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el_vision

이상애 회화展   2004_1001 ▶ 2004_1007

이상애_feel_sound_캔버스에 유채_90×90cm_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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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파스 다빈치 서울 마포구 서교동 375-23번지 카사 플로라 Tel. 02_6409_1701

내적인 삶이란 단순히 정신적인 삶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더 확대하여 무의식이라는 기이하고 거대한 영감을 정신활동으로써 그 원천을 찾아내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창작으로써의 정신활동에는 작가 자신의 독특한 직관으로 무의식이나 내면세계를 나타내는데 그것은 내부의 존재감으로 가득 찬 자아라는 정신적 사유에서 기인한 것이다. ● 회화는 재현의 측면에서 파악될 수 없고 감각은 지시될 수 없다. 회화는 오히려 긴장, 리듬, 힘의 측면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감각은 동적인 것이다. 감각은 "하나의 범주에서 다른 범주로, 하나의 층에서 다른 층으로, 하나의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 다른 감각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유일하고 동일한 감각의 여러 다른 범주들이 있는 것이다. 감각은 "다른 무엇으로 환원할 수 없는 종합적인 것"이다. ● 나는 인간의 인식구조에 흥미를 갖고 작업한다. 인간의 인식에 주어지는 대상들을 서술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인간의 감각을 탐구한다고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보는 이로 하여금 미적 이미지의 형식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캔버스라는 이차원의 평면 위에 대상에 투사된 감정을 무의식적으로 서술해 나간다. 인간의 삶이나 세상, 이미지 혹은 행위, 시간 공간과 같은 것들에 대한 인간의 인식은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간접적이고 생략된 언어들로는 쉽게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작품에 좀더 시각적인 형식의 변화를 주면서 그 형식 속에서 인간의 감각과 인식 내지는 지각의 문제로 작품의 주제를 확장해 간다. 여기서 작품은 더 이상 부분들의 구성물이 아니기 때문에 개념의 관념성을 극복하게 된다.

이상애_feel_sound_캔버스에 유채_130.3×162cm_2004

자기 자신을 경험하는 것은 매우 다양한 경로를 갖고 있다. 그들 중 다수는 나와 자연과의 개인적 교감을 통한 것이며 나머지는 나와 상대방을 비교하며 관찰하는 것을 통한 것이다. 후자의 것들은 내가 어떻게 다시 구성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세계에 대해서 인식을 하는 과정 중에는 `예감`이라는 게 있다. 그것은 불가침의 법칙들로서, 인간의 역사적 사례들로 이루어져 있고 탄생과 죽음처럼 `현상의 익숙해짐`에 따라 깨달을 수 있다. 인간이 사물을 응시하는 것은 그들 사이의 차이점이나 관계를 기본 전제로 하고 있다. 이러한 범위에서 자신에 대한 지식은 타자를 응시하는 것 그리고 그들의 시선에 비춰지는 당신 자신을 보는 것에서 나타난다. ● 대상을 실재라고 믿고 다가가는 과정을 상상계라고 한다면, 대상을 언어로 표상하는 것은 상징-symbol계가 된다. 그런데 상징계에서 상징에 의한 언어적 표상은 현실을 제거하는 결과를 낳는다. ● '모리스 드니'가 "그림이란 말이나 사람의 이미지 이기이전에 물감으로 뒤덮인 평면이다."라고 했을 때부터 이미 화가는 필연적으로 자연의 모방으로서의 예술을 포기 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자연의 모습을 재현한다는 것은 그것의 이미지를 표현하겠다는 것인데 , 그 이미지는 이미 이미지 이전에 하나의 얇은 물감의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 만약 화가가 크레파스나 연필을 그렸다 할지라도 그 화면 위의 이미지들은 하나의 연필, 또는 크레파스가 아니다. 그것들은 우리가 손에 쥐고 선을 그릴 수 없는 하나의 이미지일 뿐이다. 화가가 그리는 것은 진실과는 거리가 먼 하나의 거짓된 기호의 나열이며 남을 속이는 '트롱빼이유'라는 자각은 모든 화가들을 참으로 난감하게 만들었다. 화가는 감성과 이성을 동원하여 우주의 참 모습을 찾으려는 구도자이다.

이상애_feel_sound_캔버스에 유채_145.5×112cm_2004

화면 위에 나타나는 형상이나 색 등은 미술에서의 하나의 기호이다. 미술가들은 이러한 기호를 통하여 이미지를 드러내며, 이러한 이미지들은 화가가 궁극적으로 나타내고자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화가는 문학자와 철학자와 마찬가지로 얇은 물감 덩어리의 막이라는 '형식'을 통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그러나 '회화란 물감으로 뒤덮인 평면'이라는 선언 후에는 어떠한 개인의 이야기도 회화 형식을 통하여 표현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회화란 정신의 영역이었던 것이 즉물적인 물질의 영역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 예술의 표현 방법에는 '투사와 포착'이라는 두 가지가 있다. '투사'란 예술가의 내부에 있는 것을 밖으로 쏟아냄을 말하고. '포착'이란 외부에 있는 것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임을 의미한다. 추상 표현주의는 프로이드의 무의식 이론과 연관되어 전적으로 투사에 의한 작업을 하였다. 무의식이 시키는 대로 내부의 잠재된 힘에 의해서 온몸과 팔 등을 통하여 자신의 정신세계가 화면 위에 투사된다고 생각했다.

이상애_feel_sound_캔버스에 유채_160×130.3cm_2004

작가는 매일매일 자신의 내부에 있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쏟아낸다. 그 곳에는 절제란 불필요하며 방만한 만용에 가까운 절대 자유가 있을 뿐이었다. 칸딘스키는 '추상표현주의의 방만한 무절제를 미리 예견하고 그의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관하여』에서 '내적 필연성'의 문제를 제기한다. 즉 하나의 생각이 내부에서 자라 마치, 아이가 엄마의 자궁에서 더 이상 자랄 수가 없을 정도로 컸을 때 필연적으로 태어나야 하듯이, 내적 필연성으로 태어나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즉 내적 필연성이란 그것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절실함을 말한다. ■ 이상애

Vol.20041007b | 이상애 회화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