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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락 사진展   2004_1101 ▶ 2004_1113

여락_circle_컬러인화_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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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4_1101_월요일_06:00pm

그린포토갤러리 서울 중구 충무로 2가 52-10번지 고려빌딩 B1 Tel. 02_2269_2613

타자의 주검을 통한 공감의 미학 ● 진혼(鎭魂), 망자의 넋을 달래다. ● 방바닥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면 달처럼 둥근 전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등의 가운데 부분을 자세히 보면 거뭇거뭇한 점들이 보인다. 그것들 대개는 흐릿하지만 개중에는 꽤 크고 진한 점들도 있다. 저 죽는 줄도 모르고 빛을 찾아 날아든 하루살이와 나방들이다. 저들의 주검을 맞아들인 저 등은 그러므로 저들의 무덤인 셈이다. 그래서인가 빛을 향해 날아든 그것들의 무질서한 유영이 마치 죽음을 향해 맹렬히 질주하는 것처럼 보이는가 하면, 축제와 향연으로써 죽음을 맞아들이는 것처럼도 보인다. 저들은 왜 죽음으로 유인하는 빛을 향해 저토록 맹목적으로 나아가는 것일까. 저들은 빛이 다름 아닌 죽음의 메신저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저들로 하여금 빛을 향해 모여들게 하는 동기는 필연일까 우연일까. 본성일까 관성일까.

여락_circle_컬러인화_2004
여락_circle_컬러인화_2004

차를 타고 가다 보면 도로 위에 죽어 있는 고양이나 개의 주검들을 곧잘 보게 된다. 인간과 더불어 살거나 인간 가까이 사는 탓에 더 자주 더 쉽게 목격되는 주검들이다. 거의 인간화되리만치 인간과 삶을 함께 해온 저들의 잦은 죽음은 그러므로 모순이고 아이러니다. 저들의 죽음은 나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저들의 죽음은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모든 죽음이 경이롭다는 말은 진실일까. 만약 누군가가 저들의 죽음을 낱낱이 기록한다면, 저들의 주검을 일일이 수거하여 사람이 죽을 때와 마찬가지로 망자를 달래기 위한 장례의식을 치러주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모든 죽음이 경이롭다는 말은 다름 아닌 그의 몫일 것이다. 단지 하루살이의 죽음에서 나의 죽음을 보고, 고양이와 개의 죽음에서 나의 삶을 보고, 타자의 죽음에서 내가 존재하는 이유를 보는 공감의 소유자에게만 모든 죽! 음이 경이롭다. ● 법정 스님의 수필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스님이 마련해준 헌식(獻食)을 꼬박꼬박 먹어치워서 꽤 면을 익힌 큰 쥐 한 마리가 있었다. 어느 날 스님이 작정하고 그 쥐에게 말했다. '이제 청정한 수도장에서 나와 같이 지낸 이 인연으로 그 탈을 벗어버리고 내생에는 좋은 몸 받아 해탈을 하거라' 라고. 기이하게도 다음날 그 쥐는 헌식돌 아래에 죽어 있었다. 쥐가 스님의 말을 알아들은 것일까. 여하튼 스님은 그 주검을 수습하여 염불을 하고 그 자리에 묻어주었다는 이야기다. 마치 우화와도 같은 이 이야기는 모든 죽음, 삶, 존재가 경이롭다는 공감의 진리를 그 속에 내장하고 있다. 주검들을 수습하고, 장사지내고, 그 과정을 낱낱이 기록한 여락의 작업은 이런 타자의 죽음을 매개로 한 공감의 존재론적 인식에 그 맥이 닿아 있다.

