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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4_0915_수요일_05:30pm
주관_정인(communication management & publication / Tel. 02_598_5657) 기획_박혜정 / 후원_(주)현대자동차
덕원갤러리 서울 종로구 인사동 15번지 Tel. 02_723_7771
The Plant Nation―공장으로부터의 초대 ● 직설화법으로 말하자면, "이번 전시의 주인공은 바로 공장(工場)입니다." 공장도 그냥 공장이 아니라 우리나라 산업화의 정점에 있는 바로 그 공장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공장은 낯익은 대상이면서 또한 낯선 대상이다. 우리가 아는 공장의 모습은 잠시 텔레비전에서 스쳐지나가며 본 거대한 건물, 혹은 기계들이 늘어선 획일적인 모습일 것이다. 이러한 공장의 모습은 실체라기보다는 하나의 관념에 가깝다. 이제는 우리가 관념의 틀을 벗고 실재(實在)하는 공장과 마주쳐야 할 시간이다. 여기서 '공장을 보여준다'와 '공장을 본다'는 의미를 가진다. ● 박경택 작가는「Deja-vu」에서부터 도심 한가운데서 우주인과의 조우를 보여준 「혹성탐험기(The Planet Exploration)」시리즈에 이르기까지 일관적으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사회의 모습을 탐구해왔다. 작가가 그간의 사진들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은 '우리가 사는 이곳은 과연 어떤 곳인가'하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작업을 진행 해온 작가답게 그의 시선은 현대사회를 지탱하게 해주는 공장의 내부, 그 생산의 중심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과연 '공장'의 내부로 어떻게 들어갈 수 있을 가를 함께 고민했을 때, 우리의 머리 속에 들어온 생각은 촬영 대상이 될 공장 역시 우리 사회에서 상징적 의미를 가진 곳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 그러한 상징성을 가지는 기업중의 하나가 바로 현대자동차였다. 현대자동차 공장을 촬영한다는 것은 단순히 공장의 산업현장을 기록한다는 의미를 넘어서 더 큰 의미―한국 산업사회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미래를 볼 수 있는 가능성―가 있는 것이다. 이런 미흡한 전시 기획에도 불구하고 현대자동차는 흔쾌히 공장 내부 촬영 협조와 전시에 수반되는 모든 사항을 지원해주었다. 기업의 문화지원의 새로운 모델을 보여준 결정에 감사드린다. ● 촬영은 지난 2004년 4월부터 6월에 걸쳐 현대 아산공장과 울산공장을 중심으로 이루어 졌다. 기존의 산업사진들의 방식을 벗어나 공장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는 이가 마치 자연의 풍경을 바라보듯 공장의 모습을 관조하며 천천히 음미할 수 있도록 촬영과 전시 작품의 선택에 신중을 기했다. 사실 공장은 어떤 의미로 기계들을 잉태시키는 거대한 인공의 자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인공의 자연이 하나의 도시를 이루고 그 도시들이 거대한 나라, The Plant Nation을 이루어 지금 우리 앞에 있다. 이번 전시가 작은 부분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처음 마주치는 공장의 실재 모습이라고 감히 말씀드린다. ● 이제 공장의 의미는 사진을 보는 당신에게로 넘어간다. ■ 박혜정
