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king for a minute

창동미술스튜디오 '잠시 주차중...'展   2004_1006 ▶ 2004_1012

Parking for a minute_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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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4_1006_수요일_06:00pm

참여작가 자겁실 / 김재원_송지훈_최진아 maranata / 필승_나얼_지승학 연구공간 '수유+너머' / 신지영

국립현대미술관 창동미술스튜디오 서울 도봉구 창동 601-07번지 Tel. 02_995_3720

1. '나'이며 '삶 자체'인 작업실. ● 베이컨의 작업실은 더럽기로 유명하다. 마구간이었던 곳을 개조하여 죽을 때까지 사용했다. 그곳에 들어와 본 사람은 손으로 꼽을 정도였고, 그가 작업하는 동안엔 아무도 들어올 수 없었다. 지저분하고 좁은 복도를 통과해야 들어갈 수 있는 작업실 안에는 잡다한 도구, 잡동사니, 찢어진 그림, 벽에 시험삼아 칠해본 물감, 마구 쌓여있는 종이쪼가리와 옷들이 뒤엉켜 있다. 녹슨 둥근 거울을 배경으로 낡은 라지에타를 왼쪽에 두고 두 손을 맞잡고 앉아, 사진을 보는 우리의 시선을 도전적으로 되돌려주는 베이컨의 단단한 표정. 자기 자신을 향한 철저함과 확신에 찬 열정은 좁고 지저분한 작업실을 뚫고 폭발했고, 아직도 그의 그림이 보여주는 감각의 움직임들은 우리를 강렬하게 치고 지나간다. 바스키야에겐 온 세상이 작업실이었다. 그의 화폭은 맨해튼 거리의 벽들이었고, 그의 삶은 낙서처럼 거리에서 이루어졌다. 그의 낙서들을 맨해튼 거리에서 떼어낼 수 없듯이, 그의 삶은 그의 작업과 동시에 전진했다. 아침, 공원 한 귀퉁이의 종이 상자 속에서 부스스 일어나는 바스키야의 눈에서 나는 이런 것을 본다. 얼마나 멋진 일인가? 눈을 뜨면 온 세상이 작업실이고, 모든 벽이 화폭이 되고, 그것이 삶의 리듬과 전혀 다르지 않은 별세계가 펼쳐져 있다! 베이컨과 바스키야는 작가나 작품을 넘어선 강렬하고 유목적인 삶 자체로 부각된다.

김재원_粉紅 키우기_2004

수동의 버리기 연습과 능동의 키우기 연습_관계의 끝말잇기는 이미 '대체'적인 미술적 발상을 잃어버렸고, 단순한 덩어리의 '살'들을 양육시키고 있다. 그 덩어리들은 화분에서 씨앗으로 출발하지 않으며 미술에 의해, 미술의 능동에 의해 생산되고 형태를 잡아가고, 결국 '空盆'에 심어지고 가꾸어진다. ● 참고_수동의 버리기 연습은 개인적 「관계」미학의 필요조건인 동시에 충분조건이지 못함에 불필요불충분조건임을 인식하여 제거함을 말한다. 능동의 키우기 연습은 개인적 '관계'미학의 정신적, 심리적, 신체적 장애의 경계선을 모두 지운 상태에서 시각화하는 데 집중하는 재배기술로의 전환점을 말한다. ■ 김재원

