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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의 만남_2004_1002_토요일_03:00pm~
작가와 함께 삼청동 파출소와 안국동 우체국에 설치된 작품을 돌아볼 예정입니다. 삼청동 파출소_삼청동 길 수와래 주차장 가기 전(팩토리와 가깝습니다) 안국동 우체국_지하철 안국역 ①번 출구
후원_한국문화예술진흥원_삼청동 파출소_안국동 우체국
갤러리 팩토리 서울 종로구 팔판동 61-1번지 Tel. 02_733_4883
'하늘공연장'의 관객이 되어주시겠습니까? ● 저는 여러분이 홍영인의 개인전 『하늘공연장』의 관객이 되어주셨으면 합니다. 현대미술은 봐도 이해하기 어렵다고 하고, 작품에 대한 해설을 읽어도 도무지 뭐가 뭔지 모르겠다고 들 합니다. "미술비평가"라고 불리는 저도 가끔은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가 감상할 수 있는 미술작품 중 많은 수는 일상의 이미지나 사물에 비해 특별히 아름다운 것도 아니어서 우리는 작품을 미적 체험의 대상으로 여기는 감상법이 좀 시대에 뒤진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렇다고 지적으로 이해해 보자니 작가가 증명 가능한 객관적인 개념이나 논리로 작품을 창작한 것도 아니어서,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그 개념을 해설해 달라고 요구하기도 조금은 난감합니다. 분명 미술은 '시각예술'이니까 눈으로 보고 그 눈이 받아들인 것을 느끼면 될 것 같은데, 어느 때부턴가 미술은 눈으로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미(優美)든 추미(醜美)든 그 아름다움의 의미를 '읽어'야 하게 되었습니다. 또 자기 눈과 머리로 읽은 것만으로는 어쩐지 미심쩍어져서 그 작품의 의미를 전문적으로 해설하거나 비평한 글을 읽어야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도 작품을 느끼고 이해하는데 별반 달라지는 것은 없지만요. 저는 이제부터 작가 홍영인의 작업에 관해 글을 쓰게 될 텐데요, 그 글은 아마도 작가의 작품에 대한 '미술비평'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글은 어쩌면 여러분이 그녀의 작품을 보고, 감각적으로 느끼고, 자신의 상상력으로 의미를 부풀려 보는 것과는 다를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여러분과 제 미적 경험이 다를 것이고, 어떻게 해도 제 글은 '몸의 경험'과 '시각예술'과 달리 그에 덧붙여진 '문자 언어'일 뿐이니까요. ●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저는 여러분이 홍영인 개인전의 관객이 되어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그녀의 이번 『하늘공연장』프로젝트는 예술의 고전적 가치인 아름다움(美), 그리고 현실에 대한 작가의 주관적 비판이 상당히 '기묘한 방식'으로 동거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앞으로 이야기 하겠지만, 이 기묘한 방식 때문에 여러분은 '관객'은 관객이되, 홍영인의 작품을 미적으로 '관조'하는 동시에 작가가 준비한 비판적 문맥의 실타래를 직조(참여)하는 관객이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여러분은 '냉정한 시험관'으로서의 관객이 되십니다. 홍영인의 작품 감상에서는 '관조'와 '참여'가 인식적 거리(distance) 없이 동시에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여러분이 그러한 관객이 기꺼이 되실 것이라 상상하면서 조금이나마 그 감상을 안내하거나 혹은 여러분의 비판에 동참하기 위해 쓰는 것인데, 여러분은 이 『하늘공연장』의 관조자이자 냉정한 시험관으로서의 관객이 되어주시겠습니까?
아름다움과 비판성 ● 『하늘공연장』은 홍영인이 서울 시내 현실 공간인 안국동 우체국과 삼청동 파출소를 무대로 펼치는 한시적인 미술행위(전시)의 타이틀이다. 어쩐지 이 전시제목은 달콤하면서도 청명한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이 환상이 우체국이나 파출소처럼 별로 '판타스틱'하지도 '예술적'이지도 않은 곳과 대비되어 그 곳의 평범한 속성을 더 두드러지게 하는 것 같다. 한편 "하늘공연장"이라는 말은, 전시가 일상적으로 치러지는 인사동 초입 안국동 우체국과 청와대 주변 개발제한으로 아직 70년대 한적한 주택가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삼청동의 파출소가, 한 미술가에 의해 어떻게든 '판타스틱'하고 '예술적'으로 변용될 것이라는 것을 예고하고 있다. 말하자면 『하늘공연장』은 하늘+공연+장(場)이 자연스럽게 조합되어 있는 것처럼, 예술+예술행위+예술의 장소가 작은 사회인 미술계를 넘어 그 계를 포함하고 있는 사회의 공공(公共)+공적인 업무(公務)+공공장소로 나아가 조합되는 미술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가 주어지기 전에 우리가 "하늘공연장"이라는 제목에서 어떤 달콤함과 청명함을 먼저 떠올리듯, 홍영인의 안국동 우체국과 삼청동 파출소 설치작품은 그 자체로 우선 아름답다. 작가의 의도나 작업의 문맥과 상관없이.
