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땀-healing my self

김혜란 개인展   2004_1119 ▶ 2004_1128

김혜란_바늘땀 - healing my self_2004

드루아트스페이스 서울 종로구 화동 50번지 Tel. 02_720_0345

커다란 바느질에 담긴 상생의 이야기 ● 바느질은 '천과 천을 이어주는 봉재 기술'의 기능성을 넘어 '공동체와 개인을 이어주는 메신저'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질적인 요소를 결합하는 매개체로서 낱개의 것들을 이어서 새로운 하나를 만들어 내는 바느질의 철학은 예술적인 모티브로 삼을 만한 풍부한 메타포를 가지고 있다. 김혜란은 바느질에 담긴 은유적 메시지를 설치작업으로 형상화하는 작가이다. 그의 바느질은 실을 바늘에 꿰어 천의 앞뒤를 오가며 실 가닥을 천에 박아 넣는 기능적인 차원을 넘어선다. 볼륨을 강조하기 위해 염색을 한 실타래를 사물이나 사물을 감싼 천의 표면 위에 돌출하도록 만듦으로써 바느질 한 땀의 외형을 뻥튀기해서 보여준다. 이때 시각적으로 확대된 바늘 한 땀은 그 자체로 하나의 조형적 요소로서의 독자성을 확보함으로써 형상 표현으로 전환한 커다란 바느질의 예술적 메타포를 만들어낸다. 낱개의 실 가닥이 뭉쳐진 실타래로 커다란 바늘땀을 만들어내는 일은 그의 작업을 바느질의 기능이나 섬유의 물성을 넘어서 예술적 해석의 차원으로 이끄는 장치이다.

김혜란_막다른 길(Blind lane)_101×17cm_2004
김혜란_길(Lane)_241×14cm_2004 김혜란_대화를 위한 처방(Prescription for conversa)_2004

실이나 천이라고 하는 섬유미술의 재료적 특성이나 바느질의 기능적이고 표피적인 여성성이 시각예술에 있어서의 여성주의적 관점으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섬유라는 재료나 바느질의 수행성이 박제화된 여성주의 전략으로 오용되거나 남용되는 사례를 무수히 보아왔다. 이러한 짝퉁 페미니즘을 넘어서는 예술적 전략과 작가의 실존적 고민이 함께 하지 않으면 섬유나 바느질은 그저 한갓진 시각 기호의 놀음에 머물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김혜란은 시간성이 집약된 오브제를 끌어들임으로써 실과 천의 물성과 행위에 담긴 여성성을 조형적 특질로 끌어냄과 동시에 입체설치 작업의 서사적 문맥을 형성한다. ● 이번 전시에서 사용된 오브제는 옛집의 목재들이다. 김혜란이 사용하는 옛집의 목재들 가운데서도 들보는 가부장적인 남성성을 대변하는 매체로 등장한다. 그는 전통적인 가치를 은유하는 들보를 천으로 감싸서 전시장 공간으로 끌어들이고 표면에 구멍을 내고 커다란 바느질을 했다. 나무를 감싸고 있는 천의 쓰임새는 덮고, 입고, 감싸고, 보호하는 여성성의 포용력을 은유한다. 들보 이외에도 날것으로 드러나 있는 여러 가지 딱딱한 목재들을 부드러운 천으로 감싸는 일은 여성 특유의 포용력과 드러내는 장치이다. 이렇듯 바느질과 감싸기라고 하는 두 가지 조형 방법으로 풀어내는 그 작업은 천이나 실, 나무 등의 물질적 특성을 넘어서는 의미 작용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벌거벗은 고건축 목재들을 방안으로 들여와서 천으로 싸서 바느질하는 행위를 통해서 분열과 아집으로 가득한 세상에 상생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김혜란_방어기재(Defence mechanism)_215×50cm_2000
김혜란_어머니를 위한 처방(Prescription for mother)_18×168cm_1999

초기작에 해당하는 「방어기재」는 천으로 감싸지 않은 채 목재에 구멍을 내고 실타래로 바느질형상을 결합해서 두 개의 들보를 마주보게 설치해두었다. 세로로 공간의 수직 상승을 주도하는 「lane」과 「Blind lane」이나 가로 누운 「red lane」 모두 천으로 감싼 표면에 커다란 바느질 형상을 남기고 있는데, 이 작업들에서는 바느질의 미학을 극대화하기 위한 조형적 수사들로 가득 차있기도 하다. 「욕망을 위한 처방」은 갈라진 나무기둥을 실타래로 바느질하고 나서도 여전히 남아있는 수술자국처럼 끊임없이 자라나는 욕망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의 처방전은 '대화를 위한 처방', '어머니를 위한 처방' 등의 연작으로 이어진다. 「트라우마」 연작은 목조건축에서 목재사이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작은 목재를 거즈로 감싸서 시간의 켜를 드러내는 작업이다.

김혜란_50년 후에(Fifty years later)_46×21cm/53×21cm_2004
김혜란_심리적 외상(Trauma)_41×21cm_2003

김혜란의 작업은 궁극적으로 네트워킹을 통한 공존의 시각으로 이어진다. 커다란 바느질은 이질적인 요소의 봉합을 통한 상생의 가능성을 담고 있으며 동시에 봉합의 가변성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봉합은 일시적인 결합 이후 낱개의 존재를 회복할 수 있는 해체나 복원의 가능성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제시하는 네트워킹은 결합과 해체를 동시에 안고 있는 유연한 전략이다. 이것은 여성성의 불완전함과 가능성을 동시에 드러내는 자기부정의 긍정이기도 하다. 남성성과 여성성, 전통과 현대, 딱딱한 것과 부드러운 것, 봉합과 해체, 물성과 정신성 등 이항대립적인 요소들을 엮어내는 상생의 메시지인 것이다. 김혜란의 '커다란 바느질 한 땀 한 땀'에 담긴 상생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야 하는 이유. 그것이 여성작가로서의 실존을 담은 것이든 가족주의나 국가와 같은 거대권력의 이데올로기에 관한 서사적 메시지이든 간에, 그가 펼치는 커다란 바느질들이 자신의 몸에 맞는 매체와 기법으로 그가 대면하는 세상의 온갖 편견과 고정관념들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기 때문이다. ■ 김준기

Vol.20041128b | 김혜란 개인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