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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4_1015_금요일_06:00pm
갤러리 세줄 서울 종로구 평창동 464-13번지 Tel. 02_391_9171
한기창의 세계-직업미학적 기교를 넘어서는'치유 희망하기' ● 거기엔 이파리와 줄기 대신 희뿌옇게 드러난 척추와 늑골이 있다. 꽃의 뼈랄까, 그토록 적절하지 못 한 것을 식물의 질료로 들이대는 것이 우선 한기창 식의 역설이다. 평면의 화폭을 대신하는 라이트박스 위에서 작가의 식물들의 신체는 정작 얇은 X-레이 필름이다. 여기서 이 같은 역설은 꽃 한 송이, 식물 한 포기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뢴트겐의 정원」 전체의 문제다. ● 가까이 다가섰을 때, 비로소 우리는 「뢴트겐의 정원」에 내재하는 비밀을 감지할 수 있었다. 꽃과 식물들은 단지 선명한 윤곽일 뿐이다. 그것들의 내부는 이면으로부터 조사되는 빛과 그것이 드러내는 갖은 종류의 검푸른 골격들이다. 식물은 자신의 정형화된 정체성으로부터 이탈하고, 꽃도 자신의 영광으로부터 미끄러져 나간다. 아니면, 너무 색이 결여되어 있는 얇은 플라스틱 신체를 지닌, 창백하며 병색이 깊은 꽃이랄 수 있을까.
어떻든 그것은 더 이상 삶의 환희거나 청춘의 달콤한 상징 따위로 독해되길 거부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럼에도 꽃과 식물에 대한 작가의 관심이 이상스럽게도 초지일관 하다는 점, 그리고 꽃의 윤곽과 그 역설적인 신체라는 불가해한 조합을 지속한다는 사실이다. 왜인가? 미학인가? 아니면 문법, 혹은 기법인가? 작가는 비록 윤곽에 지나지 않더라도, 그것을 떠날 수 없는 이유로 "아픈 자의 고통과 치유의 희망"을 말한다. ● 한기창의 꽃과 식물들은 분명 딜레마가 되어버린 평면 위에 시체처럼 널브러져 있는 이미지가 아니다. 그것은 일테면 다른 세계로 향하는 또 하나의 창(窓)이다. 우리로 그것을 보는 대신, 그 내부를 들여다보게 하는 어떤 장치 같은. 시선은 처음엔 꽃(의 윤곽)에 주의를 기울이다가, 이내 반투명한 필름의 이면으로 빠져드는, 다소간의 혼란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라이트박스의 내면으로 빨려 들어가 눈부신 텅빈 공허를 불안스럽게 경험할 수도 있다. 이 강렬한 공허가 필름의 검푸른 이미지로 착색되면서 나타나는 깊은 음울함의 효과에 의해 상황은 매우 극적인 것이 된다. 내부로부터 공명되어 나오는 이 검푸름 자체에는 어떤 불안감 같은 것이 깃들여 있다. 단지, X-레이 필름이 일반적으로 대동하곤 하는 어떤 질환의 담론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색과 빛의 상호관계가 만들어내는 어떤 싸늘한 조합의 문제에 더 가깝다.
「뢴트겐의 정원」이 가졌던 깊은 우수의 느낌에 견주자면, 순백의 표면에 산업용이나 의료용 스테이플을 셀 수 없이 되풀이 박으면서 만들어지는 최근 작업들은 크게 두 가지 점에서 완연히 달라 보인다. 우선, 최근의 작업들은 이전에 비할 바 없이 평면적이다. 「뢴트겐의 정원」에서 중요했었던, 그 이면에서 이미지의 강약에 관여하는 배후 같은 것은 이제 없다. 시선의 종착지는 이미지를 구성하는 작은 물질적 단위들인 스테이플들의 집합이다. ● 뢴트겐의 정원이 빛에 의해 가능했던 반면, 이번 것들은 너무 신체적이고 사물적이라는 점이 두 번째 차이다. 이전의 꽃과 식물들의 존재론이 내부로부터 투사되는 빛에 의한 것이었다면, 이번의 수풀과 나무들은 너무나도 확연한 금속성의 신체를 지녔다. 색조 또한 이전의 상징적인 검푸름에서 금속성의 윤기가 도는 모노크롬으로 바뀌었다. 더구나 모든 면에서 정확하게 동일한 스테이플 낱알들의 디지털적 이합집산은 이미지를 어떤 수학적인 질서에 속한 것으로 정의한다. 부드러운 톤의 변주로 보이는 것도 사실은 이 스테이플 낱알들이 이 밀집하거나 흩어지는 밀도와 방향이라는 제한된 조건이 만들어내는 경우의 수에 지나지 않는다.