생산을 엿보기: 박경택 ● Discreetly peeping into the production line ● 아직은 한국에는 산업사진은 없다. 최소한 작가적 수준에서 실행되는 사진으로서는 말이다. 그리고 산업사진을 원하는 사람도 별로 없다. 사람들은 그저 주관적 감수성으로 가득 찬 작가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사진(사실 그런 사진은 지구상에 없다. 내면성을 얘기하는 평론가들은 언젠가는 혼이 날 것이다)에서 뭔가 잡힐 듯 말 듯한 아우라(한국 사진계에서 말하는 아우라의 개념은 몽땅 틀렸다. 따라서 무책임하게 자신의 무식을 의식하지 못하고 아우라니 풍크툼이니 떠드는 자들도 언젠가는 혼날 것이다)를 찾는데 만족하고 있기 때문이다. ● 그렇다고 산업적인 소재를 찍은 사진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공장에서, 사업장에서, 공사장에서 많은 사진들이 찍혔으나 그것은 그저 현장 관리자가 똑딱이 카메라로 어설프게 찍은 사진일 뿐, 제대로 된 기록을 남겨서 후세에 전하겠다거나, 자신이 이루어낸 훌륭한 업적에 대한 자부심을 제대로 표현해 보겠다는 의지의 산물도 아니다. 그냥 되는 데로 사진일 뿐이다. 그리고 기업들은 그런 사진자료를 공개하는 것을 무척이나 꺼리고 있다. 자신들의 치부가 드러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사진 좀 잘 찍어둘 것이지. ● 또 다른 면에서 산업사진이 있기는 하다. 기업이 제대로 된 작가에게 맡겨서 찍는 경우이다. 그러나 이때의 산업사진이라는 것이 고등학교 때 우등생이 어떤 과목이건 무조건 잘 해서 전과목 백점을 맞듯이, 인물도 찍고 풍경도 찍고 내면도 찍고 패션도 찍고 예술도 찍고 다큐멘타리도 찍는 사진가가 그저 기본내공을 발휘해서 찍은 적당한 사진일 뿐이다. 기업의 선전용 브로슈어에 실리는 그런 사진들은 흠 잡을 데 없는 완성도를 가지고 있으나 그렇다고 숨을 멎게 할 만큼의 그 '무엇'도 들어 있지 않다. 그냥 적당할 뿐이다. 적당하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작품으로서의 사진에 요구되는 절실한 애정이 없다는 것이다. 하긴 삭막한 철판이나 콘크리트더미에 애정을 가진 사진가가 얼마나 되겠는가.
그런데 요즘 들어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어떤 수주나 부탁도 받지 않았는데 산업시설을 찾아서 철과 콘크리트와 소음과 속도에 매료되어 사진을 찍는 작가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고 있으니 박경택도 그 중에 하나이다. 사실 그런 사진가들이 나올 때가 훨씬 지났고, 서구에서는 1920년대에 기계시대의 미학이 나온 이래 이제는 그런 미학은 잊혀져 버린 미학이 되고 말았는데, 한국에서는 2004년도에 와서야 그런 미학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런 미학이 나오게 된 이유를 나름대로 짐작해 보자면, 아마 다음의 이유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 우선, 기계의 아름다움에 눈뜨게 되었다. 기계는 아름답다. 잘 만든 기계는 특히 아름답다. 고전음악을 모르는 사람에게 말러의 5번 교향곡은 58분 동안의 고문일 뿐인 것처럼, 기계의 미학에 대한 취향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 기계의 아름다움은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을 읽는 독자께서 기계의 미학이 뭔지 모르겠다면 그것이 스스로에게 찾아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 사진들을 다시 보거나 이 글을 다시 읽기를 권하고 싶다. 왜냐면 필자에게 기계의 미학은 유행처럼 갑자기 다가온 것이 아니라 모형비행기를 만들던 국민학교 때부터 찾아온 것이고, 따라서 30년 이상 된 취미(미학에서 말하는 취미(taste)를 일컬음. 우표수집 같은 여가로서의 취미(hobby)를 말 하는 것이 아님)이기 때문이다. 잘 만든 기계를 보고 싶으면 포뮬라1 경주용 차의 엔진을 들여다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 기계는 오로지 빨리 달려야 한다는 무식한 목적을 위해, 대량생산되지 않는 특수한 기계이고, 오랜 세월 동안 스피드에 미친 광인들의 광기가 집약되어 공학과 경제를 초월하여 다듬어진 것이므로, 대단히 독특한 외양을 띠고 있다. 