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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작가 김종영_김영대_김종구_노주환_정광호_최인수
김종영미술관 서울 종로구 평창동 453-2번지 Tel. 02_3217_6484
완당과 세잔 ● 완당(阮堂)과 세잔은 한국과 프랑스의 근대미술에 많은 영향을 끼친 위대한 예술가이다. 약 50년의 연령 차이는 있으나,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생존했으니 거의 같은 시대의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이 두 사람의 예술에 대해서 비록 동서는 다를지언정 이상하게도 많은 공통성을 발견한다. 세잔은 은행가의 아들로 일생 동안 경제적으로 아무런 불편 없이 오로지 예술에만 정진하였고, 완당은 명문의 후예로서 정치권력의 갈등에 말려들어 거의 일생을 유배생활로 마쳤으니, 다같이 그들의 생애가 세속적인 것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일생이 그렇게 된 데에는 가정환경의 탓도 있었겠으나, 한편으로 보면 그들의 엄격한 성격의 탓도 있었지 않나 생각된다. 완당의 글씨의 예술성은 리듬의 미보다도 구조의 미에 있다. 그들의 예술은 그 당시로는 단연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고 보겠는데, 이것은 타협이 없는 그들의 초탈한 성격에 연유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내가 완당을 세잔에 비교한 것은 그의 글씨를 대할 때마다 큐비즘을 연상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유래를 찾기 어려울 만큼 완당의 글씨는 투철한 조형성과 아울러 입체적 구조력을 갖고 있고 동양 사람으로는 드물게 보는 적극성을 띠고 있다. 상식적인 일반 통념을 완전히 벗어나 작자(作字)와 획(劃)을 해체하여 극히 높은 경지에서 재구성하는 태도며 공간을 처리하는 예술적 구성이며 하는 것은 그의 탁월한 지성을 말해주는 것이려니와, 고전을 결코 경시하지 않으면서도 종횡무진으로 풍부한 변화를 갖는 예술적 창의력과 넓은 견식은 족히 세잔에 비교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보겠다. 세잔의 화면에서는 유려한 리듬은 볼 수 없다. 그의 회화는 그렸다기보다는 축조했다고 보는 것이 더 어울릴 것 같다. 그리고 견고한 구성과 중후한 재질감에 있어 다른 누구보다도 뛰어나다. 이러한 세잔의 예술은 완당에게도 통하는 점이 많다. 일반적으로 서예의 미는 선의 리듬에 있는 것으로 보는데, 완당의 예술은 리듬보다도 구조의 미에 있다. 이것은 우리가 특히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따라서 그의 예술은 예서(隸書)에서 가장 면목이 약동한다. 그리고 완당은 특히 먹을 중시하였다. "붓은 아무거나 쓸 수 있어도 먹만은 잘 선택해야 한다."고 했다. 서예를 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 말의 함축성을 이해해야 할 것이고, 그가 얼마나 재질에 깊은 관심을 가졌나 하는 점에 있어서 그의 예술을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는 말이다. 완당과 세잔이 직접으로나 간접으로나 그들의 예술의 진실이란 점에서 많은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이 두 사람의 예술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겠다. 소위 서예 대가라는 사람이 완당의 예술을 보편성이 없다느니 그 기이한 서법을 배울 수도 없다고 공언(空言)하는 것은 한심한 일이다. 예술의 보편성이란 것이 무엇인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다. 진실한 노력과 순수한 정신에서 이루어진 예술은 인류가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 진리인 것이다. 완당과 세잔의 예술이 많은 공통성을 갖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보편적 진리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큐비즘은 세잔에서보다도 후세에 더욱 그의 예술을 발전시키는 데서 많은 성과를 보게 되었으나, 완당은 세잔 보다도 훨씬 자기의 예술을 완성시켰고 후세의 추종자는 다만 그의 아류에 불과하였다. 위당(威堂) 신관호(申觀浩)는 완당의 제자로서 다만 그의 스승에게 배웠고 추종했을 뿐이지 완당의 예술을 더욱 완성시킨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오히려 완당의 예술은 세잔보다도 더욱 이념이 뚜렷하고 지성과 정신력이 우수하다고 본다. 집요한 자연추궁 끝에 기하학적인 몇 개의 기본형체로 모든 사물을 환원시킬 수 있다는 조형원리를 발견한 것은 세잔의 혜안(慧眼)이라고 할 수 있겠고, "서화감상에는 금강안(金剛眼)이어야 하고 잔혹한 형리(刑吏)의 손길같이 무자비해야 한다."고 한 완당의 예술감상 태도는, 두 사람이-비범한 예술정신과 사물에 대한 투철한 관찰력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 김종영