「뢴트겐의 정원」과 이 스테이플로 된 수풀 사이에는 극적인 상충점들이 존재한다. 같은 식물이라도, 이제 그 줄기와 이파리들은 목판에 박힌 정련된 금속 파편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이 각각의 가늘고 긴 형태의 금속 파편들이 빛을 반사해낼 때, 그것은 마치 매우 숙달된 솜씨에 의한 빛의 점묘법 같아 보이기도 한다. 때론 빛이 반사되는 매우 잔잔하게 흔들리는 물결 같기도 하다. 그럴 때, 그것들은 놀랍게도 단번에 금속 이상의 것이 되고, 또 영혼 없는 신체성을 넘어서는 따듯한 매력을 소유한다. ● 작가의 스테이플 작업이 지니는 매력을 설명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 핵심은 서로 이질적인 질서가 충돌하면서 만들어내는 긴장감에 있다. 즉 규격화된 산업용 소재와 그것들의 디지털적 구성과 그 같은 방식으론 도저히 재현될 수 없을 변화무쌍한 자연(自然) 사이에 존재하는 충돌과 긴장감 같은 것. 사실 이러한 긴장감이야말로 한기창의 작업에서 내내 중추여 왔다. 「뢴트겐의 정원」 역시 꽃/뼈, 식물/X-레이 필름이라는, 서로 동거하기 어려운 두 세계를 하나의 신체 안에 거주시키는 상치와 갈등의 문법 아니었던가! 이런 맥락에서라면, 작가의 세계는 일면 다다적 측면을 지닌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일테면, 이질적인 것들의 봉합, 정형화된 의미의 표류, 리얼리티의 훼손, 초현실주의적 데페이즈망 등의 연장선상으로 말이다. 그래서 이게 다라면 작가의 세계는 지난 세기의 형식주의적 담론 안에서 얼마든지 독해될 수 있는 식상한 변주들 중 하나쯤으로 간주될 것이다.
다행히도 한기창의 세계에는 형식주의 논리론 읽어낼 수 없는 차원이 존재한다. 그것은 그의 세계에서 변함 없이 지속되어 온 소재인 꽃과 나무와 수풀들에서 명백하게 드러나는 바, 그 저변에는 "상처들이 치유되고, 무엇보다 희망을 노래하고 싶다" 는 작가의 염원이 깃들어 있다. 지난 세기의 형식주의적 퍼스팩티브에 여전히 기대고 있는 정신에게라면, 이같은 접근은 쉽게 계몽주의적 잔재쯤으로 일축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엔 작가의 미학을 단지 어떤 전문가주의적이고 직업 미학적인 기교 이상으로 만드는 동기가 여기에 있다. 문법이 태도와, 이미지가 삶의 문제들과 견고하게 맞닿아 있게 하는 그 변증적 방식 말이다. 한기창의 이미지들은 더욱이 그 자신이 삶에서 체험한 고통과 회복의 깊은 염원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우리는 유감이게도 이같은 차원이 여러 종류의 '형식주의나 범신론적 복합주의-몽매주의'들에 의해 과소평가되어 왔던 지난 한 세기의 역사를 모르지 않는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한기창의 작품들이 이러한 과거의 습성에 더 이상 얽매여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의 작업들은 보다 구체적으로 현재를 살고 있고, 치유와 회복을 희망하는 인간의 긍정적 가치의 발현에 가치를 부여하는 분명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 심상용
Vol.20041024c | 한기창 개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