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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4_1025_월요일_05:00pm
아트포럼 뉴게이트 서울 종로구 신문로2가 1-38번지 내자빌딩1층 Tel. 02_737_9011
민재영 - 영원 속에 봉인된 순간의 몸짓 ● 민재영의 그림은 단순한 재현이나 묘사와는 다른 방향에서 대상을 포착하고 그린다. 그것은 회화의 근간과 관련된 다시-보기, 다시-그리기의 모색에서 그리고 동양화 장르에서의 모필과 먹의 쓰임에 대한 또 다른 사유의 갈래 아래 그리고 그 위로 도시로부터 파생된 감각과 시선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있어 보인다. ● 그녀는 어디론가 몰려 지나가는 군중들의 모습을 공중에서 잡은 시선으로 종이 위에 줄을 긋는 방법, 주사선으로 옮겨놓았다. 이는 유동하는 신체의 흐름과 속도감 있는 도시공간의 시간이 감촉 되는 한편 찰나적이면서도 치명적으로 가슴과 눈에 다가와 박힌 이미지의 기억, 그 떨리는 잔상에 대한 매우 효과적인 방법론으로 보인다. 세계에 대한 자기 몸의 반응과 감각, 기억과 감동에 밀착된 그리기의 모색이 바로 그것이다.
그녀가 설정한 그림의 공통점은 한결같이 군상들이며 모종의 동작을 취하고 있는, 움직이거나 걷거나 어디론가 몰려가고 있는 상황설정이 순간 정지된 상태라는 점이다. 비디오를 보다가 'Pause'를 눌러 고정시킨 이미지 말이다. 침묵 속에서 이 부동의 육체들은 하나의 몸짓, 은유적이고 상징적인 제스처를 마임처럼 취하고 기이한 무중력의 공간 안에서 주문에 걸린 것처럼 멈춰서있다. 대개 위에서 혹은 뒤에서 잡은 관계로 등장인물들의 얼굴표정은 지워져있고 다만 동물성의 육체가 짓는 몸짓만이 무언의 메시지를 전한다. 위에서 내려다 본 시각은 흔들림, 움직임, 흐름, 관계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포착해주는 편이다. 정수리부분과 어깨 선, 팔과 다리만이 그 누군가를 대신한다. 보는 이들은 그 몸짓만을 보고 무언가를 읽어야 한다. 눈에 붙잡힌 시각적 정보에 의해 배제되던 상상력과 미묘한 감정의 연상이 자연스레 빈 공백에 물처럼 스며든다. 어떠한 설명이나 단서도 배제되어 있는 상황에서 다소 모호하고 흐릿한, 흩어지는 이미지들이 말로 전하지 못하는, 언어를 넘어서는 난해한 느낌, 감정, 복합적인 분위기를 암시한다. 오히려 몸짓과 뒷모습이 더욱 구체적이고 진실한 실체일지도 모른다. ● 동시에 도시에서의 삶은 이렇게 늘 익명의 대중들과의 빈번한 표피적 마주침, 그러나 이내 의미 없는 흩어짐으로, 막연한 경계심과 적대감, 방어심리와 욕망을 자극하는 표적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보여지고 미끄러지기를 반복하게 한다. 도시에서 산다는 것은 그런 무수한 익명의 존재들과의 찰나적인 만남과 그로 인한 여러 체험과 상념을 마냥 부풀려준다. 도시인들은 다들 저마다 고독한 산책자가 되어 도시공간을 부유하는 것이다. 작가는 그곳에서 자신을 찌르는 이미지를 찾는다. 기억한다. 그것은 늘 보던 익숙한 장면이지만 동시에 우리 삶의 어떤 느낌이 강렬하게 응축된 장면이다. 바로 그 장면을 찾아 화면에 옮겼다.
민재영은 도시공간에서의 삶을 살아가면서 그 생활의 단면을 섬세하게 느끼고 적절하게 포착하고자 한다. 그것은 본능적인 응시와 기록의 욕망이기도 하다. 작가에게는 기능적으로 단순화된 관계 속에서 스쳐 가는 익명의 인간들, 각자의 유리된 생활공간에서 저마다의 꿈을 꾸는 인간군상, 타인이 무엇보다도 흥미의 대상이었다. 도시 공간 안에서의 사람들, 특히 젊은 사람들의 움직임, 그 단면을 보고자 한 것이다. 그곳에 자신의 초상 또한 서늘하게 직립해 있고 그 뒤에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부유하며 고독하고 낯선 존재의 몸짓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다. 작가에게 그림이란 바로 그러한 도시란 특정 공간에서의 삶에서 파생된 내면심리와 인간관계, 타인에 대한 기억과 응시에 대한 응답이다. 도시 공간 속의 인물들을 담아내는 것은 작가에게 있어 가장 친숙하며 익히 알고 있는 현실의 모습들이기에 그렇다. 그리고 이를 기록, 재현하는 것은 삶을 돌아보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자기 응시의 한 방편이 된다. 따라서 반복되는 개인적 체험 안에서 자연스레 심중에 누적된 영상이나 이미지를 구체적 형태로 옮기는 것이 그녀의 그림이 되었다.
