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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4_1124_수요일_05:00pm
예술디자인갤러리 토포하우스(구 삼정아트스페이스)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4번지 Tel. 02_722_9883
1. 이상록이 제작한 그동안의 판화를 보면, 이미지를 찍어낸다는 프레스의 공정 이외에는 사실상 판화로 한정하기가 어려운 점이 있다. 특히 전통적인 지지대로 여겨져 왔던 종이를 여러 다양한 매체로 대신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예컨대 자잘한 꽃문양이나 물 땡땡이 문양, 그리고 기하학적이고 규칙적인 줄무늬가 프린트된 기성의 천과 함께, 투명 아크릴 판이나 홀로그램 그리고 심지어는 거울마저도 지지대의 한 형태로 도입하고 있는 것이다. 이 소재들은 종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 자체의 물질성이 강한 것들로서, 그 표면에 프린트된 이미지는 판화라기보다는 일종의 자족적인 오브제의 한 형태로 보인다. 그리고 이렇게 제작된 일련의 작품들은 전통적인 판화에서 요구되는 에디션보다는 멀티플의 개념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일품 회화와 마찬가지의 오리지널리티가 강한 편이고, 이에 대해서는 전통적인 판화 대신에 이를테면 입체판화나 설치판화와 같은 보다 확장된 판화 개념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 이로써 작가에게서 판화는 그 자체 필요충분조건이기보다는 자신만의 조형언어를 표현하기 위해서 단지 판법을 도입할 뿐이라는 보다 유연한 자세가 발견된다. 말하자면 판화는 자신의 조형언어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전달하기 위한 적절한 수단이고 매체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전통적인 판화 개념을 확장시키는 적극적인 계기로 작용하게 된다. 이처럼 작가는 판화 고유의 장르적 특수성을 강조하기보다는 조형언어라는 보다 큰 보편성의 틀 속에다가 판화의 개념을 풀어놓는다. 근작에서도 역시 기성의 천이나 홀로그램 그리고 투명 아크릴 판을 도입하고 있기는 한데, 전작에서만큼 전면적이지는 않다. 부분적으로만 도입된 그것들은 오히려 일정한 장식 효과와 대비 효과 그리고 조형 효과를 더 강화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한편, 이상록의 근작에서 전면적으로 도입되고 있는 것은 부식판이 완결된 이미지의 한 형태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알려진 바와 같이 부식판은 최종적인 판화를 얻기 위한 과정에서 비롯된 것인 만큼 전통적인 판화 개념으로는 범주화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하지만 부식판 역시 상황에 따라서 에디션이든 멀티플이든 그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판화의 요구조건으로부터 동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를 통해서 작가가 판화의 전통적인 개념을 확장시키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 특이한 점은 작가가 판화의 확장된 한 형태로서 제시하고 있는 부식판에 적용된 에칭의 깊이가 현저하게 얇게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판화 고유의 미세한 요철이 느껴지긴 하지만, 프린트된 이미지처럼 그 층이 얇다는 것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작가의 작업을 프린트된 이미지와 대개는 그 깊이가 깊게 부식되기 마련인 부식판과의 경계에다가, 평면과 입체와의 경계에다가, 이미지와 오브제와의 경계에다가 위치 짓게 한다. 그리고 그 애매한 경계로부터 비롯되는 일말의 긴장감이 이상록의 근작을 특징짓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 표면에다 어떠한 컬러도 적용하지 않음으로써 단지 회색조의 모노톤으로만 드러나 보이는 부식판 자체의 무미건조한 표정이 작가의 근작으로 하여금 일종의 중성적이고 정신적인, 금욕적이고 절제된 표현을 낳게 한다.
2. 작가는 근작에서 기성의 천과 프린트된 이미지 그리고 부식판을 혼용하는 방법으로써 기왕의 작업에 적용된 판화의 확장 개념을 또 한번 변주한다. 대개는 둘 이상의 판을 시리즈로 제작하여 일정한 의미론적 대비를 강조하는 편이고, 이를 보여주는 방식에 있어서도 마치 모자이크를 연상시키는 일종의 모음 그림의 형식을 차용하고 있다. 부식판으로만 된 연작을 묶어내기도 하고, 기성의 천에다가 프린트한 이미지와 부식판의 이미지를 대비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이때의 대비는 컬러풀한 화면과 모노톤의 화면이 대비되는 것으로 인해 더 강화된다. ● 또한 부식판의 표면에다가 일정한 사이 공간을 두고 투명 아크릴판(그 자체 액자의 대용으로 사용된)을 중첩시키고 있는데, 이때 아크릴판의 표면엔 대개 기하학적이고 규칙적인 선이 새겨져 있다. 이는 그 사이 공간으로 인해 화면에 일종의 그림자의 형태를 드리우게 된다. 이로써 그림자는 부식 판의 이미지와 기성의 천에 프린트된 이미지와 함께 이미지를 다시 변주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미지를 다중화하고 다층화한 것이다. 그리고 아크릴 판의 표면에 각인된 선분들이 기성의 천에 프린트된 줄무늬와 대비되는 것 역시 이런 다중화면에 일조를 더하고 있는 셈이다. 각각의 판에서는 오브제 고유의 물질성이 강하게 환기되는 편이고, 이를 시리즈로 묶어서 배열하는 전시 방식에서는 공간을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설치판화의 형식이 두드러져 보인다. ● 의미론적으로 볼 때, 이상록의 전작은 방파제를 축조할 때 사용되는 콘크리트 구조물인 일명 테트라포드(tetrapod)를 등장시킴으로써 존재에 대한 상징적 의미를 보여주었다. 그 형태가 기하학적이고 정형화된 것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이로써 상징되는 존재는 일종의 질서 의식을 암시한 것이었으며, 혼돈으로 가득한 세상과는 대비되는 작가의 자의식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처럼 작가의 자의식(세계를 인위적인 질서로 재편하려는)을 상징하는 테트라포드는 근작에서도 여전히 작가를 대리해주고 있다. 한편, 근작에서의 테트라포드는 작가의 자의식과 함께 문명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더해져 있다. 사실상 근작에서의 주제는 환경이다. 이는 자연 환경을 소재로 한 이미지와 문명의 산물을 상징하는 테트라포드가 대비 혹은 조화되는 형태로 나타난다. 이를테면 산불 현장을 소재로 한 이미지와 테트라포드를 병치시킨 작업에서 자연은 문명과 대비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자연의 이미지와 테트라포드를 병치시킨 또 다른 작업에서 자연은 문명과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나타난다. 부연하자면, 작가의 근작은 자연과 문명과의 대비를 테마로 하고 있으며, 이 이질적인 상황들을 환경이라는 전제 아래 조화시키려는 의지로 나타나 있다.