열처리의 결과로 표면이 심난한 무지개색을 띠며 뱀처럼 또아리를 틀고 있는 포뮬러1 차의 배기관을 보면 기계가 아니라 살아 있는 괴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 가지 아쉬움이라면 우리나라에서 포뮬라1 차를 볼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 유럽에 갈 기회가 있는 분이라면 자동차 박물관 같은데 가서 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런 기계의 미학이 사진가를 붙잡은 것이다. ● 둘째로, 사진가들이 기존 예술사진의 수사와 어법에 지쳤다. 아직도 한국에서 예술사진 하면 내면성, 주관성, 표현성하는 말들을 들고 나오는데, 이 용어들은 사진 이외의 시각예술의 영역에서는 이미 수십년 전에 자살한 용어들인데, 사진에서는 이런 말들이 아직 살아서 걸어 다니는 좀비의 왕국이다. 그런데 이들 용어들에는 아무 잘못이 없다. 멍키 스패너로 사람을 때려 죽였다고 멍키 스패너를 처벌하지 않듯이, 이들 용어들에는 아무 잘못이 없는 것이다. 문제는 멍키 스패너를 휘둘러서 다른 사람을 헤치는 바로 그 사람이다. 그러나 그런 이들은 용어가 자살하면 따라서 자살 할 것이므로 성급한 퇴진을 권하고 싶지는 않다. ● 정말 문제는 한국의 예술사진이 진짜로 내면성이나 주관성에 대한 성찰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성이나 주관성 "같이" 보이는 분위기를 모방할 뿐이며, 그를 위하여 클리셰라는 전략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즉, 예술이 아니라 상투성에 매달리고 있는 가짜라는 것이다. 클리셰는 예술의 적이다. 어둠컴컴하면 내면성, 흔들리면 주관성, 뒤섞어 놓으면 표현성하는 식으로 말이다. 젊은 사진가들이 한심한 취미의 국도변의 러브호텔이나 모텔방의 저속하고 비열한 칼라에 초점을 맞추고, 삭막한 콘크리트 공사판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이유가 기존 예술사진에서 나는 썩은 냄새에 염증을 느껴서라는 점은 자명하다. 흔들리고 어둡고 시간과 기억의 편린을 뒤쫓아 유년기를 헤매다 아우라를 만나고 풍크툼에 몸이 시린 사진을 젊은 사진가들은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오늘날 동양화나 서예를 한다고 하면 패러디가 아니고서는 하기가 힘들 듯이, 이런 류의 예술사진을 하려고 하면 패러디라는 골목대장에게 어느 정도의 헌금은 바치고 지나가야 할 것 같다. 그게 싫으면 곧바로 사물을 마주 대하여 그들의 생경함과 뻔뻔함을 즐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 또 하나의 이유는, 한국이 탈산업 시대에 접어들면서 소위 굴뚝 없는 산업, 즉 정보산업이나 문화산업 등 공장을 돌리지 않아도 되는 산업들이 나타남에 따라 예전에 알던 산업의 이미지들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산업시설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예전에는 수도권 전철을 타고 가다 보면 구로역 쯤에 공장이 많았으나, 지금은 그 자리에 아파트들이 들어섰고, 공장들은 안산이나 시화, 남동공단 등으로 옮겨갔기 때문에 우리들의 시각장에서는 사라진 것이다. 어떤 물건이 사라지면 그때부터 허둥지둥 그것을 찾아 나서듯이, 산업의 모습이 사라지자 사진가들이 그것을 찾아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식의 사진 찍는 습관이 70년대 말부터 시작된 장승사진 찍는 습관과 같은 궤에 있는 것은 아니다. 장승사진과는 달리, 산업적인 것을 사진 찍는 것은 향수나 복고취향이 아니라, 우리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 산업의 층위를 보여주는 것이다. 온통 첨단이다 IT다 해서 사람들의 관심이 특정한 산업의 층위에만 몰려 있는 사이에, 사진가들은 쇠를 깎고 열을 다루고 구조물을 만드는 전통적인 산업의 층위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박경택의 사진을 설명하기 위해 이렇게 많은 전주(prelude)가 필요한 이유는, 어떻게 산업적인 것이 사진의 소재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해 납득을 못 하는 분들이 많기 때문이다. 