文字香 書卷氣 ● 법고창신 ● '문자향'은 우성 김종영이 드로잉 못지 않게 많이 남긴 서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정신세계와 조형의식이 무엇이었으며, 그의 이러한 예술관이 오늘날 후학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기획한 전시이다. 이 전시를 통해 김종영을 서예가로 현양(顯揚)할 의도는 없다. 또한 그가 남긴 서예작품의 예술적 가치를 평가받기 위해 서예에 대해 주목한 것도 아니다. 이 전시의 취지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이념 아래 과거를 회고하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김종영이 추구했던 조형세계를 해명함에 있어서 그의 서예가 귀중한 실마리를 제공해줌과 아울러 비록 형태와 방법은 다를지언정 정신에 있어서 그를 계승하고 있거나 혹은 그러한 세계를 천착하고 있는 작가를 통해 오늘날 조각에 있어서 문자향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는지를 물어보고자 하는데 있다. ● 경남 창원의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김종영은 휘문고등학교 재학시절인 1932년 동아일보가 주최하는 전국학생휘호대회에서 안진경체로 일등상을 받을 정도로 어린 시절부터 서예에 남다른 조예가 있었다. 그러나 김종영에게 있어서 서예는 단지 수신(修身)이나 여기(餘伎)의 차원이 아니라 형태의 본질을 찾아가는 과정이었음을 그가 남긴 삼 천여 점에 이르는 드로잉이나 조각품, 나아가 그가 쓴 여러 글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그에게 서예는 형태의 품격을 얻기 위한 수련의 과정이자 그 자체로 완성된 조형언어이기도 했다. 이 전시의 제목인 '문자향'은 물론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평소에 주창했던 '문자향 서권기(文字香書卷氣)'를 염두에 둔 것이다. 해동제일통유(海東第一通儒)로 불려졌던 김정희는 글을 쓰거나 난초를 그림에 있어서 '가슴속에 청고고아(淸高古雅)한 뜻이 있어야 하며, 그것이 문자의 향기와 서권의 기미에 무르녹아 손끝에 피어나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의 이러한 서화관(書畵觀)은 송대(宋代)의 동파(東坡) 소식(蘇軾)에 의해 정립된 시ㆍ서ㆍ화 일치의 문인취미를 계승한 것으로서 기법보다 심의(心意)를 존중하는 문인화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 ● 김종영은 물론 문인화가가 아니라 조각가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통해 문인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고담(高談)하면서 간솔(簡率)한 특징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말하자면 그는 예술가이자 학자이고, 교육자이자 선비였던 것이다. 김정희와 김종영 사이에는 한 세기를 훨씬 넘는 시간의 편차가 있지만 두 예술가에게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즉, 김종영은 김정희에게서 유희정신과 전위적 예술세계를 발견하였는데 이것은 김종영의 작품에 나타나는 특징이기도 하다.
그것을 파악할 수 있는 것으로 김종영의 글 중에서 「완당과 세잔」을 들 수 있다. 이 글은 김종영의 예술관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김정희의 글씨와 세잔의 그림을 비교하며 두 작가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공통성으로 율동미가 아니라 구조미를 든 김종영은 이 글의 끝에서 '집요한 자연추궁 끝에 기하학적인 몇 개의 기본형체로 모든 사물을 환원시킬 수 있다는 조형원리를 발견한 것은 세잔의 혜안(慧眼)이라고 할 수 있겠고, "서화감상에는 금강안(金剛眼)이어야 하고 잔혹한 형리(刑吏)의 손길같이 무자비해야 한다."고 한 완당의 예술감상 태도는, 두 사람이 비범한 예술정신과 사물에 대한 투철한 관찰력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고 결론 내리고 있다. 김정희의 글씨가 일체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정신의 결과이기 때문에 당대에조차 경향(京鄕)의 서예를 망쳤다는 비판을 받았을지언정 '일체의 공리를 초월한 자유, 용기, 사랑의 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전위적일 수 있었다는 김종영의 결론은 탁월하다. 김종영은 김정희의 글에서 화석화된 전통을 본 것이 아니라 시대를 앞서가는 실험정신과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용기를 발견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실험정신과 용기가 무모한 결단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전통에 대한 깊은 이해와 인식을 바탕으로 하되 그것을 넘어서려는 탐구정신을 실천한 결과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김정희가 단순히 문인취미에만 안주한 것이 아니라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 아래 역사를 해석하고 그것을 창조적으로 계승하려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태도를 지닌 존재였음을 알려준다. ● 김종영의 작품에도 이러한 법고창신의 정신이 흐르고 있다. 