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안경진展 / ANGYEONGJIN / 安京眞 / sculpture   2004_1006 ▶ 2004_1012

안경진_바다를 볼수 있는 창_한지와 합성수지에 아크릴 채색_100×1200×15cm_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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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4_1006_수요일_05:00pm

기획_Anet / 후원_2005 울진 세계 친환경 농업 엑스포 조직위원회

인사아트센터 5전시장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Tel. 02_736_1020

울진으로의 여행 ● 안경진의 작업은 여행을 통해 일상의 침잠에서 재생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그의 작품들은 재현적인 요소와 내러티브에 가까운 설치들이 주종을 이룬다. 영상의 도입이나 캐릭터를 사용하고 있는 점들도 주제의 무거움을 가볍게 다루고자하는 하나의 방법이 된다. 어쩌면 삶 자체가 무거움에 길들여져 허덕이기보다는 이를 가뿐하게 감당할 수 있는 여력에 더 초점을 맞추는 때문인지도 모른다.

안경진_멍_혼합재료_250×220×220cm_2004

그의 전시는 하나의 플롯을 설정하고 단락을 구분 짓는 구성적 요소가 효과적으로 사용되고있다. 전시장을 들어서며 만나게 되는 작품인 「멍」에서 그가 제시한 인물은 가로막아선 빌딩의 숲에서 창문을 통해 관객과 조우한다. 부채꼴로 집중된 건물의 벽을 돌아서면 약간은 공허한 인상의 한 남자와 마주하게 된다. 벽을 앞에 둔 인간의 존재는 상징적인 삶의 난관과 좌절을 상기시키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비관적인 결정론으로 직행하는 것은 아니다. 생명체의 부화도 일종의 가사상태인 우화기를 거치듯 겉으로 드러난 것이 모두는 아니라는 말이다. 동음이어적 유희로 그가 사용한 이 제목은 그래서 한편으로 종잡을 수 없는 일종의 휴지기, 내면으로의 첫 걸음을 밖으로 난 창의 시각적 메커니즘으로 대신하고 있는 듯 하다.

안경진_대게 큰 대게_혼합재료_230×100×50cm_2004

이러한 현대인의 일면은 「점심시간」이라는 작품에서도 발견된다. 배를 채우기 위해 그리고 다시 일을 하기 위해 먹을거리를 찾아 나서는 수많은 군중의 집합들 속에서 불거져 나온 개인이란 찾아보기 힘들다. 그들 하나하나는 서로 다르지만 집합으로 구분되는 생명체라는 점에서 이들의 개성에 주의할 수 있는 세심한 배려보다는 개미같은 군중에 불과하다고 느끼기 쉬운 것도 여전히 사실이다. 테라코타로 제작된 사람들, 작은 토우는 웅크린 어깨와 작은 머리들로 바닥을 메우고 있고 이 토우들을 뱉어내고 있는 건물들은 등신대의 어두운 입방체로 공간을 점거하고 있다. 앞서 「멍」에서 발견했던 벽처럼, 곳곳을 막아선 건물과 건물들 사이로 울려나오는 군중들은 이미 길들여진 파블로프의 반사법칙에 충실할 따름이다. ● 길을 돌아 관객을 가로막아선 「목격자」의 경우, 죠지 오웰의 빅브라더가 통제하는 사회, 그 현대인의 관음증을 연상시키는 감시카메라가 나타난다. 무법자처럼 도로를 달리다가도 양처럼 순한체 브레이크를 밟게 하는 숨겨진 권력의 도구, 아니 어쩌면 우리의 주변에서 스스로를 감시하는 우리자신의 뒤꼭지처럼 숨길 곳 없는 치부마저 드러내버린 듯한 당혹감을 카메라의 시선은 말해주고 있는 듯 하다.

