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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많은 젊은 작가들은 새로운 매체들과 더불어 다른 카테고리나 여타 문화속성을 미술 안으로 들여오는 등 발 빠른 적응과 새로운 모습들을 보여주기에 많은 노력들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불과 십 수년 사이에 우리들의 주변이 빠르게 변화되었으며 미술도 또한 그러한 변화에 발맞추어 나가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러한 외형적인 형식의 결과물들만으로는 무엇인가 모자라다는 느낌이다. 일차적인 것 이외에 더 생각할 수 있는 작업이 많지 않음에 그리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언제부터인가 '작업의 깊이'는 고루한 것으로 치부되는 경우도 생겼다. 그것보다는 경쾌하거나 가벼운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이러한 상황에 Y.Y Shim의 작업은 요사이 우리들의 젊은 작가들에게서 보기 힘든 '자기 정체성'과 '작가로서의 신념'이라는 단어를 다시 상기시킨다. 또한 많은 작업들이 작가의 신화를 피해 사회의 공통화 된 주제들을 향해 갈 때 작업과 작가 사이의 간극은 너무 벌어져 갔다. 이제 작업은 어떠한 지정적인 현상들을 대변 하지만, 그것을 만든 작가의 얼굴과 작업을 함께 보기는 힘들어 졌다. 그녀의 작업은 '새로움'을 위해 앞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지나쳐버린 것들을 다시 돌아보기를 제시하는 듯 하다. 그녀의 작업 자체만 가지고 모든 미술 안의 문제와 더불어 생각할 수 있는 문제를 풀어 간다는 것은 억지 일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녀의 작업을 통하여 우리가 너무 쉽게 앞서가려는 혹은 이제는 유효함을 잃어 버렸다고 빨리 판단되어지는 것들에 대해 다시 한번 재고 할 속성들을 발견 할 수 있다면 효력은 있는 셈이다. 전적으로 새로움이란 사실 존재 할 수가 없다고 생각된다. 아무리 새로운 것들이 있더라도 그것들은 우리들의 과거의 기억들과 연결되어 있고 그것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다. 새로움이란 사실 과거의 것들에 재조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또한 분명한 것은 포스트모던의 맥락은 모던이즘에 반하여 생겨난 일이라는 것이다. 그 중에서 모던이즘의 재현(再現)에 관한 문제는 이제는 그 허구와 정치적인 맥락의 편승 되에 이루어진 것이라 그 효력을 상실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사실 재현은 오늘날 무한 속도 경쟁시대에는 그 기능을 수렴할 수가 없다. 재현의 장치가 설치 가능하고 그 효과가 가능한 시대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 이전의 모든 시각적인 것으로 일어나는 알레고리와 그 프라시보(placebo) 효과는 유효하지 않은가? 혹은 감동을 일어나게 하는 것이 일종의 장치로 구성된 허상이라 하여 내몰아 버리면 우리에게 더 이상 '미술'이라는 이름 안에 남아 있는 컨텐츠들은 무엇이 있겠는가? 분명 '형상'에서 나오는 '이미지'는 유효하다고 본다. 한가지 더 우리가 분명히 집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뒤샹의 변기가 왜 예술인가?'라는 미술사적인 미학 문제가 아니라 '무엇이 뒤샹의 작업을 예술로 가능하게 했을까?'라는 식으로 접근되어지는 '미술 제도'의 문제로 보거나 폭 넓게 '뒤샹의 샘을 예술로 가능하게 한 패러다임은 어떤 것인가?'라는 미술 작품 자체의 문제보다는 미술작업을 보는 시각의 변화를 주목할 필요도 있다.
