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4_1006_수요일_05:00pm
관훈갤러리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5번지 Tel. 02_733_6469
'성실하다'나 '정직하다'를 뜻하는 영어단어 'sincere'는'cine cere'라는 희랍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그 원 의미는 '왁스 없음'이었다. 그것은 적지 않은 고대 그리스의 조각가들이 왁스와 흡사한 접착체로 부분적으로 떨어져 나간 조각품을 감쪽같이 붙여 시장에 내다 팔곤 했던, 당시로는 흔했던 사건에서 기인한 것이다. 즉, 그같은 상황에서 정직한 조각가들은 어떻게든 자신의 조각이 접착제를 사용하지 않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야 했는데, 그 한 방편이 'cine cere', 즉 '왁스 없음'이라는 팻말을 자신의 조각에 걸어놓는 것이었다. ● 젊은 작가 최혜광을 소개하는데 있어, sincere의 어원에 관한 이 흥미로운 예화가 매우 적절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만큼 그는 성실하고, 또 자신의 작업을'잘 하는' 작가다. 이 젊은이가 만들어놓은 것들에 주목하게 되는, 우선하는 근거는 이러한 작가로서의 드문 미덕, 즉 그의 성실한(정직한) 인품에 있다. 적어도 내가 보아 왔던 지난 수년간, 최혜광은 자신의 작업에서 결코'왁스를 사용하지 않았다.'그는 정말이지 꾸준하게 돌을 깎고, 연마하고, 광내고, 그리고 그 일체의 과정을 기꺼이 끌어안아 왔다.
나는 그가 지금껏 만들어 왔던 모든 것들이 탁월한 조형적 성취를 보여주었노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의 결과물들은 때로 그 세대의 평균적인 다른 작가들의 것들처럼 덜 세련되고 어설픈 면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그의 이후의 성취에 대한 기대는 흔들린 적이 없다. ● 그가 숱하게 깎아왔던 돌들을 대하는 것만큼이나 깊은 애정으로, 최혜광이 오랜 기간 다루어 왔던 주제는 다름 아닌 '선인장'이었다. 어디 촘촘히 박힌 가시들의 조형적인 매력 때문 만이었을까. 아마도,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안으로 강인한 그 생명력의 소산이 작가를 끝없이 매료시켰을 터이다! 어떻든, 그가 순백의 대리석을 조밀하게 연마해서 다양한 종의 선인장들로 만든 다음, 그것들을 백사를 뿌려놓은 바닥에 가지런하게 설치했을 때의 인상은 마치 순결한 묵상과도 같아 보이는 것이었다. 그것들의 키는 바닥에 깔린 작은 것으로부터 1 미터를 훌쩍 넘는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그 질료로는 때론 오석(烏石)이, 때론 정성스레 용접된 청동이 동원되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에 이르러 최혜광의 작업은 매우 급격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작업은 이제 거대하게 확대된 인물이나 신체의 일부에 대한 사실적인 재현에 중점을 두고 있다. 작업화를 벗어던진 채 잠시 대지-혹 자연-를 딛고 서있는 사내의 건장한 근육질 종아리, 황급히 걸음을 재촉하는, 반짝거리는 신사화와 빨간 롱부츠로 대변되는 도시적인 남녀, 유행하는 금색 구두에 미니스커트를 걸치고 옆구리에 팔을 괴고 서있는 젊은 여성 등이 이전에 선인장의 자리를 대신하는 주된 모티브들이다. ● 그들의 크기는 예컨대 종아리 하나가 족히 3m는 될 만큼'비정상적'으로 거대해, 목을 치켜세우고 한참은 올려다보아야 할 지경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 거대한 스케일들에도 분위기가 조금도 위협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그것들에선 차라리 대중적인 탐정소설에 곁들여지곤 하는 오락적인 뉘앙스마저 풍긴다. 벗어놓은 작업화와 꽃이 만발한 정원의 대비 같은, 소박하고 따듯한 상징들에도 얼마간 의미가 부여될 수도 있다. 