안경진_점심시간_철, 테라코타_가변크기_2004_부분
안경진_점심시간_철, 테라코타_가변크기_2004_부분

한편으로 작가의 시선과 관객의 시선을 함께 겹쳐내고 있는 영상도 있다. 안경진의 「길」은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는 차안에서 바다쪽으로 향한 시선을 암실 벽면에 뿌린다. 그러나 이화면은 또 하나의 카메라로 녹화되고 있는 중이며 이 화면이 떠있는 모니터에는 관객자신의 모습도 담겨있다. 일종의 자기복제라는 시퀀스를 결합한 이 영상작업은 도시를 떠나 재생의 의지로 일상성을 깨뜨리고자하는 작가의 의도를 보여준다. 화면이 주는 현장감은 바다와 연한 길을 달리며 시작하고 한 마리의 새와 함께 여행하고 있음을 알게된다. 허공의 점으로 정지해 있는 듯한 새의 비행은 일출과 함께 마감되고 관객은 일련의 간결하고 상징적인 이미지 여행을 함께했던 동반자로 참여하는 것이다. 어쩌면 사뭇 통속적일 수 있는 영상들에 관해서 작가가 답사했던 울진으로 잠시나마 동반했던 존재를 카메라 앵글에 빨아들일 수 있었던 행운은 작위적으로 연출된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채록된 기억의 편린임을 새겨둘 필요가 있다.

안경진_목격자_혼합재료_230×100×50cm_2004

「월송정」과 「대게 큰 대게」는 안경진에게 자신의 일상을 돌아보게 하고 아울러 예기치 못한 생의 암시와 재생의 과정에 이르게 한 도정의 한쪽 끝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행은 잠시 다녀오는 길이라는 의미에서 단선적이기보다는 순환적인 측면을 지닌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이 없음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홀로됨을 준비하고 다시 제 안에서 거듭날 생의 활력을 기대하는 마음은 충분한 보상을 얻는 것이 아닐까. 한편으로, 「월송정」의 경우 비어있는 난간으로 처리된 부조의 화면은 일종의 파노라마적인 구성을 보이며 「목격자」의 시선과는 달리 감시나 관찰이 아닌 포용력과 수용의 의미가 짙어보인다. 종이부조로 채색된 자연의 모습이 건물의 방해 없이 온전한 하나의 장면으로 느껴지는 점도 눈여겨 볼 만 하다. 그가 기념화한 울진의 모습은 상징화된 캐릭터와 천혜의 자연 두! 가지 모두를 아우른다. 대게의 집게발과 캐릭터의 인공적인 특성은 재기어린 표정을 굳이 감추지 않는다..

안경진_점심시간_철, 테라코타_가변크기_2004_부분

「또 다시」라는 작품에서 회귀하는 우리의 일상은 그리 녹녹치만은 않은 듯 하다. 좁은 공간을 마름한 문의 손잡이 바로 위쪽 렌즈를 통해 밖에서 바라본 내부의 모습은 턱없이 넓고 생경한 공간을 담고있다. 이런 역설적인 공간감은 알고보면 작은 시각적 트릭에 지나지 않지만 관객으로서는 의아함과 함께 또 다른 인식의 변화를 통해 물리적 공간과 시각적 공간을 동일시 할 수 있다는 힌트를 얻게된다. 삶의 현장에서 우리가 떠나려 애쓰는 이 자리는 또 다른 누군가가 그토록 원하던 목적지 일 수도 있으며 결국 비집고 들어가는 문은 열고 나오려는 해방의 공간일 수도 있음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작가가 제시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일상성을 부정한 회피의 여행이 아니라 다시 돌아와 새로운 모습으로 그 자리에 선 재생의 과정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안경진_길_영상설치_2004

안경진의 전시에서 보여지는 다양한 화법은 근본적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시각적 이미지들과 메커니즘을 이용한다. 가벼운 르포의 형식이자 메모에 가까운 작품 하나 하나의 단상에서 그가 말하는 여행이라는 의미는 굳이 철학적인 잣대로 마름질해야 하는 것이 아닌 문자 그대로의 여행이기도 하다. 그가 사용한 토우의 집적이라든가 동음이어의 유희, 혹은 영상의 자기복제와 같은 방법론은 얼마간의 농담기가 서려있는 일종의 차용이다. 그의 건강한 사색은 이러한 도구들을 거리낌없이 자신의 내러티브로 사용하고 관객을 향해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을 듯 하다. ■ 서원영

Vol.20041002c | 안경진展 / ANGYEONGJIN / 安京眞 / sculpture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