작업실, 작가, 갤러리, 이것이야말로 '작품'과 '미술'의 권위를 촘촘히 짜내는 그물 같은 것 아닐까? 그럼에도 작업실은 보다 은밀한 꿍꿍이를 벌이는 공간이 될 수 있다. 내밀하지만, 밖으로의 돌출을 준비하는 작가와 세계 사이의 흔들리는 중간이다. 전시 '잠시 주차중' 은 작업의 의미를 전면적으로 질문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자겁실'과 'maranata', 두 작업실의 작가들은 선택될 때까지 기다리거나, 모든 작업요건이 갖추어질 때까지 작업을 미뤄두지 않았다. 이 지금, 이 순간, 솟아오르는 강렬함을 표현하기 위해 우연히 만나 힘을 모았고, 작업할 공간을 만들었고, 보여줄 공간을 찾았다. 작업 전에 집부터 지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집이 왜 필요한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이들의 작업활동은 그 방향이 유목적이다. 이들은 자기동력으로 움직이는 자동차와 같다. 작업이 중요했고, 그 무엇보다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이 중요했다. 남기고 재현하려는 것이 아니라, 변하고 표현하려는 욕망! 그것이 각각 세 사람씩 만나 '자겁실'과 'maranata'라는 소박한 공간에서 동거하게 된 사연이다. 그리고 작가의 삶을 구성하는 반복되는 시간 속 어느 한 순간, 아주 자연스럽게 두 작업실의 작가들이 만나게 된다. 그 우연한 만남이 작업욕망을 자극했고, 전시를 기획하게 된다. 이 표면적 사실 뒷면엔, 표현하고자 하는 밀어 올라오는 강렬도가 닮음꼴로 놓여있다. 따라서 이들에게 작가라는 레테르, 작업실, 작업을 보여주는 갤러리라는 명확한 영토성이란 이미 무의미한 것일지도 모른다. 표현과 자신을 한 몸으로 느끼고 작업을 계속하는 한, 이들이 부딪치는 매 순간이 이미 작업중이다. 따라서 이들에겐 어디든 작업실이 될 수 있고, 이들은 어디든 갤러리로 이용할 수 있다. 발 딛는 모든 곳이 하나의 삶이고 작업이고 길이다. 더 이상 '자겁실'이 서울 변두리에 있다는 것이, 'maranata'가 시골에 있다는 것이 서로를 구별짓는 것으로 작동하지 못한다. 김재원, 송지훈, 최진아가 동거하는 '자겁실'이 정필승, 나얼, 지승학이 동거하는 'maranata'와 자연스럽게 섞이고 우연히 자극을 주고받으며 흥미진진한 사건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은, 이미 그들 각각이 여러 갈래의 길로 섞이고 헤어지며 표현의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의 작품은 전시를 보러 오는 그 누군가와 우연히 만나, 또다시 새로운 작업으로 끊임없이 시작될 것이다.

송지훈_meta·game#121-emotional eyes_컬러사진_2004
송지훈_meta·game#122_잘 못하는 것들_사진과 설치_2004

이번 작업은 색들이 갖을 수 있는 여러 의미들을 갖고 한 작업이다. 색들이 갖는 사회 문화적, 역사적 혹은 사전적 아니면 감성적 의미들이 있을 것이다. 그 느낌을 각자 어떻게 느낄 것이며 그 느낌을 어떻게 즐길 것인가... 각자 한번 이 게임을 실행해 봅시다. 이 게임의 룰은 느끼는 대로 느끼기입니다. ■ 송지훈

