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e femme

노정하展 / NOHJUNGHA / 盧貞夏 / photography   2004_1015 ▶ 2004_1028

노정하_the Woman with a gold hairpin_컬러인화_125×100cm_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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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04_1015_금요일_06:00pm

스타일 큐브 잔다리 서울 마포구 서교동 358-121번지 2층 Tel. 02.323.4155

왜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자신의 정체성을 이야기하는데 있어서 항상 성(gender)의 문제를 연결시켜 생각하게 될까? 솔직히 나도 정확한 이유를 모르겠다. 사회적 환경에 의해서인지 아니면 생리 심리학의 문제인지...... 하지만 확실히 여성과 남성은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적 차이가 있는 것만큼이나 서로 확실히 다른 특성을 지닌 존재들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난 이런 타자와의 다름을 통해 나의 모습을 좀더 잘 알 수 있으리라. ● 'une femme'는 내 자신을 포함해서 여성의 정체성에 대한 일종의 우리 여성들끼리의 독백이라고 말하고 싶다. -여기서 '우리여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에 대해 남성들의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이 작업은 철저히 여성으로서의 나를 이야기하고 싶을 뿐 여성과 남성을 이분화 시키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기 때문이다. 단지 처음에도 언급했듯이 여성으로서의 나 또한 내 자신의 본질을 생각하는데 있어서 성(gender)은 지극히 중요한 문제로 나와 같은 성을 지닌 여성들과 그 문제에 대해서 수다를 떨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감히 남성들에게 그들도 좀 자신의 성(gender)에 관심을 가져주기를 제안한다. 그들은 너무 그 부분에 있어서 무심하다. 어쨌든 어느 한 대학의 여성학 강의에 여학생들 못지 않게 남학생들의 수강신청으로 강의실이 꽉 찼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여성의 성(gender) 문제는 우리 여성들뿐만 아니라 타자인 남성들조차도 관심이 많은 건 확실하다.

노정하_the Woman with pomegranates_디지털 프린트_80×80cm_2004
노정하_the Woman with pomegranates_디지털 프린트_80×80cm_2004

그렇다면, 남성과 여성. 그들의 본질적 차이는 뭘까? 두말 할 것도 없이 가장 큰 차이는 생명의 잉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할 것을 명하신 대로 인류의 삶에 가장 본질적인 핵심은 사랑을 나누고 자손은 낳고 키우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러한 사랑을 하는데 있어서 여성은 남성처럼 편할 수만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하와에게 내리신 저주로 인해, 인류의 여인들은 자신의 생명을 담보 잡힌 도박과도 같은 사랑을 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에. 그리고 'une femme'는 이러한 저주받은 사랑의 운명을 타고난 여인들의 초상화이다. 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안다. 하나님이 이러한 저주를 이 여인들에게 운명의 끝으로 만들지 않았음을... ● 이번 'une femme' 시리즈는 처음 사진 작업을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한번도 내 머릿속을 떠난 적이 없던 '이 시대'를 사는 '한 여성'으로서의 자화상에 대한 자문자답의 한 매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여성의 본질은 결국 그들의 사랑 안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본다. 그들은 생명잉태라는 엄청난 의무와 권한을 사랑의 저주와 축복으로 동시에 부여받았으니 말이다. ■ 노정하

노정하_the Pink God 2_컬러인화_92×75cm_2003
노정하_the Pink God_컬러인화_92×75cm_2003
노정하_my little princess_디지털 프린트_2004

노정하가 만들어내는 차이와 여성 ● 노정하는 사진 작업을 통해 자신을 알고자 한다. 그것은 작가 자신의 말대로'저주와 축복'을 동시에 부여받은 인간으로서의 여성의 팔자에 관한 것이다. 남성들에 비해 억압받고 차별 받아온 여성은 그로 인해 남성들이 보지 못하는 세계를 보게 된다. 그것은 이 세계의 모순이 부르주아의 눈에는 띄지 않지만 프롤레타리아의 눈에 잘 보이는 것과 같다. 그러나 여성으로서의 자신을 사진을 통해 드러낸다는 것은 특별한 방법을 요구한다. 예를 들어 있는 그대로 다큐멘터리를 찍는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 여성을 여성답게 만들어 주는 이미지의 정치학에 개입하기 전까지는 온전하게 여성으로서의 자신에 대해서 말했다고 볼 수 없다. 어떤 사회에는 분명히 여성을 표상하는 특별한 이미지의 체계가 있는데, 노정하의 작업은 그런 체계에 대한 어떤 태도의 표명으로 보인다. 그 체계에 따라 여성은 태어나고 만들어지고 해체된다. 어떻게 보면 이미지의 체계에 따라서 태어나는 순간 여성은 해체되는 지도 모른다. 요즘은 남성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여성은 이렇게 저렇게 하면 예쁘게 보인다는 기준에 따라 자신을 꾸미고 몸가짐을 다듬는다. 그리하여 그럴싸하게 보이는 자신이 태어나는 순간, 그것은 자신이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라는 상징질서에 속한 한 부속품이 만들어지는 순간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에 자신을 상징질서의 부속품으로 생각하는 인간은 없다. 누구나 체계 속에 살고, 체계화되지만 개별적인 인간이 체계 자체는 아니다.

노정하_Self in a mirror_흑백인화_42×32cm_1999
노정하_Self in a mirror_흑백인화_42×32cm_1999

사진에 푼크툼이 있듯이 체계에도 푼크툼이 있다. 즉 구멍이 있는 것이다. 그 구멍을 통해 실존이 내비친다. 노정하의 사진에서 희미한 유리를 통해 보이는 드레스 입은 자신의 모습은 체계에 들어갈까 말까를 고민하는 듯하다. 체계는 당연히 그녀를 붙들고 싶지만 그녀는 항상 고민한다. 모델로 모습을 바꾼 그녀는 생리의 피를 흘리며 잉태와 출산에 대해서 밑바닥에 이르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 사진의 배경에 있는 야하고 요란한 금딱지는 금빛이 주는 화려함 때문에 그런 고민을 한층 더 심란하게 만들어준다. 금딱지의 찬란함은 여성을 유혹하는 물질적 부에 대한 알레고리인 듯이 보이기도 한다. 아마 유혹과 고통 속에 시계추처럼 진동하는 존재가 여성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남의 일일 때는 말하기 쉬우나, 자신일 경우는 말하기 쉽지 않다. 사진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은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할 뿐 아니라, 독특한 방법을 요구하기도 한다. 노정하의 작업에서 돋보이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적용되는 사진의 문법을 찾아가는 작가적인 태도이다. 자기 자신을 찍기도 하고, 모델을 써서 상황을 설정하기도 하고, 분장을 하기도 하는 다양한 연출기법을 통해 노정하는 어떤 식으로 사진 찍는 것이 정말 자신을 잘 보여주는 것일까 하는 문제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으려 하고 있다. 아마도 답은 그 어떤 방식에 있다기보다 그 방법들 사이의 간극, 혹은 차이에 있을 것 같다. ■ 이영준

Vol.20041021a | 노정하展 / NOHJUNGHA / 盧貞夏 / photography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