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4_0908_수요일_06:00pm
관훈갤러리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5번지 본관 2층 Tel. 02_733_6469
천국의 섬 ● 우리는 / 끊어질 듯 이어지는 불안한 화음과 같으니 / 시작과 끝의 경계가 없기에 / 결코 마지막 장을 넘겨선 안될 것이다 ● 흐르는 물에 손은 씻었으나 / 귀퉁이에 눌어붙은 마음의 소란스러움이 힘겹고 / 점점 높아지고 날카로워지는 비명소리 위로 / 어린 아이는 연을 날린다 ● 홀로 서 있으나 / 떠도는 섬이 되기를 두려워하고 / 사나왔던 폭풍의 시간들을 견디며 여기까지 왔음을 / 내 이미 알고 있으니 / 푸른 잔디 위로 떠도는 살폿한 바람 한 점과 / 따사로운 햇살 이외에 /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 그러나 / 잠시 머물다 갈 천국은 잔인할지니 / 서로의 그림자가 지워지기 전에 / 천국의 증거를 남겨야 할 것이다. ■ 인효진
호수공원-우리시대의 유토피아 & 아토피아 ● 사람들은 왜 공원에 갈까? ● 인효진은 집 앞에 위치한 일산 호수공원을 관찰한 기록들을 보여준다. 휴일 날, 공원을 찾은 사람들의 몸, 동작, 제스처를 멀찍이 떨어져 흥미롭게 관찰한 사진들이다. 그녀는 공원에 모여든 사람들의 행동양식을 관음적 시선을 간직한 산책자로 살펴보고 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무엇 때문에 공원에 몰려드는 것일까? 그리고 그곳에서 무엇 때문에 저런 행동을 하고 무엇을 보상받고 싶거나 막연한 기대와 환상에 잠기는 것일까? ● 공원에 몰려든 사람들은 저마다 욕망하는 것들을 스스로 실연해나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공원이라는 세트장에서 제각기 그럴듯한 연기를 해내고 있는 것이다. 서로에게 무심한 채 오로지 자신들만의 행복과 여유에 몰입하는 장면, 그리고 가족과 연인간의 사랑, 동물에 대한 과도한 애정, 자연친화적인 삶의 누림 등을 시각화하는 다양한 행동양식 등이 작가의 눈에는 흥미롭고 재미있고 더러 삭막하고 낯설고 허망하기도 했을 것이다. ● 비근한 현실적 일상에서 빠져나와 휴일 날 제한된 장소에서 하루치의 유예된 시간동안 자신들의 유토피아를 즐기고자 하는 이들의 간절하고 절박한 소망은 사실 인위적이고 작위적이기도 하다. 거기에는 매우 통속적인 동시대의 삶의 이상과 추구, 보상의 논리가 어설프게 흩어져있고, 모조된 이미지들이 실체를 끊임없이 지워나가는 중이다. 그렇게 본다면 그곳에 모여든 이들의 행복과 이상을 뒷받침해준다고 믿었던, 배경으로 충실했던 공원풍경 역시 인공화된 허구의 자연, 가짜 낙원, 결국 이미지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모형 공간-공원 ● 도시에서 상실한 자연의 체취를 선사하고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자연의 모습을 제공하는 공원은 도시민들에게 정서적인 환기와 함께 추억을 되새김질할 여유, 피로와 권태를 씻겨주는 건강을 제공하는 장소이다. 사람들은 공원에 와서 숨을 크게 들여 마시고 난 후 운동을 하거나 거닌다. 공원은 여행을 대신해 주는가 하면 도시를 벗어난 환각을 심어 주고 원초적인 생의 리듬과 활력을 제공해 준다고 믿도록 해야 한다. 따라서 공원을 설계하는 조경의 기본원칙 중 하나는 자연을 모방하여 일정한 환영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공원은 자연을 향유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이는 시각을 통한 환영의 공간이란 측면에서 미술관과 동일하다고도 볼 수 있다. 