민재영이 포착한 장면들은 도시공간을 거닐며 직접 체험한 것들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영상매체를 통해 받아들이고 추체험된, 기억된 상황들이다. 일종의 간접체험이지만 오히려 일상의 삶조차 직접적인 체험보다는 중간 매개에 의한 간접적 체험이 우리의 체험 전부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동시대의 상황이다. 따라서 작가는 그러한 매체를 통해서 삶을 응시하게 되는 은유로서 TV주사선을 응용한 줄긋기라는 방법론을 통해 특정한 장면을 보여준다. 익숙한 이 시방식은 우리의 망막 자체가 이미 영상기제로 변이 되었음을 은연중 드러낸다. 주어진 화면에 먹으로 사선을 그어놓고 그 위에 다시 반복해서 점(선)을 얹혀 면을 만들고 형체를 만들어나간다. 동시대 영상매체의 시 방식에 대한 먹의 쓰임과 활용, 나아가 동양화 장르의 조응 내지는 반응이란 선에서 이루어진 이 작업은 형식과 내용, 두 가지 측면에서 현대적인 동양화작업의 한 가능성으로 예시된다. ● 모니터나 TV화면의 주사선으로 한 번 걸러 바라보는 이 풍경은 관자로 하여금 어느 정도 거리 두기를 유발한다.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명멸하는 그 유동하는 이미지의 파편들을 잠시 정지(pause)시킨 상태로, 그 단면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얼룩과 점(Dots), 망점들이 모여 이룬 형상은 선명하지 못하고 애매하고 암시적이며 모호하다. 다만 어렴풋하게 윤곽이 떠오르고 어떤 상황이 감지된다. 사람들이 모여있고 스쳐가며 부딪치거나 빠져나가는 동작 같다. 이 정지된 이미지는 마치 정신분석학자가 인간의 무의식을 드러내듯이 '시간적 무의식'을 포착한다. 실재 안에서 숨쉬는 '미세한 우연성의 흔적', 그리고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비가시적 지점'을 담고 있다. ● 결국 이 그림은 사진이나 비디오, TV등의 미디어들을 통해 파생되어 나오는 화학이미지, 디지털 이미지들과 매우 유사한 시각언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접근이 쉽다. 동시에 간결하고 축약적이긴 하나 일종의 내러티브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이 내러티브는 시지각 특유의 유동성과 불안함에 하나의 지지대를 마련해준다. 그것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안구의 경련운동과 이미지의 연속성을 유지시켜 주는 편이다. 전통적인 미술영역에서는 보기 힘들었고 오히려 도시의 일상 속에서 빈번히 체험할 수 있었던 이미지체계가 자연스레 들어온 것이다. 아울러 동시대 이미지 저장방식과 연관된 흥미로운 지점도 엿보인다. 오늘날 우리는 여러 가지 인터페이스를 통해서 이미지들을 제어하려 든다. 채널이나 리모컨 혹은 마우스 등이 그 대표적인 작동도구인데 이것은 이미지들에 대한 최소한의 접촉을 통해서 주체에 매개된 장악력을 확인하게 해준다. 민재영의 그림 또한 그런 식으로 자신에게 의미 있는 , 언어를 넘어서고 문자를 거역하는, 이미지의 불임을 안쓰럽게 넘어서는 그런 절망적이면서 간절한 이미지를 저장, 기억해두는 것이다.
민재영의 그림들을 따라가다 보면 도시인의 보행경로, 속성 등이 느껴진다. 보들레르가 19세기 파리의 산책자로 살면서 느꼈던 대도시의 속도감과 균열도 슬그머니 떠오른다. 시·공간의 압축으로 인한 근대의 어지럼증이 보들레르적 감수성의 한 축이었다면 민재영의 그림에는 그것의 21세기적 변용이 어우러져 있다. 모두가 스냅 샷으로 이루어진 사진처럼 보이는 그녀의 그림 역시 일종의 동시대 풍경에 대한 다큐멘터리적인 작업방식으로 다가온다. 아니, 그녀는 다큐멘터리적인 기법을 사용하는 것 같지만 실은 다큐멘터리적 외형 속에 가늠하기 힘든 도시인의 우수와 고독, 슬픔과 무력감, 공허와 번잡한 일상의 피로를,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상처받거나 욕망 하는 불특정 다수의 마음들을 더없이 애매하게 그렸다. ● 작가는 도시 자체를 소요하면서 그 이미지를 응시, 기록한다. 다소 무기력하게 어슬렁거리는 사람, 유동하는 응시와 산책자의 시각을 지닌 한가로운 소요자다. 이러한 소요자는 관찰하기만 하지만 결코 끼어 들지 않고, 바라보기는 하지만 진실된 시선을 주지 않으며 상품을 바라보듯이 다른 사람을 바라보면서 도시의 공공 장소들을 돌아다니는 특권과 자유를 상징한다. 그는 고독하고 소외되어 있다. 대도시는 이미 우리의 삶이고 환경이며 조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삶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투의 무관심과 군중의 모습에 숙달된 태도를 갖고 살아간다. 사실 그것이 우리의 자화상이다. 이때 정지된 이미지들은 문득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고 뒤틀리고 건조한 일상 속에서 속절없이 흩어지는 그 누군가의 몸짓을, 우리네 비근한 일상의 풍경을 우수처럼 떠올려보게 한다. 영원 속에 봉인된 채 말이 없는 그 장면에는 깊이를 가늠하기 힘든 아련함의 습기가 배어있다. ■ 박영택
Vol.20041026a | 민재영 수묵채색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