 어떤 변화가 일어났음이 감지된다. 그러고 보니 변화의 싹이 초기 작품에 이미 내재해 있었던 것 같다. 거기엔 원생동물로 보이는 형상들이 숨은 그림으로 감춰져 있었는데, 이제 와서 작가는 그것 역시 성적인 내용과 무관한 게 아니라고 고백하는 셈이다.
이런 회화는 낙서회화와 마찬가지로 원초적 감성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하지만 전형적인 낙서회화와는 다르게 성에 관한 표현이 노골적이지도 과장되지도 않게 보인다. 이런 인상은 흑백의 착시적 화면을 싸고도는 이지적인 긴장감과도 연관될 것이다. 게다가 엄숙하다고 느껴질 만치 질서정연한 수직-수평적 구성의 감각까지 감안해서 살펴보면, 화면에 담긴 성적인 내용조차 다만 성에 대한 약간의 눈뜸을 암시하는 데 그치고 있다는 점이 확인된다. 인형같이 동그란 눈의 형상, 그 깜빡임이 매우 당돌한데, 거리낌 없이 엿보는 모습이 웃음을 머금게 한다. 무어라 꼬집어 말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잘 알고 있기에 슬그머니 웃어넘길 수 있는, 그런 은근한 느낌을 작가는 건강한 성의 표현이라 말한다. ● 여기서 특히 주목되면서 많은 기대를 걸게 하는 면모가 해학적 감각의 표출이다. 이는 미술 자체의 어려운 논리에 치중하지 않고 누구든지 미술에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겠다는 의식의 발로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 걸음 나아가 새로운 주문을 덧붙이고 싶다. 성적인 해학의 감각을 넘어 더욱 한국적인 해학성에 다가가는 길을 찾아보라고. 모더니스트 미술의 논리를 천착해온 작가에게 이런 주문이 행여 사족으로 여겨지지나 않을까 걱정된다. 하지만 해학성은 한국미의 특색으로까지 언급될 정도로 우리의 문화와 감성의 깊은 근원에서부터 솟아나는 것이다. 기왕에 해학성을 추구하는 길로 들어섰기에, 앞으로 이를 진지하게 모색한 결과가 활짝 피어나길 기대해 본다. ■ 김수현
Vol.20041216c | 백종기 개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