여락_circle_컬러인화_2004
여락_circle_컬러인화_2004

화장(火葬), 하늘에게 넋을 되돌려주다. ● 여락은 도로에서 차에 치여 죽은 짐승들의 사체를 수습한다. 그리고 마른 잡목들을 모으고, 한적한 자연의 한 장소를 정하여 잡목들을 쌓는다. 그리고 잡목 위에다가 순백의 하얀 종이나 흰 천으로 수습해온 짐승의 사체를 올려놓고 태운다. 잡목과 함께 사체가 다 타고나면 재만 남겨지는데, 그 재를 뒤적여 미처 산화하지 못한 잔뼈들을 수습한다. 화장을 하는 것이다. ● 작가는 이 모든 일들을 직접 수행하고 그 과정을 낱낱이 사진으로 기록한다. 이름 모를 짐승들의 주검을 수습하고 화장하고 기록하는 이 일련의 과정을 담은 사진들 속에는 어김없이 그가 들어 있다. 사진 속에서 그와 함께 있는 짐승의 사체는 한갓 미물의 주검이 아니라, 각각 짐승과 사람의 허울을 벗어 던진 존재와 존재가 만나고 있는 것이다. 개념 이전의 존재, 의미 이전의 존재와 존재가 만나고 있는 것이다. 산 자와 죽은 자, 존재와 존재가 만나는 이 관계 속에서 작가는 존재의 주검을 증언하는 목격자로서, 그리고 존재의 주검을 위로하는 무당으로서 등장한다. 레비나스(E.Levinas)는 타자의 상처를 통해 자신을 보는데,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공감이다. 나와 너는 보이지 않는 공감의 끈으로 연속돼 있고, 우주는 들리지 않는 타자들의 목소리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작가는 그 ! 목소리를 듣는다. 존재의 주검을 추스르는 여락의 작업은 다름 아닌 이런 공감의 논리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 또한 화장은 존재가 변하고, 정체성이 변하고, 차원이 바뀌는 연금술적인 장례방식이다. 그러므로 정화의식과 통과의례를 가장 원형적인 모습으로 보존하고 있는 장례방식이다. 화장을 통해서 유기체는 불과 공기가 만나는 화학작용 속으로 산화하고, 한줌의 재로 남겨진다. 그 화학작용의 한가운데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남겨진 재와 함께 육신의 탈을 벗어버린 순수한 존재, 영적인 존재를 암시한다. 그러므로 연기와 재는 인간의 인식으로는 붙잡을 수 없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옮아간 존재의 한 형태인 것으로서, 이를 그저 육신의 흔적으로만 치부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짐승의 사체를 화장하는 작가의 행위는 존재가 원래 유래한 하늘로 그 넋을 되돌려주는 주술적 행위이며, 이때 사체를 화장한 자리는 그대로 세계의 중심과 세계의 배꼽을, 그리고 성소(신성한 장소)를 상징한다.

여락_circle_컬러인화_2004
여락_circle_컬러인화_2004

토장(土葬), 땅에게 넋을 되돌려주다. ● 작가는 짐승의 사체를 수습하여 화장하기도 하고, 땅에 묻어주기도 한다. 여기서 화장이 영적인 장례방식이라면, 토장은 인간적인 장례방식이다. 화장이 일순간에 존재의 전이가 이뤄지는 고도로 추상적인 장례방식이라면, 토장은 여전히 몸의 탈을 벗어나지 못한 물질적인 장례방식이다. 토장에서 유기체의 몸은 썩고 부패하며, 헤아릴 수도 없는 낱낱의 조각들로 해체되고, 마침내는 순수한 유기물로 전화된다. 그리고 그 자체 또 다른 생명체로 연장된다는 점에서 토장은 삶과 죽음이 서로 맞물려 있는 자연의 순환원리를 그 속에다가 내장하고 있다. ● 여락은 흰 천에다가 짐승들의 사체를 수습한 이후에 대개는 큰 나무 몇 그루가 있는 곳에 터를 잡아서 그 사체를 묻어준다. 여기서 그 터를 지키고 있는 나무는 세계수(世界樹, 또 다른 세계의 중심을 상징하는)를 암시한다. 실제로 작가는 그 곳이 다름 아닌 세계의 중심임을 암시하기라도 하듯 그 터 위에다가 가상의 둥근 원형을 그리고, 그 원형의 가장자리를 따라 짐승들의 사체를 묻어준다(이런 가상의 원형은 나무보다는 밭을 배경으로 한 작업에 더 뚜렷하게 반영돼 있다). 짐승들의 넋을 그가 유래한 세계의 기원, 세계의 시점에다가 되돌려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주검들 위로 시간이 흘러간다. 무성하게 자란 풀들이 주검들 위에 이불처럼 덮이고, 장마 때 그 터는 물길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다시 드러난 그 터 위로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차양을 치고 자리를 편다. 이처럼 땅에 산 자의 시간과 죽은 자의 시간이 서로의 존재를 모른 채 하나의 층위에서 만난다. ● 또한 작가는 갈아엎은 밭에다가도 역시 가상의 원형을 그리고, 그 가장자리를 따라 짐승들의 사체를 묻어준다. 그리고 그 밭 위로 채소들이 자라고, 사람들에 의해 그 채소들이 수확되고, 밭에는 또 다른 골이 만들어진다. 이 일련의 과정은 모든 생명이 타자의 죽음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존재의 진리를 거의 직설적으로 암시한다. 그렇게 죽음은 시간과 더불어 재차 삶으로 순환하고, 이로써 삶과 죽음이 물려 있다는 자연의 순환원리를 암시해준다. 토장은 몸을 입고 태어난 모든 존재가 비롯된 땅으로 그 넋을 되돌려준다.