작가는 자연 이미지를 소재로 한 부식 판에다가 「피안 가는 길목」이라고 명명했다. 여기서 피안(彼岸)은 불교에서 유래한 용어로서 이승에서의 번뇌를 벗어난 해탈의, 열반의 경지를 말한다. 따라서 피안은 그 자체 비현실적이고 관념적인 이미지로 나타나게 되고, 이는 그대로 그 실체가 모호한 부식판의 모노톤의 화면과도 부합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작가의 근작에는 불교적인 세계관이 그 밑에 깔려 있으며, 이는 근작의 주제인 환경 친화적인 세계관과도 통하는 것이다. 그리고 환경과의 올바른 관계를 복원하기 위한 제 일 원리로서 욕심을 버리는 삶의 실천이 요청된다. 그런가하면 불교적 세계관은 프린트된 이미지의 한 형태로 나타난 크고 작은 점들에도 반영돼 있다. 여기서 점은 공(空)을 의미하며, 또한 공은 그 자체 빈 공간이기보다는 마치 한국화에서의 여백과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의미들로 가득한 충만 공간을 암시한다. ● 그리고 가로수를 소재로 하여 사계(四季)를 형상화한 사면화(四面畵)에서는 자연의 순환 원리가 삶의 원리가 돼야함을 주지시킨다. 이외에도 일종의 미시세계를 보여주는 작품으로서, 기껏해야 손가락만한 크기의 작은 풀꽃을 크게 확대 복사한 이미지를 전사하고 부식한 삼면화를 통해 생로병사(生老病死)를 은유하기도 한다. 시들거나 말라죽은 풀꽃의 이미지로부터 인생무상의 메시지가 전해져온다. 그런가하면 갈대나 이름 없는 들풀을 소재로 한 또 다른 부식 판에 나타난 이미지는 환경과 생태에 대한 메시지를 환기시켜주는가 하면, 마치 농담이 엷은 담묵(淡墨)으로 그려진 수묵화를 연상시킨다. 이는 은근한 맛이 돋보이는 전통 산수화에서의 미적 감수성이나 자연관과도 통한다. ● 또한 이상록의 근작의 특징 중의 하나는 전통적인 이미지와 형식을 차용하고 각색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전통적인 산수화 혹은 화조화에서의 주요 이미지를 차용하는 한편, 형식적으로도 전통적인 두루마리나 족자의 형식을 차용하고 있다. 이때 단순히 이미지를 차용하기보다는 이를 자의적이고 임의적으로 재편집하고 재구성한다. 이들 작품으로부터는 마치 시간의 저편으로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존재의 덧없음과 비현실성이 느껴진다. 그리고 족자의 형식을 차용한 것에 대해서는 판화의 형식 파괴와 함께, 무엇보다도 전통 속에서 현대판화의 가능성을 찾아보려는 작가의 노력이 느껴진다. 어쩌면 전통은 단지 시간적으로만 과거에 속한 것일 뿐, 이는 답보 상태에 있는 현대회화 혹은 판화에 대해 그 길을 터주는 이미지의 보고일지도 모를 일이다. ● 이외에도 작가의 여타의 작품들을 일별해보면, 그 표면을 짙은 주황으로, 그리고 짙은 노랑으로 처리한 시리즈를 볼 수 있다. 이는 알루미늄 판면에다가 감광액을 바르고, 여기에다가 작은 민들레를 확대시킨 이미지를 투영하여 인화해낸 것이다. 여기서 사진 이미지에다가 부분적으로 개작한 흔적을 동반함으로써 복사 혹은 전사 이미지에서 흔히 느껴지는 인공적인 분위기 대신 회화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 ● 이로써 이상록의 근작들은 종이에 찍힌 판화 대신 판화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부식판을 판화의 한 형식으로서 제시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전통으로부터 주요 이미지와 형식을 차용하고 각색하고 있다는 점이 그 주요 특징일 것이다. 또한 전작에 비해 환경에 대한 주제가 두드러져 보이는데, 사실 이런 문제의식은 근작에서만의 현상이기보다는 작가의 전작(全作)을 지배하는 멘탈리티(mentality)로 봐야할 것이다. 이로부터 이름 없는 것들, 한낱 미물에 지나지 않은 것들, 잊혀져 가는 것들에 대한 아득한 향수가 느껴진다. 그리고 이러한 향수에서는 일종의 세대적 감수성을 자신의 작업에 투영하려는 작가의 의식적인 행위 또는 자기 의미부여의 한 형태가 느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부식판에서는 일종의 대안적인 판화의 한 형태를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 고충환
Vol.20041122b | 이상록 판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