일반인은 물론이고, 외국의 좋은 학교에서 좋은 공부 많이 했다는 유명 작가분들도 그런 것을 납득을 못 하기 때문에 이런 말들이 필요한 것이다. ● 박경택이 찍은 것은 현대자동차 공장의 생산라인이다. 이는 두가지 이유로 우리의 시각장에서 빠져 있는 부분이다. 첫째는 기업에서 이런 장면의 공개를 꺼린다. 국가간, 그리고 국가내부에서 경쟁이 치열한 요즘 산업에서 보안은 매우 중요한 사안이므로 어떤 기업도 생산라인을 공개하려 하지 않는다. 산업스파이는 국가정보기관에서도 다루는 중대한 사안이므로, 생산라인에 접근하는 것은 국외자로서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소재가 얼마나 접근하기 힘든가를 강조하는 것은 유명 여배우의 옷을 벗겨 누드를 찍기가 얼마나 힘들었나를 강조하는 것만큼이나 유치한 짓이므로 이 점을 강조하지는 않겠다. 소재의 독특성에 의존하는 예술은 수명이 5분도 안 되기 때문이다. 다만, 사진가로서 자신이 선택한 소재에 접근하는 박경택의 치열한 태도만을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 공장의 생산라인이 우리의 시각장에서 빠지는 더 중요한 이유는 일반인을 위한 소비의 대상으로 주어지는 사물은 결과물이 중요하지 생산과정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동시대의 모든 소비품의 공통된 특징이다. 어지간히 자신 있는 식당이 아니고서는 주방의 모습은 손님이 볼 수 없게 되어 있다. 설사 정당한 절차라 할지라도 손님에게는 뭔가 의구심을 줄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음식맛이 안 나기 때문이다. 저걸 맨손으로 저렇게 만져도 될까, 저런 물로 재료를 씻어도 될까 일일이 걱정을 하다 보면 입맛이 달아날 것이다. 생산물은, 과정을 보여주지 않고 있다가 마술 같이 뚝딱 손님의 눈앞에 나타나야 한다. 그러므로 현대의 생산물은 철저히 과정과 결과의 이분법에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생산과정은 최종적으로 나타나는 결과물에 비하면 지저분하고 불안하며 복잡하다. 그런데 소비자가 원하는 것은 깔끔하고 확실하며 단순한 것이다. 그러므로 생산과정은 생산물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또한 완결되고 닫힌 구조를 가진 결과물에 비하면, 생산과정은 열려 있고 정돈되어 있지 않다. 완성된 제품에서는 생산자가 허용하지 않는 범위에서 소비자가 제품에 손을 대어 분해하거나 구조를 바꿀 수 없도록 되어 있듯이, 우리 삶의 모든 결과물에서는 사용자의 개입이 허용되지 않는다. 소비자가 마음대로 기계에 손 댈 경우 보증 수리가 되지 않는 이유는 소비자가 권한을 넘어선 행위를 한 것에 대한 처벌이다. 사무원이 자신의 회사가 입주할 공사 중인 회사 건물에 개입할 수 없고, 손님이 주방에 개입할 수 없고, 박물관의 관객이 수장고나 학예실에 개입할 수 없듯이 말이다. 즉 생산과정의 끝에 있는 소비자는 그 과정에 개입할 수 없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소비자에게는 완결된 닫힌 구조만이 허용된다. ● 따라서, 박경택 같이, 굳이 그런 과정에 개입하려는 새로운 종류의 시각적 습관을 가진 사진가가 나타난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가 찍은 생산라인은 마치 수술 도중의 장면 같이 모든 절개된 면과 용액들과 환부와 치부들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ER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서 굳이 끔찍한 수술장면을 즐겨 보는 관객층과 습관(spectatorship)이 생겨나듯이, 공업생산의 과정을 보려는 관객층과 습관이 생겨나고, 오늘날 박경택 같은 작가가 나오게 된 것이다. 이것이 그의 작업의 배경이다. 하지만 이렇게 서설을 길게 쓰고 보니 작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이, 이것이 그의 작업의 배경이 될지는 몰라도 핵심은 아니기 때문이다.
