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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4_1124_수요일_05:00pm
갤러리 피쉬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7-28번지 백상빌딩 1층 Tel. 02_730_3280
내 안에 짓는 두개의 방, 비우기와 채우기 ● 작가 정찬부는 이번 개인전을 통해 두 개의 방을 짓고 있다. 형식적으로는 두 공간으로 나누어진 '비우기의 방'과 '채우기의 방'이지만 필자의 그러한 이름 지어주기는 매우 피상적인 것이어서 자칫 작가의 작업에 내재하고 있는 둘 사이의 이중적이고도 중층적인 의미를 간과하기 쉽게 만들 성싶기도 하다. 작가의 비우기 작업 이면에는 늘 채우기라는 배반행위가 뒤따르고 채우기 작업의 끄트머리에는 늘 비우기의 잠재적 충동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필자가 작가의 동의 없이 비우기의 방과 채우기의 방을 설정하는 이유는 정찬부의 두 유형의 작업이 표출해내는 시각적 변별의 대표성으로부터 그의 작업과 관계하는 '물질의 내재성의 드러냄과 감춤의 전략'이라는 필자 나름의 논의를 풀어나가고자 하는 까닭이다. 즉 물질의 내재성을 드러내는 비우기의 행위가 전면에 나서고 색칠하기라는 채우기의 배반행위가 뒤따르는 목조각 작업들이 드러누워 있는 전시공간을 '비우기의 방'으로, 반대로 수고스러운 실감기의 행위가 시간의 축적이라고 하는 비물질적 특성을 전면에 가시화 시켜내면서도 종국에는 물질의 비우기 행위를 잠재하고 있는 공간을 '채우기의 방'으로 각각 설정해 본다.
비우기의 방 : '들어내기'를 통한 물질 내재성의 '드러내기'와 이에 대한 가벼운 배반 ● 우리가 들어서는 전시장 초입에는 마치 나무배의 형상처럼 속을 비워 낸 나무토막들이 드러누워 있다. 나무토막? 그것은 제 자신 안으로 파고 들어간 채 깊은 속살을 드러내고 비워진 작가 정찬부의 나무작품들이다. 나무 몸체의 형태에 부합하는 최소한의 형태를 작가가 표피를 걷어내며 다듬어 내고 다시금 나무의 내부로 시선을 돌려 그 깊이로 잠입하는 과정이 '비우기의 방'안에 가득하다. 작가는 반복되는 끌질로 나무의 나이테 속 층을 제거하고 나무 내면의 깊이를 만들어낸다. 나무에게 있어서, 생장과 발육을 위해 필요했던 나이테 층이라는 세월의 흔적을 비워내고 작가는 수고스러운 노동의 흔적을 빈 공간 안으로 대치해 놓는다. 그런데 작가의 노동흔적이 그가 매우 단순하게 파 놓은 한 덩어리의 구멍 안에 발현된다는 점에서 노동의 시간성 보다는 노동 자체의 흔적과 질료의 물질성이 강하게 드러나게 된다. 파내기, 비우기라는 '흔적 짓기'의 작업 행위가 나무라는 재료에 그 고유의 물성을 돌려준 셈이다. 그러니까 작가의 비워내기 작업은 '재료 들어내기'를 통해서 '재료의 물성 드러내기'를 실행한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작가 정찬부가 비우기 작업의 끝 지점에서 실행하는 역전과 배반의 방법론에 관한 것이다. 작가는 비워내기로 형성된 작품 내부의 표면 위에 희거나 붉은, 선명한 색들을 입혀내면서 작품의 완성을 마무리한다. 색칠하기라는 '채우기' 방법론을 통한 작품 마감은 이전까지 일관되어 온 '비우기'의 관성을 가볍게 배반해 내고 비우기와 채우기 사이의 역전된 의미의 중층성을 강화시켜내는 것이다. 아! 작가는 애당초 물질 내재성을 드러낸 채 '저자의 죽음'에 대한 비난을 받기 싫어했던 것일까? 아니면 수고스럽고 지난한 '비우기'라는 노동행위의 흔적만을 남긴 채 작가가 아무런 표상 없이, 이름도 없이 사라지기를 못내 싫어했던 까닭인지도 모른다. 