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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4_1206_월요일_05:00pm
작가와의 대화_2004_1222_수요일_03:00pm
숙명여자대학교 문신미술관 빛 갤러리 서울 용산구 효창원길 52 Tel. 02_710_9280 / 02_2077_7052 www.moonshin.or.kr
System-City: 무의식의 모자이크 ● 오스트리아 출신의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인간 자아의 욕망이 자기검열을 거쳐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슈퍼에고로 변화된다고 설명한다. 이것은 우리의 도덕적 자아가 끊임없이 작용하고 있는, 그리하여 자아와 관련된 구체적인 행동의 결과들이 하나의 구조로서 주관과 객관의 형식적 틀을 형성하게 되는 개인 의식의 일반화 과정에 대한 언급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반화 과정의 역전을 2001년 개봉되었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메멘토」에서 볼 수 있다. 영화에서 전직 보험수사관인 레너드 셸비는 자신의 부인이 강간당하고 죽은 충격으로 기억을 오래 지속하지 못하는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리게 된다. 이 영화에서 그는 기억상실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몸에 문신으로 혹은 본 것들을 즉시 그리고 끊임없이 자신의 몸 어딘가에 적어놓는다. 그러나 영화가 암시하는 것은 주인공이 자신의 몸에 적어놓은 기억의 편린들을 이어 가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결국 자기 부인의 죽음에 대한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 인간의 실존적인 한계에 대한 커멘트로 끝을 맺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감독은 레너드를 통해 자료에 의존함으로서 오히려 객관적일 수도 있다는 상황을 제시하는 듯이 보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주인공이 자신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생각하고 싶은 것만을 생각하는' 그런 인간 자아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을 단순한 이분법 차원에서 보면 사회적 질서를 지향하는 프로이드의 슈퍼에고는 다분히 모더니즘 적이고, 우연이 필연인체 가장되어 모자이크처럼 짜 맞추어지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메멘토(Memento)는 다분히 포스트모더니즘 적이라고도 말 하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거의 두시간 정도(정확히 112분) 상영되지만 영화의 스토리는 주인공의 기억과 더불어 역시 10분 정도의 단위로 끊어지는 듯한 인상을 주고, 에피소드들은 언제나 주인공이 자신의 몸 위에 스스로 써놓은 단어들을 통해 순간순간 결론을 맺는 현대 소비시대 이미지들의 파편적인 특성이 뿜어내는 에너지의 향연의 장소가 되고 또한 논리적 판단이 아니라 인상 우위의 특성을 강하게 전달한다. 여기서도 예외 없이 이미 예술에 대한 논의가 미학적 단서들을 찾는 것이라기보다는 현대사회에서 다시 한번 우리 인간 삶의 실존적 조건들이 어떤 방식으로 폐쇄적으로 변화되어가고 있는가에 대한 담론의 성격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임선영의 작품은 바로 인간의 삶이 실존적 갈등을 겪으면서 구성되어 나아가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그녀는 폐쇄와 개방이라는 두 가지 관점을 자신이 생산하는 이미지들의 시각적 언어로 제시한다. 2002~03년에 제작된 비디오 작품들에서 보면 그녀에게 폐쇄는 자신의 욕망이 자유로이 거니는 일종의 놀이의 장소이다. 