핵심은 당연히, 사진 속에 들어있다. 그의 작업의 핵심은 자동차 생산라인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형태들, 질감들, 구조들과 같은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면에서부터, 그것들을 제어하는 공장 특유의 눈에 보이지 않는 질서들, 규율들, 원칙과 이론들과 같은 비가시적인 면들의 복합체이다. 더군다나 이런 생산라인이 오늘날 있기까지 테크놀로지와 엔지니어링의 피 나는 실패와 시행착오로 이루어진 역사의 과정은 사진에 직접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부분이다. ● 자동차 생산의 전문적인 부분을 알지 못하는 관객의 눈에 띄는 것은 다양하고 특이한 형태의 금속구조물들이다. 어떤 것은 엔진블록이고 어떤 것은 완성된 엔진, 용접용 로봇, 조인트, 부품들을 쌓아두는 거치대,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캣워크 등 생산라인은 우리의 일상에 있는 것들 이상으로 변화무쌍한 사물의 세계들로 되어 있다. 박경택이 이런 것들에 카메라를 들이대게 된 것은 자동차 생산라인을 다큐멘타리적으로 기록하자는 숭고한 사명감도 아니고, 그렇다고 후세에 남을 산업의 역사를 만들자는 것도 아니고, 순전히 눈에 보이는 신기한 사물을 기록하고자 하는 가장 기본적인 사진가의 태도였을 것이다. 그리고 공장이라는 매우 독특한 공간은 사진가의 눈에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세계를 열어주고 있다. ● 사진가의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본 공장인테리어의 특징은 빈 부분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거기에는 장식적인 부분이 거의 없다. 오로지 기능만이 있을 뿐이다. 바닥은 폴리우레탄 계열의 붉은 색 페인트로 칠이 되어 있지만 그것은 그 색이 예뻐서가 아니라 오염물질이 눈에 띄기 쉽고 작업자에게 경각심을 주는 등 실질적인 이유 때문에 칠해진 것이다. 기계부품 같은 하드한 물건 뿐 아니라, 색과 빛 같은 감각적인 요소마저 철저히 기능적인 고려에 맞게 존재하는 곳이 공장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그런 기능적인 부분들이 사진으로 찍히면서 감각적이고 의미적인 층으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바닥의 붉은색은 우리 기억 속의 붉은 색에 대한 복잡한 연상들과 뒤섞여 간단치 않은 화학반응을 일으키고, 기계부속의 다양한 형태들은 이제껏 보지 못한 새로운 형태로 다가와, 우리들의 조형감각을 혼란시킨다. 그게 바로 실제로 사물을 보는 것과 사진으로 보는 것과의 차이이다. 또한 대강 찍은 사진으로 보는 것과 작가가 찍은 사진으로 보는 것과의 차이이기도 하다. ● 그런 눈으로 보면 공장은 우리가 알고 있는 다른 구조들과의 공통점과 차이를 통해 보여진다. 자동차 생산라인은 하나의 완결된 도시이고 소우주이며 기계이고 신체이며 군대이며 세포이다. 박경택의 사진에 이 모든 면들이 들어 있다. 도시가 무수한 소통과 교통의 라인들로 이루어져 있듯이, 공장에서는 많은 물량의 교통이 있고, 그에 따르는 많은 지식과 정보의 소통이 있다. 보안상의 이유로 핵심적인 지식과 정보는 사진에 나타날 수 없는 아쉬움이 있지만, 일상에서와는 다른 스케일로 지식과 정보의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엿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묘한 쾌감을 맛보게 된다. 도시가 지하에서부터 고가도로에 이르는 다층적인 구조로 된 소통의 체계이듯이, 공장도 여러 층으로 된 소통의 체계이다. 최근 서울시내 버스체계 개편에서 드러나듯이, 오늘날 도시를 운용하는 것은 노력이나 열정 같은 인간적인 면이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이다. 공장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도시의 모델은 프리츠 랑의 1927년 영화 『메트로폴리스』를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그것은 동시대 한국에는 없는 도시의 모델이다. 그것은 지금 보다 더 기능적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을 미래 도시의 예견적 모습일지도 모른다.
20세기초 포디즘(Fordism)에 의한 콘베이어 시스템이 나타난 이래 공장은 인간의 손길을 배제한 시스템의 문제가 되었으며, 박경택의 사진에서 인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그러한 시스템화의 결과이다. 포디즘은 또한 노동과정의 기계화와 체계화를 뜻하는 것이기도 한데, 이는 생산의 표준화와 대량화, 작업자의 비숙련공화, 작업조건의 관료적인 대량화를 수반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루에 5달러의 임금을 주겠다는 헨리 포드 자신의 장밋빛 약속에 따라, 노동자들도 스스로 자동차를 소유할 수 있을 정도의 임금수준을 누르게 되었고, 그 결과로 여가시간에 대한 수사는 게으름으로부터 즐거움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러므로 포디즘은 단순히 공장생산체제 만을 이르는 말이 아니라, 성장과 축적, 복지를 지향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특성을 대변하는 말이기도 하다. 