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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04_1209_목요일_05:00pm
샘표 스페이스 경기 이천시 호법면 매곡리 231번지 샘표식품 이천공장 Tel. +82.(0)31.644.4615
제작의 변(辯) ● 지리산에 오르면 눈물이 난다. 의료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었던 형을 저 세상으로 보내고, 애통한 마음으로 처음 오른 뱀사골 계곡.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에도 애잔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우리 현대사에 가장 큰 비극을 간직하고 있는 지리산... 한반도에서 이념이 가장 첨예하게 대립되었던 장소이며, 태고적부터 그 넉넉한 품으로 수많은 민초(民草)들을 품었던 어머니 같은 산이다. ● 헤드렌턴 하나 의지하여 홀로 하는 야간산행에도 두렵지가 않았다. 꼭 누군가 옆에 있는 것 같은 생각에 두려움을 떨칠 수 있었다. 수많은 영혼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이 나를 안도하게 하였다. ● 꼭 그렇게 잔혹하게 죽여야만 했던가. 다른 회유 방법은 없었던가. 취재와 자료조사 기간 내내 떠나지 않던 의문이다. 지리산 빨치산이 아무리 두렵고 성가신 존재이지만, 반경 15Km 안에 갇혀 있는, 그리고 외부로부터의 보급이 전무한 고립된 존재에 불과 했다. 그런데 이승만 정권은 대규모 군경을 동원하여 토끼몰이식 소탕작전을 감행하였고, 그것도 모자라 국내전(國內戰)에서는 금기시 되어 있는 것이 상식인 '건벽청야(建壁淸野)'라는 초토화 작전을 감행하였다. ● 이 와중에 수많은 지리산 양민들이, 젊은 군 지휘관들의 공적 다툼의 희생양으로 학살되었다. 창군당시의 우리 군은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해방공간에 더 많은 인재가 필요하다는 미명 하에, 일본군 장교 출신과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군 장교 출신들을 대거 군 요직에 기용을 하였다. 따라서 군의 가장 중요한 임무인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것을 기대하기는 애당초 힘든 일이었다.
작품전을 구상하면서 풍운아 이현상의 사살장소를 확인하기로 결심하였다. 그 날은 하루종일 먹구름이 끼어 있었고, 빗점골의 음정마을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정확한 사살지점의 확인을 위해 들른, 구멍가게의 여러 할머님들의 말에 의하면, 하루 전에 두세 명의 사람이 빨치산 대장의 제사를 위해 다녀갔다고 하니, 공교롭게도 이현상의 사망일에 방문한 셈이 되었다. 그리고 내년이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여서 우연치고는 너무도 괴이하다. ● 사살장소로 추정되는 지점에 이르러 이슬비는 장대비로 바뀌었고, 배낭을 열고 소주 한 병을 꺼내어 예를 올린 다음, 그의 끊임없는 조국애와 고난에 찬 삶을 추모하였다. 일제의 형무소에서 12년, 그리고 해방 후 지리산에서 5~6년. 생의 절반 가량을 영어(囹圄)의 몸으로 지낸 셈이다. 그가 선택한 공산주의는 일제하 독립투쟁의 한 수단이었으리라 추측되지만, 다른 이념을 선택하였다고 해서, 그의 순수한 열정과 조국애를 폄하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 당시에 많은 지식인들은 유행처럼 공산주의를 신봉했었다. 사실, 똑 같이 잘 살자는 데 이론을 탓할 수 있겠는가. ●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6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사회가 양분되어 진통을 겪고 있다. 좌, 우파로 나뉘어 한 쪽은 빨갱이라고 비난하고, 다른 한쪽은 수구세력이라고 몰아 붙이고 있다. 지금의 우익을 자처하는 사람들의 행태를 보며, 미군정하의 '서북청년단.'을 떠올린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광복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독립 운동가들은, 가족을 돌볼 겨를이 없어 자녀들이 교육을 받지 못했고, 그래서 해방된 조국에서 경제적 이득을 취할 기회를 상실했으며, 그 때문에 다시 교육을 받지 못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은 그 정반대의 경우가 많을 것이다.. 실제로 독립유공자 자녀들이, 국가로부터 생계보조를 받는 극빈층이 상당수를 차지한다는 통계는 충격적이다. 가까운 미래에 우리가 다시 나라를 빼앗기는 불행한 사태가 온다면, 누가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나서겠는가? ● 광복이후 여러 명의 독재자들을 거치는 동안, 우리사회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면 된다는 극도의 이기주의가 팽배해 있다. 자유가 없는 북한의 독재체재도 싫지만, 우리의 지나친 이기주의도 싫다. 지금의 우리 사회를 예견할 수 있었다면 지리산의 파르티잔들은 총을 들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마에스트라(시에라 마에스트라ㆍ체 게바라의 쿠바 혁명군 근거지가 있었던 쿠바 남부 산맥)를 새길 일이다.
지금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통일 비용을 염려하고 남북 긴장의 스트레스를 피하고자, 남, 북한이 그냥 각자의 나라로 영원히 분리되어 살아가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조국의 유구한 미래의 역사를 생각한다면, 어떠한 비용을 지불하더라도 반드시 통일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통일에는 몇 가지 꼭 지켜져야 할 원칙이 있다. 평화적인 통일이 되어야 하며, 어느 한 쪽의 일방 흡수통일은 지양해야 하고, 우리 민족 스스로의 힘으로 통일을 이루되, 국제사회에서 우리 통일에 대해 결코 호의적이지 않는 주변 4강대국의 힘의 역학관계를 잘 이용을 하다가, 통일의 호기가 오면 기회를 놓치지 않을, 만반의 제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점점 심화되는 남북 간의 이질감을 극복해야 하는데, 서로 닮아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우리 정부는 사회보장 제도를 더 확충하고, 북한 정부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원리를 도입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또한 조그마한 교류라도 자꾸 시도를 하다 보면 spill over가 되어 통일이 달성 될 수가 있는 것이므로, 자꾸 시도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 모두의 기초가 되는, 진정한 마음으로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무엇보다도 절실한 것이다. ● 저 멀리 장터목산장의 불빛이 보이며, 따뜻한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린다. 취한 눈을 들어, 억울하게 죽은 슬픈 영혼들이 깃들어 있는 골짜기를 둘러보며, 형의 이름을 목놓아 불러 본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자료를 수집하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그 만큼 진실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이며, 한쪽으로 경도된 지식은 얼마나 많은 해악을 끼치는지 경험한 터라서, 항상 균형된 시각을 유지하려고 노력을 하였고, 독서를 할 때도 반대편의 주장을 주의 깊게 읽었다. 주로 체험자의 증언, 특히 가해자의 양심고백과 내 인생의 경험법칙에 많이 의존하였다. 작품 제작기간 내내 국가보안법을 의식하였으니, 이 법이 내 창작과정에 개입하여 그 존재 가치를 십분 발휘했다. 국가의 이익과 창작의 자유에 대해서는 두고두고 생각해 볼 문제인 것 같다. ● 이 전시가 이루어지도록 계기를 마련해 주신 김미진 선생님과 천재용 선생님, 영감을 주신 김지하 선생님께 감사를 드리며, 이 땅의 모든 억울하게 희생된 가엾은 영혼들의 명복을 빌어 본다. ■ 공기평
Vol.20041206a | 공기평展 / KONGKIPYUNG / 孔基枰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