그녀의 작업들은 다소 눈에 익숙하지 않은 형태와 재료, 그리고 내용들을 보여준다. 형상을 가진 그녀의 작업은 아무리 메시지가 강하더라도 일차적으로는 스스로 말해지고 전달되어야만 한다. 그녀의 작업들은 일단 어떤 인문 과학들 예를 들어. 인류학이나 신화 등과 심리학이나 여타 철학 등이 다소 그녀의 작업들과 관련성도 많이 있겠지만, 아니면 그녀의 작업을 현대미술 혹은 작품과 미학적 관계를 먼저 상정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기보다는 전시장의 작업을 직접 통하여 우선적으로 일체 작업과 여타 관계들을 일단 차단시키고 오브제 자체로만 판단할 수 있는 것들이 우선시 해야 된다고 본다. 스스로 느낌으로 받아들이고 하나의 사건으로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그것들이 의미의 논리를 이루어 갈 것이다. 감상이라 함은 무엇인가 뒤섞이고 마구 충돌이 일어나는 현상일 것이다. 그것이 개인들의 감수성의 차이에 따라 다르게 수용되고 거부되며 형성되는 것이다.
아무런 거부감이 없다는 것은 수상하지 않는가? 달리 말하자면 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 주체와 타자와의 관계, 심리학에서의 안과 밖 문제 등등 이분법 적인 문제에서의 양극의 문제들과 더불어서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많은 부분 도움을 받았던 미술사안의 연속적인 흐름은 한 개인이 혹은 권력이 만들어 놓은 편협한 시대 보기에 다름 아닐지도 모른다. 사실은 우리가 느끼듯이 많은 파편 같은 일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나며 불연속적인 관계로 일어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차라리 미술사안에서 혹은 문화사에서 다루기 꺼려했던 어둠의 역사를 들추어내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회화를 전공한 그녀가 독일에서 한 작업은 입체 작업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는 화판에 오브제를 직접 만들어 붙여 가는 작업들을 해 왔다. 물론 대학교 재학 중에는 물감만으로 그려진 작업도 있지만, 오브제를 직접 화면에 붙인 작업들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보통 전통적인 회화는 작가의 정신적인 면을 보여주기 위해서 유리하게 구성된 화면이 보여진다. 그것은 현실과는 다소 격리되어 또 다른 언어로 캔버스 안에서 머문다. 그것들에 반하여 그녀의 작업은 실제로 오브제가 '여기에 있다'라는 직접적인 물성을 강조하는 반(半) 입체적인 작업과 거대한 입체 작업들이었다. 또한 많은 작업들이 재료와의 마찰을 피해 편리함을 향해가는 모습들과는 역 방향으로 나아간다. 회화에서의 수공성은 작업자체의 밀도를 높이며 정신적인 측면을 위하여 작용한다면, 그녀의 작업은 물질을 다루는 데에 있어 많은 수공을 필요로 한다. 이 부분에서 과연 순수미술이 살아남을 수 있다면 이러한 측면도 필요하지는 않을까?
작가의 작업실에서는 무엇이 일어나는가? 작가는 하나의 공장처럼 스스로 하나의 생산물들을 생산해내는 시각문화 생산자이다. 물론 서구 산업자본주의 속성인 대량생산, 대량 소비와는 턱없이 거리가 있지만, 그래도 그 작가가 최소의 단위로서 생산적인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된다. 이 지점에서 작가는 두 가지 방향의 선택의 길을 들어설 것이다. 하나는 상업갤러리와 동조하여 미술시장으로 나아가거나 다른 하나는 장인의 후예를 자청하고 그 상업시스템과는 멀리 떨어지려 하거나 자본주의 체제에 반대하는 최후의 보루를 고집하는 길이다. 이런 부분에서 그녀와 그녀의 작업이 어떻게 전개되어 나갈지는 여타 작가들과 함께 두고 볼만하다. 마지막으로 예술문화가 엘리트 문화나 특정계급, 신분들의 특권으로서만 제작되고 보여지는 시대에서 이제는 시각문화가 폭 넓게 '동호회', '취미', '마니아' 층처럼 누구나 가능하고 활성화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미술제도권 안의 갤러리에서 보여지는 예술문화가 '작가 본연의 색을 잃지 않고 여타 사람들과 어떻게 공유될 수 있는가?'라는 과제가 남아있다. 혹시 그녀가 전시제목을 "히에로파니"로 정한 이유는 우리에게 이러한 여러 문제들에 앞서서 곰곰히 생각할 부분이 있음을 제시하는 것은 아닐까? ■ 윤제
Vol.20041009b | Y.Y Shim 개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