푸코가 얘기한 파놉티콘이 단순히 실제의 감옥구조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근대사회에서 주체가 생산되는 구조에 대한 은유로 쓰였듯이, 포디즘도 근대자본주의에 대한 은유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박경택의 사진에서 보고 있는 것은 포디즘에 의해 돌아가고 있는 사회의 시각적 은유이기도 하다. ● 포디즘의 중요한 원리 중의 하나는, 생산라인의 모든 요소들이 시스템의 일부로 작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다른 부속에 맞지 않는 뛰어난 부속보다는 다른 부속과 맞는 적당한 부속이 더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또한 대량생산의 논리이기도 하다. 따라서 박경택의 사진에 등장하는 모든 시각적 요소는 그런 선택의 결과이다. 그런데 사진에서 눈에 띄는 것은 요소들만이 아니라 그 요소들이 만들어내는 총집합이다. 관객으로서는 요소들을 따로 떼어 분석해서 볼 수 있는 능력도 없고 그런 교육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모습은 하나의 게슈탈트로 다가온다. 즉 전체상만 다가온다는 뜻이다. 관찰력이 있는 관객이라면 전체상을 지배하고 있는 원리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 생산라인은 금속과 콘크리트라는 무기질적이고 딱딱한 것들로 되어 있지만 그것을 움직이는 원리는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고 막히지 않아야 한다. 실제로 오늘날의 공장시스템은 적당한 속도로 생산라인의 콘베이어 벨트가 움직여서, 사람이 그 페이스에 맞춰서 노동하도록 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생산라인은 신체와도 같다. 거기에는 뼈대와 근육(철과 콘크리트), 신경(각종 센서와 관찰의 체계들), 혈액(에너지를 옮겨 주는 전력선, 동력선, 각종 절삭유, 윤활유) 등이 있고, 그것들은 하나의 유기체처럼 상호 호환과 조화의 체계 속에서 움직여야 한다. 그 복잡성은 단순히 도시적 스케일이 아니라 소우주라 해도 좋을 정도이다. 또한 공장에는 일상생활에서와는 다른 안전규칙, 노동의 분위기 등이 있어서 흡사 군대를 방불케 하기도 한다. ● 그런데 우리가 풍경사진에 나오는 모든 나무들, 풀들의 탄생과 성장을 지배하고 있는 원리를 모르듯이, 생산라인에 존재하는 수많은 요인들을 관통하는 원리들을 알 수는 없다. 우리 앞에는 그런 원리들에 의해 관통당한 채 작동하고 있는 무수한 요소들의 모습만이 주어져 있을 뿐이다. 아마 그 공장에서 오래 일하여 그 원리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노련한 작업자가 그의 사진을 본다면 그것은 단지 그의 직장에 대한 묘사일 뿐이며 아무런 감동도 없을 것이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가시적이기 때문이다. 즉 그에게는 자신이 일하는 공장에서 비밀이나 불투명한 부분이 없는 것이다. ● 그러나 공장 바깥의 구경꾼에게 공장은 흡사 알 수 없는 나무와 풀로 가득 찬 밀림과도 같이 보인다. 그 수많은 철골과 볼트들, 조인트들이 무슨 역할을 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오로지 구경꾼의 호기심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남의 직장을 시각적 즐거움의 대상으로 볼 수 있다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 오히려 그 원리를 모르기 때문에 더 즐겁지 않을까. 만일 생산라인의 각 요소를 이루는 구성부분의 비용은 얼마고 그것을 유지하는데 어느 정도의 노동이 필요하며, 전체적인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는지, 기계를 잘못 다루었을 경우 시말서를 써야 하고 관리직과 얼마나 신경전을 벌여야 하는 등등의 일들을 모두 알고 있다면 도저히 즐거움의 대상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생산라인 현장의 전문가에게는 박경택의 사진은 쓸모 없는 것(redundant)일 것이다. 그가 팔요한 정보들을 담고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박경택의 산업사진은 미국 항공우주국이 사진가들을 고용하여 자신들이 하는 실험과정을 매우 특수한 기법으로 촬영하는 것과는 다른 층위에 있다. 항공우주국의 경우 사진은 그들이 원하는 지식을 정확히 담고 있으며, 거기서는 그런 점이 묘한 미학을 이루게 된다. 예를 들어 풍동에서의 유체의 특성을 실험하는 사진의 경우 사진의 핵심은 오로지 비행체의 주변을 흘러가는 유체의 형태와 특성에만 맞춰져 있다. 바로 그 점이 그 사진을 독특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에 비하면 박경택의 사진은 사실 마치 장님이 본 것처럼 생산라인의 인식론적 내면에 들어가지 못하고 겉만 훑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신기한 구경꾼의 눈으로 그런 것들을 보았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된다. ■ 이영준
Vol.20040915b | 박경택 사진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