그는 서예를 통해 옛날 지식인들의 정신세계로의 여행을 즐겼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것에도 개방적이었기 때문에 추상조각의 세계를 개척할 수 있었으며, 서구미술의 수용이 아닌 내재적 필요에 따른 견고한 조형언어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문자향은 '좋았던 시대'로의 회귀를 지향하는 죽은 언어라기보다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 필요한 자양분이자 그것에 정신의 무게를 더해주는 뿌리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김종영의 조각을 보면 재료를 학대하거나 그것에 집착하여 인위적으로 형태를 만들려는 의지를 발견할 수 없다. 오히려 재료가 스스로 형태를 드러내는 듯한 여유가 녹아있는 바 박갑성은 이러한 태도에 대해 불각(不刻)이라고 불렀는데 그 형태의 조형적 구조가 그의 글씨가 지닌 구조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무릇 서예란 글자에 담긴 뜻을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종이란 제한된 공간을 검은 먹으로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란 조형성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내용만 추구하면 거룩한 말씀의 기록으로 그칠 것이요, 형태만 좇으면 심미성은 앞설지 모르지만 깊은 정신세계를 담아내기는 어렵다. 그 경계를 잘 알고 있던 김종영은 형태를 다듬으려고 하지도 않았고 재료를 깍지 않고 대충 내버려둔 것이 아니라 가장 적절한 시점에 작업을 멈추었던 것이다. 서예에서 볼 수 있는 여백의 공간미는 그가 더 이상 깎을 경우 무너질 수 있는 그 형태에서 볼 수 있는 여유의 공간과도 상통한다. 이와 같은 여유는 유유자적(悠悠自適)하는 정신을 통해 절제를 터득한 선비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김종영 특유의 유희정신으로부터 발원한 것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유희삼매 혹은 선적(禪的) 지향 ● 김종영이 생전에 직접 제작하여 사용했던 문진(文鎭)에는 '유희삼매(遊戱三昧) 불각도인(不刻道人)'이란 글씨가 음각돼 있다. 불각도인이란 글은 김종영이 쓴 서예에도 자주 나타나고 있다. 평소 즐겨 글을 썼던 김종영이 서예도구에 불각도인이란 글과 함께 유희삼매란 글을 새겼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박갑성의 회고에 따르면 김종영은 일본 유학시절부터 빈둥빈둥하는 정신의 여유가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김종영이 특별히 게을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삼매(三昧)란 어떤 잡념에도 빠지지 않고 오로지 하나에만 몰두하는 경지를 일컫는 불교용어인데 그중 유희삼매(遊戱三昧)는 삼매의 경지에서 갖가지 모습으로 변모하는 묘음보살((妙音菩薩)의 '어떤 것에도 사로잡히지 않고 심신을 자유자재로 움직인다'는 신통유희삼매(神通遊戱三昧)에서 나온 말이다. 김종영은 「유희삼매」란 글에서 김정희가 시서화에 집중한 것을 유희삼매로 파악했으며 김정희 또한 그런 이유에서 이 말을 원용했음에 주목한 바 있다. 그렇다면 김종영의 조각은 드로잉과 서예를 하면서 누렸던 유희삼매의 경지를 입체로 실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교적이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별다른 취미도 없었던 김종영이 정신의 해방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는 일이었으며 그 과정자체가 유희삼매였던 것이다. 그때, 그는 온갖 세속의 욕망과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고 오직 드로잉이나 글쓰기에 집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무욕(無慾)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형태를 만들어서는 안될 것이며, 김종영의 조각이 단아(端雅)하면서도 지루하지 않고 강직하지만 부드러운 품격을 지닌 이유도 유희삼매의 결과로 봐야한다. 여기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노장사상에 대한 그의 체질적 관심이다. 그가 쓴 서예 중에서 특히 노자의 도덕경이나 장자에서 인용한 것이 많음을 볼 때 그의 유희삼매는 특이하게도 무위자연(無爲自然)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말하자면 그는 속진(俗塵)에 구애되지 않는 자유로운 정신의 여유를 누리고자 했던 것이다.