여락_circle_컬러인화_2004
여락_circle_컬러인화_50×96cm_2004

풍장(風葬), 바람에게 넋을 되돌려주다. ● 또한 작가는 흰 천으로 짐승들의 사체를 수습하여 이를 자연 상태 그대로 방치하기도 한다. 이는 말하자면 풍장의 한 형태로서, 장례방법 중 가장 자연의 속성에 가까운 것이다. 어떠한 인위적인 과정도 수반하지 않는 이 장례방식에서는 존재를 낳은 것도 자연이요 존재를 거둬들이는 것도 자연이다. 유기체가 바람에 자신의 몸을 맡겨 풍화하게 하는 것이다. ● 여락은 흰 천 대신에 꽤 두툼한 순모(이불 속)를 가지고 사체를 수습하기도 하는데, 이때 그 표면에는 유기체의 주검이 부패되고, 해체되고, 마침내는 최소한의 흔적으로만 남는 점진적인 과정이 기록돼 있다. 그리고 그 와중에 구더기가 태어난다. 적당한 쿠션과 따뜻한 온도, 그리고 여기에다가 유기체의 자양분마저 더해져서 구더기가 생겨나기에는 최적의 조건이 갖춰진 셈이다. 유기체의 사체에 기생하는 구더기는 곧 주검으로부터 태어난 종족이다. 주검으로부터 곧장 기어 나와 자기의 존재를 완성하는 구더기는 그러므로 모든 인과의 법칙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고도로 진화된 종족이다. ● 작가는 이렇게 생겨난 구더기들을 수습하여 먹물에 담갔다가 끄집어낸 후, 이를 판화지 에다가 흩어놓고 그 표면 위를 지나가게 한다. 이 방식으로써 작가는 화면 안쪽으로부터 화면의 가장자리를 향해 연이어진 비정형의 드로잉을 얻는다. 이렇게 얻어진 일련의 평면작업들, 곧 사체의 흔적을 각인하고 있는 천 조각이나 구더기가 그린 드로잉에서는 일말의 서정적인 아우라마저 느껴진다. 산화하거나 풍화한 주검의 자리에는 얼룩과 흔적만이 남아 원래의 존재를 상기시킨다. 그리고 존재가 지나가면서 그려낸 길은 그대로 추상적인 회화를 닮았다. ● 그런가하면 작가는 짐승들의 사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털이나 살점 그리고 피와 같은 그 주검의 일부를 따로 채집해둔다. 일종의 존재의 증명으로도 볼 수 있는 이 행위는 짐승의 사체를 찍은 사진 속에 어김없이 작가 자신을 등장시키는 행위와도 통하는 것이다(말하자면 내가 거기에 있었다는 식으로). 작가의 작업을 단순히 짐승의 사체를 수습하고 채집하는 과정을 사진으로써 기록한 것으로 본다면 유사 생물학이나 박물학의 한 실천으로 볼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작가의 작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죽음일 것이다. 그리고 이는 그대로 모든 존재에 대한 생명에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 고충환

Vol.20041104b | 여락 사진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