2. '잠시주차중'인 작업에 접붙여진 글쓰기. ● 작업이 어느 한 순간의 우연한 부딪힘에서 시작되는 것처럼, 이번 전시에 글로 참여하게 된 나는 또 하나의 우연한 만남이다. 여섯 명 중 네명과 점차 친밀한 관계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그들의 작업과도 만났다. 김재원, 송지훈, 최진아의 '자겁실'은 언제든 사람들로 들썩인다. 나는 이들이 처음 모여 작업실을 만들 때의 설렘까지 이해할 수 없지만, 서로를 동거인으로 부르는 이들은, 이 공간에서 서로의 내밀한 부분까지도 부딪히고 밖의 사람도 끌어들이며 작업과 삶과 한판 싸움을 벌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필승, 지승학, 나얼의 작업실 'maranata'는 자주 얘기를 나누게 되는 필승과 그의 작업을 통해 상상해 볼 뿐이다. 그러나 나는 작업실을 찾아 헤매던 때의 이야기와 작업실을 만들 때의 이야기를 이 두 작업실 친구들을 통해 들었다. 그래서 내게 이 두 그룹들이 보여줄 작업은, 베이컨의 작업실처럼 각자가 내밀한 열정을 부딪치는 깊이의 공간이기도 하지만, 바스키야가 거리를 온통 낙서로 채우고 다닌 것처럼 이들이 움직이는 발걸음마다 새겨진 하루 하루의 흔적이기도 하다. ● 그렇다면, 지금 이들의 전시에 대해 쓰고 있는 나의 행위는 무엇일까? 이들의 작업은 이미 공간이기도 하고 시간이기도 해서, 작품이기도 하고 삶이기도 해서, 세상과 소통하는 더 이상의 매개가 필요치 않을 듯하다. 더구나 그들의 작업보다, 그들이 말하고 사람을 사귀는 방식, 돈을 버는 방법, 밥을 먹고 놀고 생각하고 고민하는 과정을 먼저 만난 나로서는, 그 과정들까지도 얘기해야 할 것 같은 마음과, 강렬하게 방점을 찍어야 할 문제의식 속에서 끊임없이 유동한다. 나는 이번 전시에 단순한 비평가로 참여하지도 않았고 그럴 수도 없다. 나 또한 글쓰기의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보여줄 수도 있었다. 노트북을 가져다 놓을 수도 있고, 부끄러운 일기처럼 끄적거린 수첩을 가져다 놓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를 반쯤만 제시하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잠시주차중'인 자기 동력 기계들 위에 더 비스듬히 주차하고 있는 글의 위치이다. 이번 작업실 전에 참여하는 작가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작업을 생산하는 자기 동력을 가진 작업실이 될 수 있듯이, 나는 작업실인 이 모든 사람들에 기생하는 또 하나의 작업실이다. 말하고 싶은 것은, 미술비평은 작업이 만들어지는 순간이나 전시가 이루어지는 순간을 거세해 버리고 완성된 작품에 대해서만 말하거나, 비평가의 폐쇄된 공간 속에서 이루어져선 안된다는 본능적인 깨달음이다. 작가나 작품에 접붙음으로써만 씌어질 수 있는 미술에 대한 글쓰기가, 단순한 잡답이나 순진한 단정적 비평, 어설픈 충고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동력을 가동시켜 줄 수 있는 보다 포괄적이고 우정어린 비판적 글쓰기가 되기를 꿈꿔 본다.