겹겹의 노동 흔적 위에 산뜻한 표상 남기기는 그런 면에서 작가가 부여하는 인위적인 창조행위로 기능한다. 그것은 마치도 작가의 서명과도 같은 성격을 담보해 낸다. 그런 면에서 지난한 노동을 통한 '비우기'의 방법론이 재료의 내재적 물성을 드러내며 적극적으로 재료 자체에 본성을 돌려주고 작가가 작품 배면으로 숨어 들어간 것이라고 한다면 이를 가볍게 배반하는 색 입히기라는 채우기의 방법론은 재료의 물성자체를 순식간에 무화시켜 '물성 돌려주기'를 재료에 부가하는 작가의 '인위적 창조행위'로 탈바꿈시키면서 작가가 작품 전면에 나선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질문은 여기에 있다. 왜 뒤늦게 비우기의 행위를 다 마친 최종의 시점에 작가가 색칠하기라는 채우기 행위로써 적극적으로 개입하는가 하는데 있다. 작품 완성 후반부에 개입하는 색칠하기는 자연의 내재성을 자연 그 자체로 돌리려는 수고스러운 노동이 드러내는 이전의 현상학적 의미구조를 탈각시켜 내고 한없이 가벼운 이미지로 단순 치환해낸다. 좀 지독한 비유이지만, 이것은 마치도 마크 로드코식의 심각한 절대주의 화면 위에 가벼운 미키마우스의 만화 이미지가 올라선 것과 같은 느낌을 우리에게 던져준다. 순차적인 내러티브 구조를 마지막 장면에서 살짝 비틀어내는 4단 짜리 만화 컷처럼 작가 정찬부는 작품의 마지막 완성시점에서 비우기의 내러티브 구조를 색칠하기의 전략으로 살짝 비틀어낸 셈이다. 그러니까 비워지기 이전의 애초의 재료인 나무가 아니라 전혀 다른 색이라는 매체로 비워낸 공간에 다시 채우기를 실행한 것이다. 작가의 이러한 전략은 질료에 그 물성을 돌려주고자 하는 마음이 애초에 없었음을 보여주려는 상징적 제스처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비우기와 채우기 사이를 비틀기 하는 작가의 전략적 제스처에서 우리가 곰곰이 돌아볼 것이 있다면 물질의 비우기와 채우기 사이의 중층적 의미부여나 그것에 관해 던지는 질문들을 통해서 작가가 미술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의미를 모색하고 있다는 것이다. ● 작가 정찬부가 미술의 근본적 역할과 의미항들에 고민하고 그것에 집착하고 있는 태도는 또 다른 작품에서 보인다. 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 듯한 형상의 기다란 나무작업이 그것이다. 앞서 기술한 작품들에서 보이는 비우기와 채우기 사이의 의미 비틀기의 다른 한 측면은 나무로 대표되는 자연과 이에 부가하는 색이라는 인공의 요소임은 우리가 주지하는 바이다. 이 작품에서는 그것이 더욱 극대화되어 나타나는데 나무라는 매질 고유의 색과 이에 대비되는 칠해진 붉은 색 패턴의 병치가 그것이다. 이것은 '칠해진 보호색과 나무의 자연색 사이에 관계하는 우선순위'에 관한 물음이자 자연의 내재성과 창조된 인공성 사이의 의미항에 관한 심각한 질문이 된다. 둘 사이에 병치와 반복이 실행되고 있는 이 작품은 무엇이 칠해지고 무엇이 자연에 내재하는 것인지에 대한 우리의 고정되고 편협한 시각을 전복해 보려는 작가의 의도가 진하게 담겨져 있다. 작가는 칠해지지 않은 나무의 고유색이 칠해진 색처럼 보일 수도 있음을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자. 칠하기를 통해 채우기가 실행되는 붉은 색, 그 공간과 연접한 나무 고유의 색이 점유하는 공간은 애초에 비움의 공간이 아님에도 채우기의 공간과 연접하게 됨으로써 동시에 비우기 행위를 감당하게 된다. 채우기의 공간 옆에서 의도하지 않는 비우기의 공간을 조성하게 되는 것이다.