결국 김종영의 조각은 독서와 사색, 또한 조각작업을 할 때보다 비교적 손쉽게 실행할 수 있는 서예와 드로잉을 바탕으로 한 자기수련의 과정에 축적된 문자향과 도가적 여유를 기반으로 태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사실 순수하고 자기독립적인 김종영의 작품에서 종교성을 발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임종하기 직전 천주교에 입교하였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문제지만 신앙과는 관계없이 그의 작품이 도가적 무위사상 못지 않게 불교의 선사상과 연관성이 있음을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그것은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에서도 나타나는 특징이기도 하다. 「세한도」와 아울러 김정희는 말년의 수작(秀作) 중 하나인 「불이선란(不二禪蘭)」에 붙인 글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심경을 토로한 바 있다. '난초를 그리지 않은지 20년 만에 우연히 그려보았다. 문을 닫고 마음속의 자연을 거듭 찾아 생각해 보니, 이것이 바로 유마(維摩)의 불이선(不二禪)이다. 어떤 사람이 그 이유를 설명하라고 강요한다면 또한 비야리성(毘耶離城)에 있던 유마의 말없는 대답으로 응하겠다. 아름다운 향기여'(不作蘭花二十年 偶然寫出性中天 閑門覓覓尋尋處 此是維摩不二禪. 若有人强要爲口實 又當以毘耶 無言謝之. 曼香)라고 적었다. 유마의 불이선은 『유마경』「불이법문품」에 있는 것으로써 모든 보살들이 앞을 다투어 선열(禪悅)에 들어가는 상황에 대해 말하고 있을 때 유독 유마만이 최후의 순간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자 모든 보살들은 말과 글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진정한 법이라고 감탄했다는 것이다. 김정희는 이점에 주목하여 난초를 그림에 있어서 종이 위에 그리는 것보다는 마음속으로 체득하는 것이 예술의 경지에 이르는 방법이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이에 덧붙여 김정희는 '초서와 예서, 기자(奇字)의 법으로 (난초를) 그린 것인데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이를 알겠으며, 어찌 이를 좋아하랴.'(以草隸奇字之法爲之 世人那得知 那得好知也) 라고 스스로 이 그림을 그리게 된 연유를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이 난초그림을 보면 난초의 모양을 묘사했다기보다 글씨의 법을 그림에 응용하여 상징적으로 난초의 정신을 나타내려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 김종영의 불각 역시 유마거사의 '말없는 대답'과 그 정신에 있어서 맞닿아 있는 것은 아닐까? 그가 쓴 글 중에 나오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가르친다(行不言之敎)'는 노장과 유마 사이에 절묘하게 걸쳐있는 금언(金言)이라 할만한데 이를 '깍지 않음으로써 형태를 드러낸다'라고 확대하면 김종영의 조각세계를 밝히는 문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문자향으로부터 ● 오늘날 예술에서 문자향 서권기는 어떤 의미를 지닐까? 방법과 형식의 새로움이 현대미술의 존립근거가 되고 있는 시대에 문자향은 과거를 그리워하는 퇴행의 증거로 비쳐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주제를 채택함에 있어서 기준으로 삼았던 것은 '옛 것에 비추어 새 것을 만든다'는 법고창신의 정신이며, 비록 우리가 후기산업사회, 첨단정보사회에 살고 있을지언정 문자향 서권기는 비단 학문의 영역뿐만 아니라 예술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므로 이 기준에 따라 그 가능성을 보여주는 작품을 찾고자 했다. 특히 김종영의 서예를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그의 추상조각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공간의 구성과 완결된 구조가 서예와 관련을 맺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김종영이 김정희의 서예에서 발견한 것은 구조적인 아름다움이었으며 그 뿌리를 지성에서 찾은 것은 의미심장하다. 일정한 공간에 종이나 먹만 이용하여 추상적으로 재구성하는 지적 노력이 만들어내는 조형의 세계인 서예를 바탕으로 한 드로잉이나 조각에서 느낄 수 있는 품격이야말로 문자향일 것이다. 따라서 문자향은 단지 형식의 새로움이나 문학적 정취에 머무는 것이 아닌 인문적 소양과 성찰의 결과물이 발산하는 기운(氣韻)이라고 할 수 있다. ● '문자향' 전시에 초대된 작가들은 대체로 문자를 조형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비록 문자를 소재로 한 작가를 모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이 전시는 하나의 가능성에 대한 제안으로서 충분한 의미를 지닌다. 