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갤러리 아트사이드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4_1006_수요일_06:00pm
갤러리 아트사이드 서울 종로구 관훈동 170번지 Tel. 02_725_1020
여름의 발견 ● 작가에게 주제를 물었다. 한참이나 이리저리 정처 없는 이야기들이 떠 다녔다. 그러나 결국 그녀의 대답은 단순했다. 그리움... 이 짤막한 세 음절을 따라 뭇 사람들, 뭇 이야기들이 스친다. 우리 모두는 추억들을 가지고 있기에 그리움이 무엇인지 잘 안다. 나는 그녀에게 작품을 청했다. ● 갑자기 잠이 깬 듯이 눈이 환하다. 순서를 뒤섞어 놓은 그림책을 보는 것처럼 혹은 매번 다른 이들의 그림을 보는 것처럼 그녀의 작업은 무엇인가 서로 조화가 덜 되어 보였다. 나는 당혹스러웠다. 가지각색인 작품들은 구상과 추상을 쉬이 넘나들었으며, 한편으로는 실루엣으로 그려진 자신의 모습 위에 텍스트가 써져 있기도 했다. 편화처럼 단순한 자화상이 섬세히 그려진 고양이의 모습을 무표정하게 응시하고 있기도 했고, 기괴한 동물들의 눈동자들과 선명히 그려진 하트가 함께 했다.
개인전이라는 것이 한 사람의 작업관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적어도 그 안에 놓여 있는 작품들은 어느 정도 한 목소리를 가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녀가 보여준 작품들은 적잖게 혼란스러운 것들이었다. 나 역시 미술가인지라 전시를 앞둔 무렵이면, 언제나 이러한 문제를 피하기 위해 고심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여름의 작품들 속에선 그 혼동을 잠재워 줄만한 연장선을 발견해내기란 쉽지 않았다. 참으로 어려운 말을 붙이기 어려운 작업들이었다. 특별한 재간을 부린 것도 아니요, 오묘한 아우라가 넘쳐나는 것도 아닌, 무심히 날 보고 있는 작품들 속의 눈동자들이 그러했다. 이렇게 그녀의 낮선 작품들은 날 골려대고 있었다. ● 그리움이라는 주제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어느 정도의 작업을 예상하고 있었다. 아늑함, 갈망, 기쁨, 두려움, 외로움, 불안 같은 낭만에 둘러싸인 전시장을 말이다. 이 익숙한 주제는 우리가 그에 대해 잘 안다고 하는 만큼 걸 맞는 이미지들을 가진다. 그러나 이여름의 작품 속에서는 그런 것들이 없었다. 10여 개의 작품들이 10여 가지의 색채를 뿜어냈지만 그 누구 하나 확실한 그리움을 이야기하진 않았다. 표현적이며 서정적일 것이라 믿었던 내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 때 그녀가 순진한 미소로 말 한마디를 덧붙였다. "발견하는 순간이야" 문득 그 말들에 따라 내 머리 속에 있었던 갖가지 상념들이 바삐 제자리를 찾아갔다.
그리움을 발견하는 순간을 말하려는 것인가? 나는 그제서 작품을 제대로 바라본다. 그녀의 작업은 내가 기대했던 감정의 폭포가 아닌 것이다. 애초부터 그런 것이 없었다. 우둔한 내 머리를 탓하면서 찬찬히 다시 작품들을 바라본다. 왜 작업들 속에 눈이 강조되어 있는지, 왜 이리도 다양한 작업들이 함께 하는지 이해되는, 내게도 발견의 순간이었다. ● 그녀가 그려낸 것은 그리움 자체가 아니다. 그 감정을 소유하는 주체인 자신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것이다. 그리하여 주인을 기다리는 듯한 고양이의 모습이 거기에 있었으며, 반짝이는 눈동자의 모습이 그러하다. 복사된 듯한 그러나 무엇인가 조금은 달라진 세 개의 자화상 역시 그녀의 수많은 그리움들 중 하나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삶 속에서 시시각각 변화해 나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담아내면서, 그 순간을 각인하는 수단으로 그녀의 작품이 존재했다. 다시 말해서 다양한 자신의 삶의 순간들을 일기처럼 그려낸 것이다. 결국 이여름이 선보인 다변하는 작품들은 그녀의 삶 자체를 투영한다. 그래서 그 모습이 아무리 다양할지라도 그림 속에서 그녀가 그리도 바라보고 있는 것은 그녀 자신인 셈이다.
삶이란 다채롭다. 그것에 어떤 반론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은 굳이 다른 이의 삶과 비교해보지 않더라도, 자신의 삶, 그 하나의 삶 속에서도 그러하지 않은가? 누구를 만나고, 어떤 일을 겪으면서 오늘까지 이어진 내 자리에는 그림자처럼 길게 남아 있는 기억의 순간들이 있지 않던가? 온전히 내 것이면서 동시에 나름대로 자신의 모습을 가진 내 기억들. 그 속엔 내가 알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놓여 있으며 그 총체가 바로 나 자신인 것이다. 다시금 그리움이라는 단어가 머리 속에 떠올랐다. 그것은 나에게서 나와 내게로 돌아온, 내 존재감 만큼이나 소중한 것들이었다. ● 무수한 크고 작은 담론들이 난무하는 우리의 시대 속에서 사뭇 명랑한 재주를 부리는 어린아이처럼 진솔한 그림을 그려낸 그녀가 무척 투명해 보였다. 비록 작품에 커다란 이슈와 형식적인 진기함이 없을지라도 이여름은 담담히 자신의 이야기를 그려냈다. 자신이 어떤 모습이었음을 기록하는 증거로써 그녀의 자화상들이 있다. 이러한 그녀의 작품을 앞에 두고 나는 자문했다. 친구로서 그리고 동료로서 이 순진함에 덧붙일 말이 필요 없지 않겠는가? 왜냐하면 적어도 그것이 미술이 가지는 원초적인 매력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저 어둠에서 하트로 변해 가는 그녀의 그림처럼, 수많은 변화 속에도 결국은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서 있기를 바라며 그녀의 작품을 즐거이 바라보았다. ■ 한진수
Vol.20041005b | 이여름展 / iurum / 李여름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