미술-공연장-일상의 처소 ● 예시했듯 『하늘공연장』은 일상의 특정 장소를 기반으로 하는 '장소 특정적 미술(site-specific art)'인데, 작가는 안국동 우체국 작업에는 동명의 타이틀을 부치고, 삼청동 파출소 작업에는 「나는 영원히 그리고 하루 더 죄를 짓겠습니다」라고 명명했다. 그러니까 "하늘공연장"은 이번 홍영인 개인전의 제일 바깥 껍질이자 내부의 줄거리(story/root) 중 하나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인지 안국동 우체국 작품은 건물 외부에 설치되었으며, 형식적인 맥락에서도 이전 홍영인의 「커튼(curtain)」이나 「기둥들(pillars)」작품에 뿌리를 둔 주름작업이다. 벨벳이나 새틴 천을 우아한 곡선으로 주름잡아 미싱질한 그녀의 작업들은 그 작품이 설치된 공간을 아주 아름답고 드라마틱한 공간으로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번 안국동 우체국 「하늘공연장」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이전 커튼이나 기둥 작업들이 미술관이나 갤러리에 설치되면서 하나의 미적 오브제로 중성적이고 안전하게 머무르고 있었다면, 「하늘공연장」은 우편업무라는 공적 기능을 가진 건물에 덧붙여짐으로써 바로 그 공간과 자신의 작품에 대한 재 맥락화를 시도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하늘공연장」은 '기능적인 우체국'을 '아름다운 우체국'으로, '미적 대상으로서의 작품'을 '기능으로서의 작품'으로 역전시키고, 이러한 맥락들이 서로 섞여 다시 새로운 맥락을 만들도록 한다고나 할까. 환상적으로 기능적인 미술! 그리고 기능적이지만 아름다운 공공장소를 위하여!
다시 아름다움과 비판성 ● 2004년 9월 17부터 10월 20일 사이 안국동 종로경찰서 앞에 서 있는 사람이라면, 건너편 우체국 건물이 평소와는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주위에 비해 건물층수가 낮아 소박해 보였던 그 우체국 2층 건물이 머리에 터번을 두른 듯 반투명한 붉은 천으로 1층을 올려 시선을 끌기 때문이다. 마치 여성들의 속살이 언 듯 언 듯 비치는 섹시한 옷처럼, 얇고 붉은 천의 막이 하늘하늘, 안의 아시바 구조를 슬쩍 슬쩍 내비치며 우체국 옥상을 감싸고 있다. 바로크식으로 정교하게 주름잡힌 이 막은 일단 시각적으로 아름다워서 눈길을 끈다. 그런데 이 주름 막이 미술작품인지 모르는 누군가는 '우체국이 증축 공사를 하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공사장의 방진막처럼 이 붉은 주름 막은 건물의 외곽에 둘러 쳐져 있으며, 이제 바로 시멘트 작업에 들어갈 듯 준비된 아시바 구조를 슬쩍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업을 수행한 홍영인은 우리 사회 업 데이트에 대한 강박을 가진 사람들에게 '관공서 한 층 올리기'공사라는 가짜 사건을 만들어 그 강박의 실체를 자문해 보고 직시케 하고자 했다고 말한다. 그녀의 의도로는 안국동 우체국 붉은 천막 작품은 단지 눈으로 즐기는 아름다운 사물이 아니라 "가짜 공사를 재현하는 일종의 '극'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비판적인 작품이 될 것이었다. 그런데 이 작품의 아름다움은 눈으로 확인되지만, 비판성은 그동안 안국동 우체국이 그 자리에서 담당했던 공공적 업무와 공공성을 고려할 때 더욱 선명해질 것이다.