먼저 이 전시가 김종영과 후학들을 연결시킬 수 있는 고리를 제공한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또한 김종영이 추구했던 순수한 조형세계가 인문학적 성찰 위에 이루어진 것이듯이 이들 역시 각자 독자적인 시각으로 이러한 인문학적 성찰을 시도하고 있다. 즉, 예술에 대한 인문학적 사유가 취약해진 현실에서 이 전시는 그것의 가능성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작품이 문자의 근간인 형태와 의미를 출발점으로 삼으면서 그것의 시각적 상징과 기호를 조형적으로 재해석함과 동시에 그 속에 예술의 깊이를 부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자향은 이들을 김종영의 세계와 연결시키는 끈이자 그 근거이다. 나아가 오늘날 문자향이 우리의 삶과 무관한 것으로 취급되고 있다면 이런 기회를 통해 그것의 긍정적 가치를 적극적으로 복원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전시에 참가한 작가들 중에서 최인수의 선(線)으로 이루어진 조각은 공간에 그린 드로잉이자 문자에서 볼 수 있는 추상적 형상을 단순화함으로써 전통적인 장르개념으로서 조각의 경계를 넘어서고 있다. 선으로 구성된 까닭에 덩어리와 볼륨보다 긴장과 이완의 율동이 강조된 그의 작품은 노년에 이른 김종영의 드로잉에서 볼 수 있는 여백에 대해 떠올리게 만든다. 빛과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유동하는 형태는 공간을 점유하기보다 그것에 조응(照應)하려는 의지를 드러낸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불각(不刻)과 함께 불식(不飾)의 미덕이 깃들여 있다. 그런가 하면 쇳덩어리를 갈아 그 가루로 바닥에 글씨를 쓰고 그 영상을 벽에 비추는 김종구의 작업은 오랜 노동의 수고를 거치면서도 결과에 있어서 가변적 형태를 영상장비를 통해 투사한 것이므로 역(逆)조각적 특징을 지닌다. 김종구는 이 전시를 위해 쇳가루로 김정희의 예서 대련(對聯)을 재현하는데 프로젝터를 통해 벽에 투사된 형상은 물을 한껏 머금은 산수화를 떠올리게 만든다. 더욱이 감상자의 발아래에 놓여진 감시용 카메라가 신체의 전부를 비친다기보다 거의 발목부분만 비쳐주기 때문에 마치 산과 강 사이로 거인이 거니는 듯한 시각적 효과를 경험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김영대는 서화(書畵)를 조각으로 구현하고 있다. 용접기를 이용하여 동봉을 녹여 집요하고 치밀하게 제작한 그의 대나무 족자는 미술관 야외에 설치한 죽림(竹林)과 서로 대응하며 사군자의 격조를 현대건축물에 옮겨놓은 듯한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많은 시간을 투여하고 제작공정에 집중해야 하는 그의 작업 역시 김정희나 김종영이 추구했던 유희삼매의 또 다른 방법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에서 거론한 세 작가의 작업은 조각이면서 회화적 특징을 드러내는데 비해 지금은 사라진 납활자를 이용해 문자의 기둥을 구축한 노주환의 작업은 활자의 내용 못지않게 덩어리가 강조된 입체이다. 다양한 크기와 서체를 지닌 활자를 이용해 바벨탑, 도서(圖書), 도시의 파노라마 등을 제작한 바 있는 그는 이 전시를 위해 특별히 김종영의 아포리즘을 새긴 판본(板本)을 출품한다. 관객들은 이 작품의 감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종이찰흙을 이용해 그것을 부조로 떠갈 수 있기 때문에 이 작품은 조각이자 판화를 위한 원판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끝으로 항아리나 경판(經板)과도 같은 대상의 체적을 비워내고 그 형태를 문자로 구성한 정광호의 작품은 최인수의 작품처럼 선으로 이루어진 조각이면서 그의 말처럼 '비조각적 조각'이다. 항아리처럼 일상적인 기성품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제조'한 그의 작업은 글자들로 직조한 사물의 근육이자 피부이고 조직이기도 하다. ● 끝으로 김종영 선생의 작품과 함께 형태로서의 문자를 이용해 작업하거나, 문자와 연관된 형태를 자신만의 조형 언어로 재해석하면서 그 안의 예술적 깊이를 더해가는 다섯 작가들이 함께 어우러진 '문자향' 전시를 통해 우리가 잊어버렸거나 혹은 폐기해버린 문자향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생각하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짧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김종영의 글로 결론을 대신한다. 표현은 단순하게 / 내용은 풍부하게 ■ 최태만
Vol.20041011a | 문자향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