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4_1124_수요일_06:00pm
공평아트센터 서울 종로구 공평동 5-1번지 Tel. 02_733_9512
그의 손끝에는 먹이나 안료를 머금은 붓 대신 향불이 한지 위에 하나 둘 구멍을 내면서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다. 너무 오랫동안 대고 있어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금방 손을 떼도 안 된다. 향불에 뚫린 무수한 구멍의 크기나 그을린 색깔들은 그가 그려놓은 밑그림을 따라 수묵화에서 말하는 일획의 기법과 같이 움직여야만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는 것이다. ● 간혹 채색화의 작업에서 색점을 찍어 밑그림을 그리는 작품들도 있다. 그러나 한지에 향불을 대고 하나 둘 구멍을 내어 완성하는 그의 작업은 점을 찍어 밑그림을 그리는 작업과는 임하는 자세가 다르다. 그 순간들은 욕심을 비우고 부단히 인내하는 과정의 시간들이라고 작가는 담담히 말하고 있지만 그림 한 점을 완성하기 위한 그 숫자들을 헤아려보면 그 순간들을 짐작해 볼 수 있다.
향내는 부정(不淨)을 제거하고 정신을 맑게 함으로써 신명(神明)과 통한다고 하여 중국이나 한국에서 모든 제사 의식에 맨 먼저 행하는 의식이 분향(焚香)이다. 그는 이러한 의미를 지닌 향불로 한지를 태우면서 무엇을 정화시키고자 하는 것인가. 한지는 그 자신이 한국화를 배우는 데에 처음 접한 재료이며, 지금도 작업을 하는 데에 있어서 빠져서는 안 되는 주된 재료이다. 그것은 그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산물로써 그의 과거이며 미래인 것이다. ● 한지를 태우면서 하나 둘 구멍을 내는 것은 과거에 한지 위에 품었던 생각들을 하나 둘 지우는 것과 같은 행위이며, 미래로 투사시킨 계획들이 하나 둘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한지를 태워내며 그 텅 빈 공간들 속으로 사라져가게 하는 그의 지난 시간들의 기억은 무엇이었는가.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자신과 같다면 그것은 아마도 끔찍한 일일 것이다. 매일 자기를 바라보고 자기와 이야기해야 하기에. 불행 중 다행이랄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어도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갖고 사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심지어 자기를 길러준 부모나 자기가 낳은 자식일지라도.
하지만 제각기 다른 생각을 지닌 사람들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반대로 가슴 한편에 늘 외로움을 지니고 살아가야 하는 숙명을 타고나는 것이다. 그의 3회 개인전의 「편-중인」은 문명의 편리함을 누리고 있는 도심 속의 인물들이 그려져 있다. 그렇지만 그 인물들은 산중에서 길을 잃고 홀로 있는 듯한 모습만이 덩그러니 놓여져 있다. 그들은 그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늘상 핸드폰으로 전화를 하거나,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의 주인공처럼 강가에서 낚시대를 드리우며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 한지 위에서 반짝이는 호분은 화려한 차나 정장을 차려입은 인물들이 표현되어 있고 먹을 통해 그 이면에 인물들의 내면의 심상이 흐르고 있다. ● 4회의 개인전은 내팽개쳐진 드러누운 곰 인형이 전시의 성격을 대변하고 있다. 「갈래길」, 「건널목」, 「모자」, 「휴식」, 「지켜보기」, 「빈자리」, 그리고 가족과 손님들의 초상화들은 "이전의 작업들과 비교해 본다면 재료의 물성 자체가 지니고 있는 특성들은 상대적으로 약화된 대신 작가의 주관적인 조형의지가 더욱 여실하게 드러난 경우라 할 것이다. 빠르고 활기찬 필선의 운영에 대비되는 인물들은 형상의 묘사가 거의 생략된 여백과도 같은 상태이다." 김상철 공평아트센터 관장의 이야기처럼 바쁜 일상의 모습이 선의 운영을 통해, 그리고 인물들의 내면의 심상은 얼굴의 표정과 그 시선 위에서 교차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심상은 5회 개인전에서 재료가 지닌 물성의 표현을 통해 더욱 더 심화시키고 있다. 60평생을 함께 살아왔지만 무언가 쓸쓸한 노부부의 모습, 운동장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제각각의 모습들 뒤로 수형수의 복장과도 같은 차가운 청색이 그 여백을 에워싸고 있다. 작가가 바라보는 일상의 모습은 우리 자신들의 모습이지만, 그것은 반대로 작가의 자신의 심상을 투영한 세계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한 지위에 쌓이는 채색의 두께만큼 그 자신의 생각의 무게도 쌓였을지도 모른다. ● 그리고 그는 그러한 생각을 비워내기 위해 분향을 하듯이 한지에 하나 둘 구멍을 내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태워내어 표현된 도심 속의 모습들인 「구갈 2 지구」, 「서울행 1, 2, 3」, 「멈춘자리 - 바람 1, 2, 3」에서 메마르거나 외로움의 인상들은 사라지고 낙엽과 같은 채색으로 도심의 빌딩과 가로등이 온통 뒤덮이고 그 옆의 가로수들이 바람에 살짝 흔들리면서 가을날의 서정과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돌아오는 귀가 길의 정경들이 멀리서 바라보는 듯한 모습들로 잔잔하게 비춰지고 있다.
화면에는 근경에서 바라보는 주름진 인물들의 표정은 화면에서 점차 사라지고 그 자리에 「구갈 2 지구」, 「구갈리 401번지」에서 보듯이 그 자신이 살아가는 주위의 환경들이 하나의 색채로 화면을 대신하고, 인물들의 표정 또한 영화의 페이드아웃해 가는 장면처럼 보이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자신을 중심에서 바라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타인의 시각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자신과 주위의 환경을 바라본다는 것을 의미하며, 사물의 겉모습만이 아닌 그 이면을 통해 점차 자신의 생각을 들여다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을 비우고 자연의 그대로의 모습을, 사물의 그대로의 모습을 점차 모사해가는 간다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 아직은 사물과 일체가 된 모습보다는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정경들이 잔잔하게 비춰지지만, 가을날에 떨어질 나뭇잎을 생각하며 향불을 가지고 하나 둘 구멍을 뚫었다는 그는 그 자신 속에서 소멸시켜야 하는 것은 무엇이며, 다시 그 속에서 우리의 심상들이 살아나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번 전시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 조관용
Vol.20041124a | 이길우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