안국동 우체국은 인사동에서 가장 가까운 우체국이다 보니 오랫동안 미술계의 온갖 우편물이 발신되는 장소가 되어왔다. 키 낮은 2층짜리 우체국건물은 상대적으로 높은 옆의 참여연대 건물이나 걸 스카우트 빌딩에 비해 위압감이 덜해, 이제 막 작가로서 활동을 시작하는 젊은 미술가들의 기를 죽이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긴 시간 인사동 미술계를 겪었기 때문에 -우편물을 통해서일지라도-물리적으로 뿐만 아니라 심적으로도 서로가 서로에게 친근할 것이다. 안국동 우체국 직원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미술이 전시를 알리는 우편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또한 미술계는 사람들이 (안국)우체국 소인이 찍힌 전시 우편물을 받으면서 인사동에 나올 생각을 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외적으로는 별 상관없어 보이지만, 미술계와 안국동 우체국, 이 둘은 상당히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홍영인은 이러한 내적 친밀성, 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내밀하게 서로가 서로와 엮여 있는 공공 공간과 그 공간 사용자의 관계를 「하늘공연장」이라는 붉은 막으로 건드려 보고 있다. 단지 아름답게 치장해 주는 것이 아니라 일견 증축공사를 하는 것처럼 작품의 성격을 위장해서 '만약 이 우체국이 거대한 빌딩이 된다면?'이라는 문제적 상황을 만듦으로써.
이러한 문제적 상황은 또 다른 프로젝트인 삼청파출소 설치작업 「나는 영원히 그리고 하루 더 죄를 짓겠습니다」로 이어진다. 삼청동 도로가에 위치한 삼청파출소에 작가가 서울시내 도처에서 '훔친 화분'들과 그 화분의 꽃을 보고 자수로 드로잉한 평면작품을 설치한 것이 이 프로젝트의 골자다. 좁은 인도 변에 면한 그 파출소 창틀과 벽으로는 소국이라든가 이름을 알 수 없는 훔친 꽃 화분들이 늘어서 있다. 마치 원래부터 경찰관 아저씨들이 소박하게 키우고 있었던 것처럼. 그리고 파출소 내부 파출소 소장님의 자리 뒤 벽에는, 태극기라든가 경찰관 업무지침이라든가 하는 당연히 있어야할 공공 액자들 사이로 현란한 바로크 풍 금박액자 그림이 붙어 있다. 일견 파출소의 미화를 위해 붙은 그림으로 보이지만, 이것은 앞에서도 말했듯 시민 홍영인이 누군가의 사적 재산인 화분을 훔치고, 거기에 핀 꽃을 드로잉으로 수놓은 작품이다. 금박액자에 둘러싸인 이 금실 은실 꽃 자수 드로잉은 너무나 아름답다.
그러나 아름다운 장미에는 '가시'가 있는 법. 삼청동 일대 시민의 안녕과 개인의 재산을 안전하게 지켜주기 위해 불철주야 일하는 파출소 소장님이나 경찰관 아저씨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일이 바로 그 곳에서 진행 중이다. '이 분들'에게는 미술전시를 파출소에서 한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관내에서 미술전시를 함으로써 동네 주민들의 파출소 접근을 높이고, 경직되어 있는 경찰관 이미지도 쇄신하리라는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작가에게 전시를 허가했을 것이다. 그러나 삼청파출소는 '훔친' 아름다운 꽃 화분과 그걸 보고 그린 드로잉을 내부에 들임으로써(물리적으로만이 아니라 제도적으로도) 스스로 '범죄의 동조자'가 되어 버렸다. 작가에 따르면 이런 의도를 밝힌 기획안을 서에 제출했다고 하는데, 우리의 순진하고 정직한 경찰관들은 작가가 훔친 '척할' 뿐일 것이라 생각한 듯 하다. 파출소는 결과적으로 '미필적 고의'라고는 하지만 작가 홍영인의 '절도행각(?)'에 협조한 꼴이 되었다. ● 이 삼청동 파출소 작업에 대해 누군가는 아무리 미술전시라고는 하지만 절도를 해서는 안 된다고 강변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굳이 그런 비상식적인 행위를 해가며 미술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할 수 있고,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미술이라 할 수 있는지 비난을 섞어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러한 의문과 비난이 가능하리라 본다. 