욕망을 제어하고 일정한 거리를 두려고 애쓰거나 혹은 관음증적 응시를 어떠한 다른 작용적인 기제들에 의해 방해받지 않는, 폐쇄되어 있지만 자신의 욕망이 발현시키는 은밀한 유희를 보호하기도 하는 폐쇄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결과적으로 그런 이미지들을 바라보는 관객들에게 그것은 자신의 심리적인 상황 안에 갇혀있는 자아가 그 폐쇄성 안에서 새로운 놀이 공간을 찾는 그런 언어들로 보여지게 된다. 어떤 면에서 자폐증을 가지고 있는 아이의 무신경함을 느끼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녀가 묘사하는 비디오 작품들의 이미지들에서 묘사되는 자아는 또 다른 방식으로 욕망을 표현한다. 즉 욕망은 물질화 되어 하나의 메시지로 관객에게 전달된다. 마치 불란서 철학자 자크 라캉의 "언어는 물질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말처럼 그녀의 이미지는 그녀의 환상이 투사된 물질적 속성(혹은 육체적 욕망의 결과로 얻어지는 행위)을 통해 관객에게 삶의 개인적 특수성을 호소한다. 즉 그녀에게 "이미지는 물질처럼 구조화 되어있는" 것이다. 2002년도 작품 Love Hotel 에서 작가는 플레이보이 잡지의 센터폴드 걸(centerfold girl)처럼 분장을 하고 퍼포먼스를 함으로써 관음증에 대한 반응이 이 시대의 상업적 생산품일 뿐만이 아니라 또한 소비의 방식임을 제시한다. 현대에 이르러 시각적 소비는 거대한 상업자본을 형성하고 있고, 그런 자본들은 사회에서 하나의 시스템으로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시스템이 스며들어 있는 삶 속에서 우리는 시각적 이미지에 대한 이해를 도모한다. 그러나 현대 사회의 이런 현상들에 대해 우리 삶이 가지고 있는 이해의 방식은 논리적 순서에 따라 해석의 지평을 넓혀 가는 것이라기보다는 행위의 지평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에 대한 수동적인 수용이기가 쉬울 것이다. ● 사회심리적인 현상의 미시적인 제시에 대한 이슈는 작가라는 행위자와 행위의 수용자인 관객과의 관계를 좀더 직접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Bunny Girl Series (2002) 사진작품에서 더욱 강하게 드러난다. 이 작품에서 임선영은 폐쇄된 공간 안에서 TV 모니터에 비추어진 위에서 아래로 바라본 시각에서 찍은 에스컬레이터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바니걸로 분장한 연출된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에스컬레이터는 밀실 안으로 들어가는 통로이고, 또한 인간 자신의 심리적인 폐쇄공간, 관음증이 허용되는 물신숭배적(fetishist)인 공간으로 들어가는 통로이다. 모니터에 비추어진 에스컬레이터는 사람이 있거나 없거나 계속 아래를 향해 움직이고 있고, 모니터 앞에 앉아있는 바니걸의 분위기는 자못 심각한 듯이 보인다. 여기서 작가는 우리가 우리 삶의 일부로서 보고 있고 받아들이고 있는 사회적 현상들이 경제적인 소비주의적 의도를 지닌 누군가에 의해 조정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시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 2003년의 Maxwell's Demon 이나 No hiding, no pride 과 같은 비디오 작품에서는 어떤 면에서 자신의 근원적인 성적 욕망을 객관적인 거리를 두고 마음껏 향유하고 있는 여성(No hiding, no pride)과 작가 자신의 외적인 인격(Persona)이라 할 수 있는 바비(Barbie)가 등장하는 작품들(Maxwell's Demon, Command Control Emotion)에서는 2002년도의 작품들에서 보이던 직접성은 상당히 제거되어 있다. 그러나 아직도 작가는 욕망과 폐쇄성, 소비적인 사회 속에서의 자신의 무의식적 지향성 같은 주제들에 대해 계속 이야기하고 있다. 작가는 현대 자본주의 소비사회에서 이런 인간의 무의식을 세뇌시키는 경제적 약속들의 - 풍요에 대한 - 허망함은 인간의 욕망을 조정하는 악마 같은 실존적 특성을 지니고 있는 실체일지도 모른다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런 과정은 필연적으로 임선영의 사진 작품들에서 나타나는 비판적 시각들로의 - 객관적인 듯이 보이지만 여전히 주관적인 특수성을 통해 이 사회가 지향하는 시스템의 불완전성이 강조되고 있는 - 발전을 예상할 수 있게 해준다.