최진아_쉼표도 없이 마침표도 찍지 않고_2004

3. 여섯 개의 작업기계가 서로를 자극한다. ● 이번 전시는 각자가 지닌 동력을 확인해야 하는 순간이다. 서로에게 '잠시 주차'하며 서로를 자극할 각자의 특이성이 서로를 어디까지 견인해 갈 수 있는가를 확인해보는 실험실이다. 물론 여섯 명의 작업은 모두 다르다. 그럼에도 두개의 작업실이 다른 분위기를 지닌 것처럼, '자겁실'과 'maranata'의 사람들은 이번 전시에 낼 작품을 작업하는 태도에서 차이를 보여준다. '자겁실' 쪽은 '잠시 주차중'이라는 주제나 '작업실'에 큰 의미를 두기보다, 어떤 작업을 할 것인가에 더 큰 관심이 있다. 굳이 '잠시 주차하는 작업'이라든가 '삶 전체가 작업'이라는 설명을 작업 안에 개입시키지 않아도, 자기 동력을 지닌 작업실의 의미가 체화되어 있다. 그래서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작업이고 그 작업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의 문제다. 김재원은 이번 전시에서 기존의 작업과의 모종의 단절을 모색하고 있는 것 같다. 스스로 '재배기술로 전환한 미술'이라고 표현하는 살덩어리들은, 기관도 관계도 미궁인 채로 양육된다. 그런데 그 양육은 정해진 토양을 갖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건 비집고 태어나고 증식된다. 이미 규정된 관계나 신체 혹은 미술의 문법이 아니라, 살 자체가 능동적으로 증식하고 자신이 무엇인지 얘기하길 바란다. 포도 알갱이처럼 늘어나고 떨어져 번식하는 그의 살덩어리들이 무엇이 될는지는 물음표로 남겨져 있다. 그러나 우리가 봐야 할 것은, 궁극적으로 무엇이 되느냐가 아니라, 그 과정들이 얼마나 능동적이며 예상치 못한 가능성들까지 가질 수 있는가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의 변화는 다음 작업을 위한 새로운 실험대 위에 올려져야 한다. 특히 그는 이 작업이 이루어지기까지의 드로잉을 함께 전시한다. 작품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과 전시된 작품을 함께 보여줌으로써, 순간순간의 뿌리를 내리고 변이하는 작업의 증식과정을 전체적으로 드러내고자 한다. 송지훈은 새로운 색깔의 문법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눈의 색깔을 통해 드러나기도 하고, 비이커에 담긴 물체를 통해 드러나기도 한다. 이것은 색깔을 통해 이루어지는 게임이다. 사람들은 송지훈이 제시한 게임에 따라갈 수도, 거부할 수도, 무관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송지훈에게 작업이 갖는 의미는 그의 작업이 게임의 문법을 차용한다는 점에서 보다 의미심장하다. 그에게 작업은 그를 옭아매는 상투적인 지표들인 나이, 결혼, 부모들의 기준, 스스로 감당할 수 없거나 감당하기 싫어 미숙함으로 비춰지는 것들과 벌이는 게임이기 때문이다. 최진아는 이번 전시에서 혹독한 열병을 앓고 있다. 작업실에서 동거하는 동료들과 결별을 선언해야 할지라도, 적당한 타협 속에서 작업하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참여했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최진아의 선언은 이번 전시인 '잠시 주차중'이 서 있는 자리가 어딘가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완벽한 작품'이 아니라 '이 순간에 절실한 무엇'을 위해서, 차라리 빈 작업대를 가져다가 전시할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이끈 이 선언은 작업의 시작이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질문한다. 이 질문은 전시 참여자 모두에게 '잠시 주차중'의 의미를 다시금 짚어보게 했다. 그리고 그들은 수없이 갈라지는 관계의 선들 속에서 작업을 부여잡기 위해 아직도 서로에게 잠시 주차중이다. 아마도 수많은 질문에 시달렸을 그 과정 속에서 최진아가 선택한 것은 털작업이다. 나는 앞으로의 최진아의 작업이 막아도 막아도 막을 수 없이 자라는 털처럼 자발적 능동성의 지대를 보여주길 기대하고 있다. 대개 작업실이 있고, 작품이 직업으로 주어지면, 그때의 능동은 대단히 수동적인 의무 속에 진행되기 쉽다. 더구나 수많은 관계들로 얽힌 작업실에서라면, 그리고 이미 작업실 아닌 곳에서도 수많은 관계의 그물 속에 있는 작가라면, 작업과 삶을 분리하고 수동적으로 나눌 수밖에 없다. 여기엔 생계와 미래에 대한 상투적 기대 속에 수동적이 되기 쉬운 젊은 작가들의 작업 조건이 아킬레스건으로 가로 놓여 있다. 눈썹에서, 얼굴에서, 음부에서, 은밀한 곳에서 끊임없이 자라나는 털은, 관리와 통제와 감춤의 대상이다. 그러나 동시에 어떤 관리와 통제와 감시의 상황 속에서도 막을 수 없이 비집고 나온다. 최진아는 이번 작업을 통해, 털처럼 비집고 나오는 능동

필승_핑크미니카_혼합재료_2004
필승_핑크미니카_혼합재료_2004

4. 강렬하고 끊임없는, 단기입주 7일 ● 여섯 명의 활동이 지닌 특이성이 서로를 자극하며 작업실이란 영토성을 벗어던졌듯이, 이제 이들의 '스스로 선택한' 전시는 '입주작가 스튜디오'라는 창동 스튜디오의 시스템을 관통하려고 시도한다. 여섯 작가들은 창동스튜디오의 '선택되는' 전시 방식에 대해 '스스로 선택하는' 전시 기획으로, '고정된 작업실에서의 작업과 결과물'이란 시스템에 대해 '작업 자체를 위해 움직이고 만들어지는 작업실'이란 문제제기로 출구를 뚫고자 했다. 견고하게 고정된 작가, 작업, 작업실, 갤러리란 창동 스튜디오의 영토성이, 이들의 '잠시' '주차' '-중'을 통해 변화의 기회를 맞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번 기획에서의 갤러리와 작업실의 경계를 허물며 선별되는 행위는, 선택받고 선택당하는 기존 방식과의 차이를 생산한다. 창동 스튜디오 또한, 작업할 작가와 작업의 욕망이 없다면 완전히 빈집일 뿐이란 점에서 작업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 던져지는 곳이기도 하다. 창동 스튜디오는 '잠시 주차'할 이들의 탈주와 섞이며, 새로운 영토성을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탈영토적인 이들의 작업활동을 통해, 궤도를 이탈해 뻗어나가는 표현의 한 순간을 부여잡는, '단기입주'의 공간적 성격을 더 명확히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얼_mitocondria eve / juke box_혼합재료_2004