원한다면, 미니스커트를 걸친 여성의 곁을 지나면서 그녀의 속옷에 슬쩍 시선을 보내는 속물근성을 새삼 확인할 수도 있을 수 있다. ● 이 거대한 신체의 일부들이 지니는 공통점은 우선 그것들이 우리의 일상사에서 크게 낯선 것들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그것들이 현대 사회의 일상사에 관한, 일테면 넌픽션-다큐멘터리(non fiction-documentary) 같은 것은 더욱 아니다. 정상성(正常性)을 훌쩍 추월해버리는 그것들의 일탈적인 확대는 분명 어떤 해석의 여지를 남기고도 남을 만 한 요인이다. 그것들은 분명 앞뒤의 긴 서사를 압축한 주목해야 할 가치가 있는 어떤 특별한 한 순간, 함축적이고 단서적인 진실을 담지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기묘하게도 이러한 상황에 해석의 출처가 될만한 모든 이념적 영역들로부터 중립을 유지하고 있다. 예컨대 최혜광이 만든 노동자의 굵은 종아리와 작업화는 어떤 구체적인 사회주의적 입장표명이나 역사의식과도 무관하다. 도시나 유행의 문제를 슬쩍 스치는 경우에도, 어떤 특별한 문화론적 배경을 지닌 것 같아 보이지도 않는다. 물론, 일련의 팝(pop)적 저변을 환기할 순 있겠다. 하지만, 문명을 바라보는 한 구체적인 입장을 그 구심에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것들은 영미권 팝의 계보와 분명하게 구분된다. ● 하지만, 이 구분에 있어서의 인식론적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쉽게 다가오고, 친근하게 말을 걸어온다. 최혜광이 최근에 만들고 있는 거대한 것들의 매력이 바로 여기에 있다. 즉, 구체적인 각주가 생략된 모호함이 주는, 혹은 의미의 인식적 방임이 제공하는 친근한 긴장의 완화 같은 것이랄까! 아니면, 관객들은 어떤 중요한 발표가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집회의 청중 같은 위치에 서있을 수 있다. 일테면, 아직 발설되지 않은 서사의 어떤 결정적인 부분에 관해 듣게 될 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갖고 있는 청중, 그래서 불쾌하지 않은 기대감과 상상력이 작동되는, 그런 청중 말이다. 어떻든, 최혜광의 언설은 어떤 결정적인 단서를 보이기 직전의 전략적 생략과 제스춰를 통해 더욱 흥미진진한 것이 된다.
이같은 행보가 성공적으로 진행된다면, 아마 그의 세계는 미술인식의 부자연스러운 규범들을 유희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형식적 욕구를 탐닉하고, 그러면서도 자신의 관객들과의 소통에 친절한 그런 세계로 진보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최혜광이 이제 막 작업의 중대한 전환점을 가지는 젊은 작가라는 점을 고려하면, 그 어떤 이해나 해석도 단정적이어서는 안 될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 어떻든 중요하고 또 다행스러운 것은 그의 작업이 어떤 형식주의적인 이상향을 설정하는 식의 식상한 덫을 아직은 잘 경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 얼마나 많은 작가들이 미술의 형식적, 개념적 궁극을 자의적으로 설정해 놓고, 그것으로 향하는 특급 스타일을 발견하려는 소모적인 노력을 경주하는가? ● 이같은 류 와는 달리 최혜광은 언제나 자신에게 대물림된 부채를 갚아나가듯 작업에 임하고 있다. 그 끝은 분명하지 않지만, -그리고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일하는 현재에 두말할 나위 없이 명백하게 임하는 그런 방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작가로서의 진정한 성공을 재정의해 나가는 대열에 동참하는 것, 그것이 내가 이 청년 작가에게서 보고 싶은 모습이다. ■ 심상용
Vol.20041005c | 최혜광 조각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