대도시의 건물을 아래쪽의 시각에서 혹은 위쪽의 시각에서 편향적인 시각(vision of angle)으로 담아내는 임선영의 사진작품들이 가지고 있는 전체적인 특성은 사진이라는 매체의 태생적인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매체적인 객관성에 대한 기대를 상당부분 포기하도록 만든다. 한국 사회의 경제적 상황에서 나름대로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는 빌딩들의 모습은 외적인 특성 자체로 포착되기고 하고(63빌딩), 그 건물이 한국 사회에서 가지고 있는 기업(삼성본관, 포스틸 빌딩)으로서의 발전신화, 지역적인 특수성(선릉역 부근; 강남)에 대한 정서적 관찰, 자본주의 사회 경제시스템의 중추에 서있는 제도(은행) 등등의 건물들은 한국 사회에서 자본주의 문화의 팔루스(phallus)로서 존재한다. 이 팔루스라는 '이름'은 제도와 권력을 상징하기도 혹은 우리 무의식 속의 욕망이 지향하는 '어떤' 보이지 않는 권력 혹은 존재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팔루스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체계화되는 시스템은 일관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고, 그런 일관성들은 무한하게 반복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 시스템을 바라보는 객관적 실체로서의 작가의 존재가 개입되지만 사실 그런 존재를 가정한다는 것은 작가를 인간적으로 어떠한 모순도 지니지 않은 존재로서 간주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마저도 시스템의 일부로 기능할 위험이 존재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작가의 작품을 통해 작가가 제시하는 모델들이 가지고 있는 그 나름대로 완벽한 듯이 보이는 상징적 상황들을 파괴할 필요가 있다. ● 임선영 사진작품의 도시 건물들은 작가가 바라보는 건물이란 물리적 실체들에 대한 편향된 앵글로 인해 상대적으로 우리가 건물을 바라보거나 건물에 대해 이야기할 때 생각하게 되는 물리적인 구조를 배제하게 만든다. 이것은 건물을 건물의 본래 기능으로부터 벗어난 하나의 오브제처럼 다루는 것이다. 이런 오브제화된 건물들은 더 이상 객관적인 실체로서의 건물이 지니고 있는 구조나 기능에 의해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마치 건물이라는 존재가 가지고 역사적 외상(trauma)에 의해 유발된 무의식의 영역을 혹은 건물이라는 사회 체계내의 독립적인 구조가 가지고 있는 결핍을 찾아내고자 하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작가는 건물 정면을 아래에서 위로 담아 내거나, 건물 앞면이 밀집되어 있는 곳에서 정면의 집합적인 이미지를 포착해낸다. 이런 이미지들에서 사진은 사건의 증거기능을 넘어서 우리 마음의 상징적 외형이자 자본주의의 모순적 현실로 존재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작가가 추구하는 상징성은 형이상학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는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말처럼 매체 자체가 가지고 있는 비중이나 특성 자체를 무시할 수 없는 개념적인 작품들에서 혹은 추상작품들에서는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성들이다. ● 다른 한편으로 작가가 건물을 바라보는 시각은 비판적인 거리를 통해 드러나는 의미의 서열화에 대한 고찰이라고 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은 특히 공중에서 조감도처럼 건물들을 찍은 이미지들에서 잘 드러나는데,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일상에서 만나는 이미지들이 곧바로 사회의 위계적 질서에 대한 다양한 반영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거대한 건물은 한국 사회가 도시의 하부구조로 가지고 있는 시스템의 반영이고, 이런 체계 내에서 개인이라는 주체는 더 이상 독립적인 개인으로서의 주관적 자아를 자유롭게 방임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이다. 마치 이런 시스템은 우리 앞에 선험적(a priori)인 것처럼 던져진다. 그리고 그런 상황 속에서 우리의 존재는 실재하는 것으로서 인식되지 못하고 하나의 객관적 상황으로 변질되어 버린다. 그리하여 이런 객관적인 상황 자체는 우리 인지구조의 표상으로서 나타나며,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하나의 기호처럼 단순화되기도 한다.