그것이 이번 전시가 주차중이지만, '잠시' 주차중인 이유이고, 무엇보다 다시 뿌아앙 길떠날 작업에의 웅성거림으로, 모든 불편한 관계와 좌절시키는 능력과 생계에 대한 두려움을 뚫고 '-중'으로, 엔진 폭발직전인 이유이다. 무엇보다 기대되는 순간은, 이 전시의 디피와 오픈이다. 이들은 각자의 디피 장소를 정하지 않고 즉흥적으로 서로를 침투하기로 했다. 그간의 작업과 보여주려는 과정들을 들고 창동에 '잠시 주차'하러 가는 이들은, 갤러리 안에서도 서로에게 잠시 주차하거나 서로 불법주차를 벌이는 차들처럼, 각자의 공간들을 침투하거나 자극하며 섞여들 생각이다. 그것이 얼마나 흥미로운 퍼포먼스로 벌어질는지 아직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들 한명 한명이 자기 동력을 지닌 작업실이라면 새로운 자극을 기대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작업과 표현에 대한 강렬도로 이루어지는 이번 전시를 통해, 작가, 작업실, 갤러리라는 영토성의 두꺼운 지층을 뚫고, 잠시 주차하는 모든 곳과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을 변화시킬 이들의 힘찬 '자기동력'을 확인할 수 있기를 바란다. 중력을 이기며 비상하는 새는 오직 자기의 두 날개의 힘으로만 난다.

지승학_드로잉_2004

이번 전시 이후, 이들의 행로가 궁금하다. 여섯 개의 길들이 어떤 우연한 만남을 통해 또 다른 여러 길들과 섞여들 것인지... 그래서 전진 혹은 후퇴라는 전통적인 길의 의미로부터도 어떻게 탈주하며, 길, 혹은 작업과 삶이라는 그 자체의 의미를 변화시킬 것인지... 어떻게 매번 끊임없이 시작하는 길이 될 수 있을 것인지... 나는 이들의 작업실이 언젠가는 결별해야 할 때가 오리란 걸 안다. 나 또한 그렇다. 그러나, 동시에 이렇게 생각한다. 이별이 용감하려면, 서로가 서로를 더 강렬하게 자극할 수 있어야 한다고. 자신이 가장 존경하고 좋아하는 사람을 질투하는 그런 건강함으로, 문제를 회피하지 않으려는 그런 완강한 애정으로, 각자가 더 단단히 설 수 있도록 가장 먼저 서로를 비판할 수 있는 사이가 되어야 한다. 서로에게 스며듦으로써 이루어진 이들의 단기 입주 7일의 경험이, 장기 입주의 경험보다 더 강렬하기를! 평생의 유목을 추동할 수 있는 각자의 동력을 진정으로 자극하기를! 마지막으로 『다다』의 한 구절을 인용해, 이렇게 모여 서로를 자극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의 관계에 하나의 힌트를 남겨놓고 싶다. ● "비록 바로 직전까지 우리들 중의 그 누구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도 없었건만, 이제 우리는 괴상한 발레를 보고 있을 때처럼 생각할 수도 없는 물품들로 우리가 휘감겨 덮여지고 우리들 서로의 생각을 통해 서로가 한술 더 뜨게 되는 기이한 움직임을 겪게 되었다." ■ 신지영

Vol.20041004b | Parking for a minute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