아마 작가 또한 그러한 반응을 예상했으며, 혹은 그러한 반응을 이끌어 내기 위해 이 기묘한 프로젝트를 수행했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나는 미술은 어떤 것을 해도, 예컨대 도둑질이라는 범죄행위를 해도 그것이 '예술을 위한 예술적 표현'이라면 가능하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또한 미술을 모르는 사람들이 자꾸 미술을 일상의 범주 안에서 재단하려 함으로써 홍영인 같은 현대 미술가들의 작품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평가하고 싶지도 않다. "예술 표현의 자유"라든가 "일상과 다른 차원의 현대미술"같은 말들이 미술이라는 한쪽만을 위한 변론, 현대미술의 상당히 헐거운 '만능열쇠' 같은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또한 그와 동일한 의미지평에서 홍영인의 작업처럼 미술관이라는 특수한 공간을 벗어나 일상의 공간으로 나아가는 요즘 미술의 경향이 꼭 '현대미술과 현실의 벽을 해체하기 위해'서만은 아닌 것 같으며, 그렇다하더라도 그 일탈이 꼭 성공적이지는 않다는 말을 해두고 싶다. 정리하자면 홍영인의 삼청동 파출소 작업을 미술 안에서만 통용되는 미술문법으로 변호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관객-관조자/참여자/냉정한 시험관 ● 나는 조금 다른 의미로 이 훔친 화분과 그 드로잉 작업이 절도행위에 기인하다는 사실, 그것이 파출소에 들어갔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홍영인의 이 작업이 잠재하고 있는 핵은 행위자(performer)인 작가의 미술행위(performance)에 의해 움직이기보다는, 사건발생의 현장과 그 현장을 참관/참여하는 관객들의 '인식'에서 촉발되는 것처럼 생각된다. 만약 (정상적으로 돈을 지불한) 예쁜 화분과 아름다운 자수 그림이었다면 그것이 필연적으로 파출소에 들어가야 할 이유도 없을 뿐만 아니라, 지금 당신의 머리를 자극하는 '절도↔예술(행위)'라는 문제적 맥락도 형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작가가 목적한 것은 바로 이 인식의 촉발 지점이 아닐까? 그러니까 절도 행위, 아름다운 드로잉 작품, 소소하지만 내 것이 아닌 훔친 사물들, 파출소라는 특수한 전시 공간, 이 각각이 중요했던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작가에 의해서 시작되고 관객에 의해 인식되는 오케스트레이션 과정 중에 내는 불협화음에 주목했던 것이 아닐까? 『하늘공연장』의 관객인 우리가 그 기이하고 불편한 소리에 귀 기울이기를 희망했던 것은 아닌가? 귀 기울여 들음으로써 지금까지 우리가 편안하게 생각해 왔던 것들-예컨대 '아름다운 미술'이라든가 '정의롭고 명확한 법의 실현'이라든가-이 내는 마찰음을 사고해 보도록 요청한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 흔히 우리는 아름다운 것을 보면 그 유혹에 홀리듯 빨려 들어가지, 그 유혹의 위험성이나 그 아름다움이 봉합하고 있는 현실적 문제들을 고려하지 않는다. 혹 아름다움에 그러한 위험성이나 비판성이 한 몸으로 붙어 있어도 그 아름다움에 위안 받음으로써 애써 문제를 잊고자 하기도 한다. 아니면 '장미에는 가시가 있어 더 아름답다'라는 식으로 그 가시(비판성)를 '장식(ornament)'으로 간주한다. 그런 의미에서 홍영인의 『하늘공연장』프로젝트 또한 전면에 드러난 아름다움이, 작가가 애초 이 작업에 의도한 비판성을 내면 혹은 배면에 수렴시켜 버린 채, 자신을 편안하게 감상하도록 유혹할 수도 있다. 작가가 하필이면 안국동 우체국이나 삼청동 파출소를 지목해서 「하늘공연장」이나 「나는 영원히 그리고 하루 더 죄를 짓겠습니다」라는 설치작업을 한 이유를 모르는 경우에는 말이다. 이러한 작업 의도는 알고 있을지라도, 실제로 파출소에 들어가 경찰관들의 눈치를 살피며 소장님 뒤에 걸린 자수 드로잉 작품을 감상하는 경험을 하지 않은 비참여형 관객들 또한 인식적으로만 홍영인의 프로젝트를 알 것이다. 이 아름다운 자수가 갖고 있는 위험성이나 긴장감, 그에 의한 기이한 체험은 그 곳에 들어가 본 관객만이 알겠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만약 당신이 홍영인의 안국동 우체국 설치작품 「하늘공연장」을 먼발치에서 바라보고, 길을 나서 삼청동에 이르러 삼청동파출소의 훔친 화분과 훔친 꽃을 드로잉한 작품을 약간 가슴 조이며 본 관객이라면, 내가 여기서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 것이다. 당신(경찰서 아저씨들을 포함한 당신)과 나는 작가 홍영인이 쳐놓은 아름다운 그물에 빠졌다가 그 문맥의 망을 이어주고 다시 빠져나와 그에 대해 생각해 보는 관객이 되었다. 경험해보지 않으면 아름다움과 비판성이 결합된 그 기묘한 힘을 모른다. 그래서 바로 당신, 관조자이자 참여자이자 냉정한 인식의 관객이야말로 홍영인 『하늘공연장』의 핵이다! ■ 강수미
Vol.20040925a | 홍영인 설치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