우리는 기술매체를 이용하는 미디어 아트의 작품들에서 기호가 설명하는 존재의 특성을 경험한다. 여기서 물론 디지털 기술을 통해 이미지화 된 기호들은 강물처럼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는 면에서 우리 인간의 존재와의 유사성을 가지고 있지만, 중심이 무의미해졌다고 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서조차도 예술작품이 하나의 자기충족적인 실체로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예술 또한 그 자체의 존재성이라는 인간조건적인 필연성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런 존재의 특성이 가지는 가장 특징적인 성격은 질서에 대한 추구이고, 이런 질서는 거시적인 시스템 속에서 정위되는 요소들 중의 하나로서, 시스템 전체에 상징적으로 혹은 물리적으로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참여는 기존의 질서와 관계 있든 아니든지 간에 관계없이 그 자체의 성격을 기반으로 공동체적인 상황을 어떤 방식으로든 제어하는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아마 이것이 프랑스 철학자 푸코가 말하는 보이지 않는 힘을 행사하는 권력의 모습일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에게 권력은 직접적인 물리적 힘으로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억압적인 상황으로서 다가오기 때문이다. 억압은 우리의 삶을 황폐화시킨다. 억압은 다른 곳이 아니라 개인적, 사회적 보상을 지향하는 우리의 마음속으로부터 나온다. 다시 말해 빡빡하게 직조된 세상의 질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노력은 우리를 억압의 상황 속으로 몰아간다. ● 임선영 작품의 최후의 진술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런 억압에 대한 암시들은 다른 면으로는 현대 사회에서 권력의 본질적 성격에 대한 작가적인 내러티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작가가 위와 아래에서 포착한 건물들 사진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건물을 바라보는 방식과는 다른 시각(angle of vision)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건물의 수직을 통해 높이를 느낄 수 있지만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들은 수평적인 평행성을 전제로 건물들을 바라본다. 즉 우리는 건물을 우리가 사용하는 공간의 일부로서 인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에게 건물은 그 건물의 물리적인 구조만이 아니라 자본주의 질서에 편입되어 있는 그 건물이 대표하는 한국사회의 계층적 질서를 드러내고 있는 상징물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사진을 통해 드러나는 작가가 보는 건물은 우리의 보통 시각이 바라보는 것과는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현대 한국사회에서 물리적인 하부구조의 측면에서 그리고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건물들을 위에서 내려다 본 작품들) 높이를 통해 그 자체의 위용을 드러내고자하는 개발의 지향성이 보상적으로 현실화된 측면을 포착한다. 여기서 인간은 공간을 이용하는 이용자의 입장이 아닌 건물에 부속되는 하나의 요소로 변화된다. 그러나 작가는 이런 1차적인 개념적인 장치를 - 건물이 드러내는 외적인 형상들 - 통해 자신의 예술적 언명을 마감하지 않는다.
임선영에게 건물은 하나의 상징적인 권력체가 되는 것이고, 이것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한국 자본주의 사회의 팔루스로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팔루스는 작가의 눈을 통해 다시 하나의 욕망의 체계로 환원되는 순환적인 세계 안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볼 것은 현대미술에서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물리적인 특성을 통해서만 규정한다는 것은 예술에 대해 성급한 판단을 내릴 위험성을 내포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그녀가 작품을 통해 제시하는 이 세상의 시스템 속에 깃들어 있는 권력과 일상, 삶의 열정과 욕망 사이에는 어떤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흔히 보듯이, 작가와 비평가를 포함하여, 예술작품의 보편적인 수식어라 할 수 있는 창조성의 의미를 '기타 등등' 식의 막연하고 불충분한 해석에 의해 본질을 벗어난 유보적인 상황으로 기술한다면 예술의 작품의 존재근거는 물론 예술이 인간의 역사에서 만들어 온 본질과의 소통 상황을 외면하는 결과를 만들어내게 되는 것이다. 임선영의 이미지들이 인간적 삶의 상황들에 대한 상징적 언급으로써 기능한다면, 그것은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넘어 일종의 언술(statement)의 체계로 편입된다. 단위적 사고들의 방법적인 차원을 넘어 현대미술에서 어떤 것들이 인간의 본질과 문화의 특성에 대해 적절한 설명이 될 수 있는가를 깊이 생각해볼 때 우리는 좀더 작품과 사회의 구성적인 근거들을 인식론적인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는 직관적 단서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임선영은 자신의 작품에서 감성과 이성의 전위적인 조합을 만들어내기 위해 사회적으로 상징화 되어있는 건물이라는 구체적 대상들을 개인화 시킨다. 이런 태도는 작가가 갖추어야 될 진실성과 관련이 있고, 이런 진실성 탐구의 노력을 보여주는 작품 창작 행위는 작가가 자신의 예술적인 정체성을 찾아 나아가는 프로젝트로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이다. ■ 정용도
Vol.20041206b | 임선영 개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