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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4_1203_금요일_05:00pm
스페이스 셀 서울 종로구 삼청동 25-9번지 Tel. 02_732_8145
셰익스피어의 '햄릿'에는 햄릿이 있으며, 레어티스가 있으며, 호레이셔가 있다. 그리고 이들을 묶어주는 유령이 있다. 유령은 '햄릿'의 시작을 알리고 있으며, 서사구조를 이끌어 가는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잘 있거라, 잘 있거라."라고 작별 인사를 하고 있으면서도, "날 잊지 말아라"라고 당부하면서 현실세계에 남으려 한다. 이렇듯 유령은 자신의 존재를 알리면서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어슬렁거린다. 그리고 현실세계에 끊임없이 관여한다. 삶과 죽음만이 존재한다고 인식되는 현실세계에서 삶도 죽음도 아닌 유령은 불청객이지만, 현실을 움직이고 동력(動力)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채워짐과 비워짐, 삶과 죽음, 낮과 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기표와 기의 등 우리의 현실세계는 이분법적인 사고로 가득하다. 이러한 두꺼운 경계를 상정하는 고정적인 사고는 이것과 저것 사이에 존재하는 많은 것들을 생략한다. 그 사이 공간. 그 곳에는 두꺼운 경계를 깨뜨릴 만한 것들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사실이 아닌 하나의 허구쯤으로 생각하고 기억의 테두리에서 지워버린다. 그렇다 해도, 유령은 여전히 현실에 관여하고 있다. "날 잊지 말아라"라고 말하면서 삶과 죽음의 두꺼운 경계를 떠다니고 있다. 이형욱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사람들이 아무런 의심 없이 허구의 세계라고 인식하고 있는 지점이다. 경계를 상정함에 따라 허구처럼 보이고, 허구처럼 인식되고 있지만, 사실 현실세계를 움직이는 동력을 지닌 세계.
이형욱은 고정된 것에 시간의 흐름을 투여하면서, 허구라고 인식되고 있는 그림자를 한 꺼풀 한 꺼풀 벗겨낸다. 고정된 것에 시간이 투여된다는 것은 그것이 더 이상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고정된 것이 현재라는 단일한 시간을 가지고 있다면, 움직이는 것은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적 흐름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형욱의 「얼굴」, 「물고기」, 「자판기」, 「총」, 「자동차」는 사실적으로 재현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고정된 어떠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작품들은 얼굴을 돌리거나, 물고기가 유영(游泳)하거나, 자동차가 회전을 하거나, 자판기에 돈이 떨어져 쌓이거나, 총알이 날아가는 등 움직이는 순간에 대한 재현이다. 그것들은 시간의 흐름에 놓이면서 끊임없이 과거의 잔상을 또는 미래의 거처를 지나면서 존재한다. 과거의 잔상이나 미래의 거처는 현재에는 보이지 않지만, 존재했던 또는 존재할 지점이다. 그래서 그것들은 때로는 허구로, 때로는 거짓으로까지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다. 현재를 있게 한 사실.
사실이지만 허구처럼 보이는 것에 관심을 보이는 이형욱의 작업 역시 허구에 기반하고 있다. 2차원적 평면으로 형상들을 프린트하여 칼과 테이프를 동원한 수작업을 통해 3차원적 형상으로 만들어 낸다. 그것들은 크기뿐만 아니라, 사물의 표면까지 사실적으로 재현된다. 이렇게 형상화된 사물들은 허구처럼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사물들로 보인다. 그래서 낯설지가 않다. 고정되어 있는 얼굴, 물고기, 자판기, 총, 자동차로 보일 뿐이다. 현실세계에서 고정된 그것들은 낯설지는 않지만, 허구이다. 왜냐하면, 이들 사물들은 시간의 흐름에 놓여 있으며, 움직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적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사실은 무엇이고, 허구는 무엇인가. 우리의 시각에 보이는 것이 사실이고, 보이지 않는 것이 허구인가.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당연하다고 인식하게 하는 기저에 대한 질문.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이형욱은 보이는 것에 대해 더 많은 애정을 가지고 접근한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의심한다. 이러한 의심을 통해 보이지 않는, 그리고 인식하지 못했던 것을 작품으로 보여주는 역설적인 노력을 한다. 얼굴은 끊임없이 좌우로 움직이고 있으며, 물고기는 물 속을 유영하고 있으며, 자동차는 회전을 하고 있으며, 자판기는 동전을 쌓고 있으며, 총알은 표적을 향해 쉬지 않고 날아가고 있다. 고정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움직임 자체를 담아내고 있다. 이 역설의 중심에는 "날 잊지 말아라"라는 유령의 말을 상기하고 있는 이형욱이 서있다. 그리고 그 순간을 다시 의심하고 있다.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말이다. ■ 이대범
Vol.20041203b | 이형욱 개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