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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4_1012_화요일_05:00pm
갤러리인데코 서울 강남구 신사동 615-4번지 Tel. 02_511_0032
삶은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금 커피를 마시지만, 그와 동시에 전화를 받고, 혹은 엄청나게 속이 상하며, 그와는 무관하게 바로 글을 써야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질 수 있다. 여러가지 상황과 심리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일상이다. ● 이런 현실의 사건들은 신문보도나 드라마처럼, 육하원칙에 맞아떨어지거나, 명쾌한 결말을 맺지 못하는데, 우리는 다양한 관계들을 합리적인 결론으로 마무리하려는 성향이 있다. 그러다가 머리와 마음속에 모호한 부분, 빈 곳 등이 생겨있음을 느끼기도 한다. 같은 일들이 반복되고 그 안에서 나만 훌쩍 동떨어져 세상의 합리적인 보폭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은 불안감도 생겨난다.
이와 같은 불일치의 경험을 동식물의 모양새, 그림자, 무늬, 윤곽선, 배경 등을 통해 그림으로 나타내고자 한다. ● "동물과 식물을 소재로 하고 있다"는 것은 내 그림에서 가장 눈에 띠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나는 동물과 식물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보다는 그 형상에 보는 이의 심리가 투사되기 쉽다는 면에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 늦은 귀가시간 어두운 골목길에서 만난 검은 고양이의 반짝이는 눈빛은 순간적으로 마치 내가 길을 헤매는 고양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동물원에서 한 숨 자고 있는 여우를 보면, 역시 나는 이미 여우를 보는 관람객이 아니라, 한 마리 철창 안에 갇힌 여우가 되어 지루함과 쓸쓸함을 달래다 한 숨 뻗어있는 것과 같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나를 둘러싼 상황을 배경(setting)으로,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나"를 그림의 등장인물인 동물이나 식물로 비유하여 표현하며, 화면의 플롯(plot)을 구성한다. 여기서 "나"란 물리적인 "나"이기 보다는 심리적인 "나"를 지칭하며, 더 많은 "나"들이 그림을 보면서 자신만의 플롯을 만들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하게 된다. 배경과 등장인물간의, 또는 각 등장인물간의 관계가 이루어지는 공간의 성격이 모호하고, 시점도 모순되며, 어떠한 경우에는 반복되기도 하고, 돌고 돌기 때문에 화면은 이야기의 가능성은 갖게 되지만 완벽한 인과관계를 지니지는 못한다.
이번 전시작품들은 '오려붙이기'와 '선 겹치기' 방식을 사용하며, 주로 같은 이미지가 조금씩의 차이를 두고 반복되거나 서로 다른 것들과 조합되는 형식을 가지고 있다. 동식물의 형상을 오려내고 붙이는 과정에서 잘라낸 부분의 모양과 잘려나간 부분의 모양이 공존하게 되며, 이중적이고, 교차하며, 반복되는 심리를 표현한다. 어떤 경우에는 이러한 잘려진 이미지들이 다른 배경(setting)과 조합되면서 소외되고 어울리지 않는 다소 초현실적인 느낌을 만들기도 한다. ● "선의 겹침"은 특히 에칭 작업에서 많이 나타나는데, 주로 동식물 형상의 윤곽선을 따라 그려낸 선들이 무작위로 겹쳐지면서 우연한 조합의 효과뿐만 아니라 일차원의 선이 만들어내는 애매한 공간감이 생겨나게 된다. ● 이같은 화면 구성방식은 같은 이미지를 반복해서 찍어낼 수 있고, 각 판의 조합이 가능한 판화와도 밀접하게 연관지을 수 있다. 드로잉 과정에서는 사진을 이용하지만 사진판화기법, 디지털 프린트가 아닌 전통적인 방법을 통해 직접 판에 손으로 그리면서, '표현하는 나'의 주관적이고 작의적인 손 느낌이 작품에 반영되기를 기대하였다.
전시제목인 『빈공간으로 들어가기』는 작품 중 하나의 명제에서 골라낸 것이기는 하지만, 첫 개인전을 하는 자신의 심정과도 통하는 부분이 있다. 빈 판화지, 빈 전시장에 결과물을 하나씩 채워 가면서, 나에게 꼭 들어맞는 빈 공간은 없을 지라도 어떤 모양이든 빈 공간이 주어지면 그 공간에 들어가 그것을 나에게 꼭 맞게 만들어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나를 위해 마련된 빈 공간에 첫 발을 들여놓게 되는 셈이다. ■ 김미로
Vol.20041012a | 김미로 판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