채우기의 방 : 꼭꼭 싸매어 숨기기와 그 배면에 잠재된 비우기의 충동 ● 비우기와 채우기의 대립항이 가지고 있는 의미구조는 필자가 명명한 작가의 채우기의 방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작가는 무엇을 그리 싸매어 두고 싶었던 것일까? 무엇인가로 촘촘하게 싸매어 놓은 유충의 형상 혹은 식물의 열매 같은 이미지들이 주렁주렁 전시장 천장으로부터 매달려 있다. 혹은 바닥에 놓여지거나 아예 드러누워 있기도 하다. 이것들은 모두 철망으로 틀을 잡아내고 그 위에 한지를 발라 만든 유기체 형상 위에 녹색, 갈색 등의 털실로 꼼꼼하게 순차적으로 둘러 싸매어 만든 작품들이다. 작품을 만지거나 작가에게 말을 건네어 물어보기 전에는 실타래 안으로 숨어 들어간 재료에 대해서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채우기'의 문제가 여기서는 감기, 덮기, 싸기, 감추기 혹은 숨기기의 형태로 구현된 셈이다. 단지 재료만을 숨기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비우기의 방에서 보여진 작품들이 '재료의 들어내기'를 통해 '재료의 물성을 드러내기'하면서 곧 이어 가벼운 배반형식으로 '채우기'를 실행했다고 한다면, 이번 채우기의 방안에 있는 작품들은 '재료의 감추기'를 통해 '재료의 물성을 묶어두기'하고 곧 이어 잠재태의 형식으로 '비우기'의 충동을 실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잠재태의 비우기란 무엇인가? 지금은 충만해 있지만 가능태로만 존재하고 이것이 훗날 실제의 양상으로 비워질 것에 대한 예측을 말한다. ● 그도 그럴 것이 실의 군집이 결박해 놓은 유기체적 형상들은 모두 생명을 품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것은 꿈틀대는 원형생물, 아니면 연체동물의 촉수 같기도 하며 이미 성장한 식물의 줄기덩이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마도 그의 작품의 맥락에서 우리의 상상작용이 의미가 있다면, 그의 작품이 마치 성충이 되기를 꿈꾸며 유충이 만들어 놓고 안거한 번데기 같기도 하며 찬란한 꽃을 세상에 틔어내기 직전의 물오른 꽃봉오리 같기도 한 인상을 받고 있을 때 일 것이다. 잠재태의 비우기는 대상을 미래의 생명력 혹은 미래의 움직임을 소유한 가능체로 바라보는 태도에서 생성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상한다. 저 싸기, 감기, 덮기의 공간 안에 넉넉히 숨어 은거하고 있는 생명체의 시작을... 이내 그 생명체가 그 안에서 씨앗을 터뜨리거나 화려한 나비를 날려보낼 것 같은... 그래서 그 은거의 공간을 가볍게 비워낼 것이라는... 혹여 그런 상상이 아니라면 우리는 마치 추위에 떨며 생장을 멈춘 겨울나무 위에 지푸라기 옷을 입히는 정원사의 마음으로 실을 감아내는 작가의 마음을 상상해 볼 수도 있을 터이다. 기실 그것이 겨울나무에 기생하는 해충들을 모아 어느 예정된 봄날을 기해 그들을 박멸해 버리기 위한 기능적 방편임에도 말이다. ● 우리가 정찬부의 '채우기의 방'에서 이러한 잠재된 비우기의 충동이나 보살핌과 치유의 의미를 길어 올릴 수 있는 것은 그의 꼭꼭 싸매어 숨기기, 즉 은폐의 전략이 노정한 '보이지 않음'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앞서 '비우기의 방'에서 보는 것에 대한 미술의 시각화의 문제를 건드리며 미술의 본질에 대해서 질문하고 또 질문하던 작가의 모습을 상기한다면, 이 채우기의 방에서는 보는 것 이면의 문제를 건드리며 미술의 본질에 대해서 질문하는 작가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이내 작가가 가담하는 미술행위의 배면을 묻고 있는 것으로 확장된다.
내 안에 짓다 - 노동의 수고스러움, 그 미술행위와 미적 가치의 관계항 ● 작가 정찬부는 이번 전시의 테마를 '내 안에 짓다'라고 정했다. 그의 미술행위를 '짓다'라고 정의한 셈이다. 나무 깎아내기, 비우기나 실 감기, 채우기라는 창작 방법론은 그의 '짓다'라는 표현 안에 응축된다. '짓다'가 사전적 의미로 '재료를 들여서 만들다'임을 생각한다면 그의 미술행위는 여전히 재료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길고도 수고스러운 노동을 투여해서 재료를 비우는 행위나 재료로 채우는 행위를 통해 그가 미술본질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할 때 우리는 작가의 미술행위 배면에서 발현되는 미적 가치에 대해서 주목한다. 그것은 행위의 이면에서 발현되는 또 다른 행위의 흔적을 찾는 기쁨이며 그 시각적 결과물에서 결과물의 배면의 문제를 생각하게 하는 의미심장함이다. 작가 정찬부가 행하는 '짓기' (드러내기와 감추기)의 배면에서 우리가 찾아내는 미술의 의미나 미적 가치는 시간투여가 부여하는 노동력과 이를 통한 재료와 물질의 내재성 구현으로부터 확장되는 '내 안에 짓기'라고 하는 심리적 차원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의 작업에서 너와 나 식의 '대비의 관계항'에 관해 티격태격하면서도 '집짓기' 식의 물질적 차원으로부터 시작해서 '글짓기'나 '미소짓기' 식의 시적 감흥의 비물질적 차원으로 확장되는 그의 작업을 바라본다는 것은 하나의 기쁨이다. ■ 김성호
Vol.20041125b | 정찬부 조각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