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획의 자연

갤러리 도올 기획 이은숙 회화展   2004_1117 ▶ 2004_1205

이은숙_371_종이에 아크릴_각 25×18cm_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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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4_1117_수요일_05:00pm

갤러리 도올 서울 종로구 팔판동 27-6번지 Tel. 02_739_1405

반복과 차연(差延)으로 그림 그리기 ● 이은숙 작업의 특징은 시시각각 유전(流轉)하는 대상에 대한 느낌을 붓의 강약, 빠름과 느림, 건습의 변화 등 수묵과 붓의 자유로운 표현에 중점을 두고 은밀한 내적 사유의 변화를 드러낸다는데 있다. ● 기실 그의 작업에서 보이는 형식은 매우 간단하다. 화면의 형상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반복'으로서의 붓질과 그 붓질의 다양한 '차연(差延, differance)'으로 나타나는데, 이러한 반복과 차연의 구조는 끊임없는 그의 실존에 대한 형상언어로 표현된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위계적이고, 주체와 객체에 의해 구분되는 특정대상의 보편성으로써 기호학적인 원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주체도 객체도 또 이미 정해져 있는 길도 없는, 들뢰즈의 표현을 빌어 말하면 유목적 사유의 전형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가 그리는 대상은 분명 존재하지만, 그의 형상에는 중심적 기호체계로서 객관적 대상(他者)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은숙_상승Ⅰ_한지에 먹_74×74cm_2004
이은숙_하강Ⅰ_한지에 먹_74×74cm_2004

예를 들면, 그의 그림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모티브는 자신의 작업실에 있는 마른 고목나무다. 이은숙은 항상 자신과 함께하는 고목나무를 수묵의 필획을 통해 그린다. 이때 고목나무는 어떤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대상이 아니라, 그저 이은숙의 주위에 있는 수많은 대상중의 하나이다. 다만 우연히 또는 그 자리에 있음으로써 필연적으로 이은숙과 관계를 맺은 대상이다. 그러므로 이은숙의 작업에서 고목나무는 다른 대상으로 대체되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대상을 '그린다'라는 행위이며, 이은숙은 이 행위를 통하여 그의 실존 문제를 재인식한다.

이은숙_부유_한지에 수묵_120×120cm_2004

이은숙은 고목나무를 그리지만, 이 고목나무는 객체로서의 존재가 아니므로 '고목나무'라는 의미, 즉 가치를 지닌 대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작업에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고목나무라는 대상이 아니라, 고목나무를 그리는 필획의 움직임이다. 그의 필획은 고목나무의 마른 가지를 따라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순간 순간의 세계를 만들어 나간다. 이은숙이 획을 그어나가는 그 순간, 그것은 그의 삶의 전부인 총체적 세계이며, 획과 획은 다양한 연결로와 교통망을 통해 평등하게, 또 계속 새로운 사유를 함께 만들어나가며 여기저기서 즐거움을 창조한다. 그 형상은 중심도, 주체도, 위계도 없는 사유의 결과이다. ● 실제로 이은숙은 화면에 수없이 많은 선을 긋고, 그 획과 획이 만들어 놓은 형상을 자유롭게 트리밍(trimming) 한다. 화면의 중심이 없는 수많은 필획은 거대한 네트(net)로 짜여져 있으므로 어느 곳에서 트리밍을 하든, 자유로운 형상을 얻을 수 있다. 수많은 '비질서들'의 접속들이 새로운 형상을 창조하는 것이다.

이은숙_사유하는 나무_한지에 먹_140×100cm_2004

들뢰즈와 데리다의 언어로 이해하면 매우 현대적으로 보이는 그의 이러한 그림에 대한 인식은 사실 지금으로부터 거의 400여 년 전 명말청초 새롭게 나타났던 동양의 전통적 그림에 대한 이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당시 모든 사람에게는 '양지(良知)'가 있으며, '양지'의 발현으로 본질에 대한 파악과 그 실천이 가능하다는 양명심학에 많은 영향을 받았던 석도나 양주팔괴 같은 개성주의 화가들은, 그림이란 주관이나 객관의 융합을 통한 흥취나 '의상(意象)'의 표현이며, 대상에 속해 있는 '이(理)'만을, 아니면 대상과의 관계를 떠난 순수한 내면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정서의 반영이라고 이해했다. ● 필획을 통한 내면적 정서의 표현, 반복과 차연(差延)으로 그림 그리기, 이은숙의 전통에 대한 이해와 현대적 해석능력을 보여준다. ■ 김백균

Vol.20041120a | 이은숙 회화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