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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작가 김성철_김병권_최미환_김희영_박규호_박민준_홍정우_나인주 김경화_박재현_신무경_임종광_정만영_정윤선_심준섭
대안공간 반디 부산 수영구 광안동 134-26번지 Tel. 051_756_3313 www.spacebandee.com
흔히 현대미술을 두고 매체의 확장이 다양한 표현을 가능하게 했다고 한다. 이것은 때때로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기성의 미술적 양식들을 거부하거나 극복한 형태로 간주하는 기표이기도 하다. 그럴 것이 이미 기성품의 운용으로부터 인스톨레이션, 퍼포먼스나 바디 페인팅은 일찌감치 매체의 확장이기도 했지만 타 장르와의 경계를 허무는 존재론적 일탈이기도 했다. 이미 차디찬 미술현장에서는 그러한 매체들이 새로운 질료와 방법들을 허용함으로써 새로운 질문들을 던져놓는다. ●미술에서 시각만이 누리던 감성의 장치를 다른 모든 감각을 허용하게 됨으로써 시각이 스스로의 유일한 권리를 포기하게 되고 예술적인 기법들은 산업기술이나 일상의 기술로 치환되는 양상을 보인다. 또 그러한 기술은 다양한 매체나 질료들과 결합하기도 한다. 이것은 시각성이나 어떤 감성체계로부터 미술적 세례를 부여받기 시작했다. ● 고도의 기술이 다양한 매체와 결합하여 새로운 예술적 언어체를 만드는 현대의 매체미술 작업은 관객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 이런 능동적인 소통방식은 생경하고 난해한 현대미술과 아이러니컬하게 결합한다.
작품이 관객을 기다리다가 맞이하는 분명한 흔적들. 이를테면 관객이 작품 앞에 다가서는 순간 작품은 비로소 작동된다. 신무경의 인공의 손은 관객이 접근하는 순간부터 알루미늄 건반을 두드린다. 김성철의 인공 두상은 관객의 접근을 통해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듯한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관객을 감지하는 센서의 작동이 섬세하고 정밀한 감성 소통의 방식으로 위치해 있다. 심준섭이 감추어 놓은 센서는 관객의 접근을 통해 소리를 내어주며 그 소리의 무게를 시각적으로 볼 수 있게 설치된다. 소리의 무게라는 꽤나 문학적인 수사법을 구사한다. 시각장치와 소리장치는 김병권의 작업에서 더 극적이다. 김병권은 두개의 마주보는 스피커에서 월광 소나타가 소음으로 유도된다거나 관객이 볼륨페달을 밟아 소리를 증폭하는 장치이다. 이처럼 관객과 작품이 상호간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경우이다. ●오히려 관객의 특별한 행위를 요청하는 것도 있다. 김경화는 그녀의 권투글러브를 끼고 펀칭볼을 두드리도록 요구한다. 관객이 펀칭 모션을 취하는 순간 그 권투글러브는 음악소리를 제공한다는 재미있는 발상도 있다. 전시장의 벽면을 관객이 만져보도록 장치된 것을 보자. 차디찬 백색의 전시장 벽면에 온열장치로 따뜻한 온기를 제공하는 것이 정윤선의 벽이다.
관객들의 참여나 행위가 이제는 작품이 유도하는 일방적 방식이 아닌 선택적으로 이미지에 접근할 수 있는 고도의 기술 행위도 보인다. 이른바 컴퓨터 인터액티브인데 김희영은 컴퓨터 모니터에서 사계절의 이미지를 관객이 마우스 클릭을 통해 원하는 이미지 여행을 하게 한다. 또 박규호는 몬드리안의 컴퍼지션이 끊임없이 작은 단위로 색면 분할하는 화면을 보여주다가 관객은 새로 리플레이를 할 수 있다. 최미환은 바느질과 같은 손동작과 사물의 선택을 관객의 마우스 작동에 맡긴다. ● 전시장에서 작품의 놓임은 이제 매달거나 늘어놓음과 같은 낯선 연출들로 공간을 메워가는 작품들도 있다. 임종광은 가상공간의 가공의 캐릭터들의 움직임을 동영상 매체에 담았고, 정만영의 인공 얼굴의 눈은 관객의 움직임을 따라 이동한다. 인공 심장과 같이 거대한 호흡기계가 부풀려짐과 줄어들기를 반복하는 박민준의 움직이는 설치물과 밀폐된 방안에 블렉 라이트의 환상적인 영상을 나인주가 연출한다. 나뭇가지들에 설치된 crt모니터에서 물고기의 움직이는 영상은 낯설움으로 유도한다. 이것이 홍정우의 설정이다. 박재현은 인공의 광선을 고도의 기술적 프로세스에서 연출하고 설치한다.
art는 희랍의 Techne의 영어 번역이다. 그러나 이 번역은 생소한 의미로 진화된 듯 하다. 왜냐하면 테크네는 craft라는 기술의 의미에 가까울 뿐 오늘날의 아트와는 거리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기술의 생산적인 의미에 창조의 의미가 덧붙여진 이유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 파인 아트는 생산적인 기술보다 창조 구현의 의미가 절대적으로 전제되어 왔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다시 기술로서의 테크네. 그것이 예술의 어원이라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이다. 미술로서의 기술은 이미 스스로 움직이고 스스로 생겨나 스스로 만들면서 우리와 호흡하도록 진화종을 만들었다. 이 진화종을 『自生作動 』전에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 김영준
Vol.20041130c | 自生作動_자생작동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