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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4_1001_금요일_05:00pm
갤러리인데코 서울 강남구 신사동 615-4번지 Tel. 02_511_0032
영원과 순간의 조우(遭遇) ● 화가 방희영이 우리의 눈앞에 보여주는 것은 꽃과 템페라이다. 그러나 그가 우리의 내면의 눈과 귀에 들려주는 것은 실로 섬세한 통찰의 빛과 소리이다. 순간과 영원의 접점에 서서 실존적 개체로서 그의 몸과 마음이 체득한 절망, 흐느낌, 그리고 깨달음과 소망이 캔버스에 응결되어 있다. 프레스코와 더불어 15세기까지 유럽 화가들의 눈과 손을 지배했던 과거 미술사의 템페라는 이제 방희영의 땀이 밴 손길을 거쳐 21세기 지평 위에서 새롭게 부활한다. ● 방희영의 템페라 그림들을 통해 우리는 디지털 시대의 기계성과 반복성에 대한 도도한 도전을 발견한다. 그는 직접 캔버스를 만들고 매체를 만들면서 기성품들의 행렬을 비껴간다. 제조과정을 거쳐 획일화된 매체적 특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유화 물감과는 달리, 템페라는 안료와 화가가 원하는 상태의 모제(medium)를 직접 조합 반죽하여 사용하며, 그럼으로써 작품의 표면에 밀착시킨다. 말하자면 템페라는 매번 새로운 매체로 결정화된다. 그렇기 때문에 방희영의 템페라는 때로는 투명하고 때로는 불투명하다. 그리고 수채화처럼 평면적이지 않고, 긁혀진 자국과 도드라진 양각(陽角), 강한 힘과 유연한 흐름들을 아우르고 있다. 캔버스의 어느 한 구석도 방희영의 브러시 스트로크와 손놀림, 숨결, 땀이 배지 않은 곳이 없다. 이것은 화가로서의 방희영과 그림 사이의 필연적 관계를 보여주며, 삶의 시간들이 매체의 물질성으로 체화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그의 그림에서 물질적 필연성과 우연성은 서로 융합되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융합은 방희영의 열린 시선을 통해 주제의 개방성과 맞물리면서 해방을 경험한다.
그러면 방희영의 그림의 개방성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나는 그것이 꽃의 운명을 대하는 방희영의 애정 어린 시선과 깊은 묵상으로 포착한 부유적(浮游的) 이미지에 있다고 생각한다. 꽃은 흙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하늘과 태양을 향해 가지를 뻗고, 그 아름다움과 향기를 아낌없이 대기 속에 흩뿌린다. 따라서 꽃의 이미지는 정지(停止)와 부유성을 함께 아우르는 메타포이다. 특히 방희영을 매혹하는 등꽃의 찬란함은 찰나적 삶을 충실하게 살고난 뒤에 결코 자기의 죽음을 서러워하지 않는, 담백한 초월의 기백을 반영한다. 이것은 날마다 자아의 죽음을 경험하며 다시 태양처럼 떠오르는 화가 방희영의 모습이기도 하다. 시선을 사로잡는 꽃의 일시적인 영광은 스스로를 뽐내기보다, 더 크고 심오한 우주의 언어에 귀를 기울이며 자신을 봉헌한다. 이 점에서 방희영은 꽃의 이미지 자체에 탐닉하고 몰입했던 오딜롱 드롱[Odilon Redon]과 커다란 차이를 보여주며, 꽃의 이미지를 심오한 영적 차원과 접목시킨다. 이것은 마치 영국 철학자 버클리가 묘사했던, 신의 정원에 서 있는 나무의 이미지와도 흡사하다. 매순간 나무의 모습은 다르고 일시적이지만, 그것이 신의 시선을 받고 그의 마음에서 의식되는 한, 그 나무는 영원의 축과 맞닿아 있는 것이다.
아방가르드 화가 칸딘스키는 미술에서 정신적인 것과 음악적인 것을 동시에 추구했다. 물질적 재료, 평면 캔버스, 정지된 이미지, 가장자리에 의해 파편화된 공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미술의 본질이라고 할 때, 그의 염원은 가히 모순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유동적인 형태와 비결정적인 색깔들을 통해 미술에 시간성을 부여하려 했다. 한 편 시간이란 공간 안에서 지각될 수 없고, 오직 의식을 통해 내러티브적 구조를 가질 때 창발할 수 있는 정신적인 속성을 가진다. 시간을 절대적이고 일선적으로 환원시켰던 몬드리안과 달리, 칸딘스키는 곡선과 중간색을 통해 시간의 유동성을 음악적으로 표현하려 했다. 그가 『예술과 느낌』에서 색깔과 형태가 각기 고유한 정신적 관념을 표상하며 자기만의 시간을 기다린다고 말했듯이, 방희영도 의식에 각인된 순간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의식화된 시간의 흐름에 자신을 내맡긴다. 그러나 방희영은 부유성의 이미지를 통해 시간과 의식의 폴리포니를 들려주는 동시에 꽃잎들이 떠다니는 대기의 흐름까지 함께 보여준다. 순간과 영원의 교차점들은 꽃잎의 형태로, 잎사귀의 소리로 영글어지고, 그것은 방희영의 피부와 의식에 배어 다시 그의 호흡으로 되살아나는 것이다. 따라서 방희영이 보여주는 부유성의 이미지는 대기 속에서 생명과 생명이 만나 대화를 나누고 반응하며 환희의 송가로 승화되는 과정 자체이다.
그렇다면 화가 방희영이 미술에 대해 갖고 있는 미학적 입장은 어떤 것일까? 내가 이해하는 한, 그의 예술관은 사실적 모방이나 휴머니즘적 창조와는 거리가 멀다. 그의 그림이 꽃을 제재로 택하고 있는 재현 예술이지만, 그의 그림은 꽃들의 이미지가 그의 마음과 나눈 대화와 그 대화에 대한 그녀의 응답의 표현이다. 그렇다고 단순히 감정과 마음을 캔버스에 부과하는 식의 표현도 아니다. 그녀의 표현성은 주제와의 상호적인 대화와 참여, 혹은 내맡김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강제함이 없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면서 끝없이 진솔한 대화를 나누며 매체 속에 그 대화를 용해시키는 것이 그의 스타일이다. 그와 동시에 서로 나눈 대화에 그치지 않고 더 큰 숨결과 바람결에 귀를 기울이는 여유로움을 보여준다. 따라서 방희영의 템페라 그림이 실천하고 있는 것은 단순한 재현과 표현을 넘어서는 체득과 체현의 미학이다. ● 달리 말하면, 화가 방희영에게 있어서 자연의 생명체들 간의 상호 교류와 반응에 토대한, 참여와 화해의 기록이 곧 예술이다. 방희영에게 그러한 기록은 템페라 미술이 되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는 창조나 발견의 일방향성을 넘어서 소통과 대화, 갈등과 화해의 상호작용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을 화가의 임무로 믿고 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그의 작품들은 완전하지도 불완전하지도 않다. 그의 그림들은 유목민으로서 삶의 도정(道程)에서 그가 잠시 머문 길목 풍경들을 정직하게 보여준다. 그는 영원의 상(相)을 향해 계속 발걸음을 옮길 것이고, 그의 그림도 계속 진화해갈 것이다. "보이지 않는 순간에 보이는 듯한 본질"을 표현하고 싶다고 그가 말하듯이, 그의 그림을 통해 우리는 비가시적인 것이 가시화되어 가는 과정을 발견할 것이다. ■ 김혜련
Vol.20041001b | 방희영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