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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작가 송영규_박창환_이지연_황재연_임병국
에스파스 다빈치 서울 마포구 서교동 375-23번지 카사 플로라 Tel. 02_6409_1701
예술가/작가의 창작은, 그것의 통렬한 인식 여부와 그가 취하는 작업의 양상과 태도를 유보하더라도, 세상과의 불화를 드러낸다. 그들은 평화롭거나 안온하거나 무사함을 가장하는 일상의 표면에 일종의 균열을 만들어 내는데, 이 화해롭지 않은 관계는 그들이 세계를 새롭게 보려는 선택을 취한 순간 발생하는 불가피한 위악(僞惡)이다. ● 세계가 분절된 편린으로 밖에 존재할 수 없다는 이해와, 사람 간의 진정한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자각과, 불안정한 기미와 흔적에 관한 집착 등은 일상적 존재를 뛰어 넘는 몽환을 꿈꾸고, 소박하고 평이한 것들의 소중함을 이야기하는 와중에도 미처 그 피로한 신경을 거두지 못한다. 왜일까?
작품이 보여지는 형식으로부터 '내적 독백'의 성격을 완전히 거둘 수 없을 때, 우리는 예술가/작가의 심리적 지도(地圖)를 가늠하며, 세상과 맺고 있는 그들의 관계를 작품을 통해 되짚어 갈 수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어느 찰나, 그들이 지닌 내상(內傷)을 발견하고, 아니 실은, 그들의 상처라고 여기고픈 응시주체의 정신적 상흔를 목격함으로써, 세계와의 불화가 지속되는 까닭을 짐작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불구의 왕이 겪는 고통을 연민했던 파르지팔(Parsifal)의 교훈이 그러하고, 시지푸스가 처한 운명의 굴레가 말해 주듯이, 존재 자체가 상처임을 암시하는 신화적 상징들은 고통을 감내하고 극복하려는 삶의 과정을 끝없이 상기시킨다. 상처를 잊지 않는 것은 더러 존재의 가련함을 전언하는 범속한 비극일 경우에도, 치유를 갈급하는 절실한 욕망에서 비롯된다. 세계에 대한 예술가/작가의 갈등은 상처의 기억과 성찰이자, 스스로와 세상의 회복을 꾀하는 치유의 몸짓이다. ■ 에스파스 다빈치
Vol.20041026c | 휴먼픽션Ⅲ_상처와 치유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