이것 역시 근대의 소산이다. 근대 도시의 산물로서 공원은 '순간성과 그에 따른 상실감의 체험을 집약해서 보여주는 일종의 모형 공간'인 셈이다. 동물원, 식물원, 미술관이 결국 다 동일한 기획 속에서 탄생된다. ● 언제부터인가 우리들 삶을 생태적으로, 자연친화적으로 가꾸고자 하는 열망에, 또한 최근의 '웰빙문화'에 힘입어 공원과 산책, 운동과 여가가 뒤를 잇고 있다. 해서 우리들의 삶 주변으로 다양한 공원이 들어왔다. 아파트단지 내의 조그마한 놀이터와 광장, 지하철역 구내, 도심 한 복판의 귀퉁이에 희미한 공원의 흔적이 있는가 하면 자연을 일상적 삶의 공간으로 끌어 들이려는 다양한 노력들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일산의 호수공원이나 분당에 위치한 중앙공원, 율동공원 등은 신도시에 계획적으로 조성된 대규모 공원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신도시에 가설된 '시민들의 휴식 공간'이라고 불리는 일산호수공원의 풍경을 담고 있는 이 사진 안에는 그 공원에서 여가의 생활을 즐기고 행복을 추구하려는 이들의 삶, 가장 보편적이면서 일반적이고 동시에 상투적이기까지 한 그런 삶의 얼룩이 스며있다. 공원에 온 사람들의 모습에서 작가는 새삼 함께 살고 있는 동시대인들을 재인식 혹은 재발견하고 있다. 자연을 가장하여 인위적으로 설정된 공원이란 공간은 '군중'을 만들어 내고 그에 따른 독특한 문화 역시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이곳에서 다양한 형태로 보이는 개별 단위의 일행들의 모습을 포착하였다. 대도시의 중심이나 주변에 위치하고 있는 이 여가공간은 본질적인 자연보다도 더 자연 같은 대체의 공간으로, 여가를 즐김으로서 행복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모사공간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는 장소다. 자연과 인공이 교묘하게 뒤섞인 일상의 환경이자 아슬아슬한 경계를 넘나들며 인공과 자연, 낙원과 지옥, 가족과 가정, 연인과 남녀, 몽상과 현실의 접점에서 절박한 이들의 삶이 잠시 유예된 공간, 그곳이 바로 오늘날의 공원이다.
인공낙원 ● 작가는 일종의 산책자가 되어 부유하듯 공원을 거닌다. 공원 안을 한가롭게 거닐며 찰나적인 힐끗 보기를 통해 너무 낯선 타인들의 삶, 생의 욕망, 행복과 사랑, 가족과 부부, 연인관계를 읽어나가면서 그들의 앞날을 점쳐 보고 지금의 순간을 통찰해 보고자 한다. 그들의 몸짓과 표정에서 풍기는 인생의 아이러니 등도 엿본다. 사진 속 공원 풍경은 행복하고 평화로워 보이지만 동시에 어쩐지 작위적이고 모조, 어색함, 키치적 환상, 인공의 자연, 무료함과 삭막함, 쓸쓸하고 통속적인 삶에서 잠시 허용된 궁색한 일탈이나 협애화된 낭만으로 물들어있다. ● 경쟁적이고 불안하고 모든 것이 빠르게 소모되는 도시 공간과는 달리 이 '공원'이라는 공간은 마치 천국같이 여유롭고 풍요한 낭만을 선사해주는 듯 하다. 현대인들에게 공원은 도시문명에 대한 일탈의지로 보인다. 그들은 사랑하는 연인 혹은 가족과 함께 자신들만의 유토피아를 만들고자 애쓰지만, 어쩌면 모든 것은 허구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이곳에 찾아든 가족들과 연인들은 구체적인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이룰 수 없을 것만 같은 행복과 사랑을 서로 자위하고 위무한다. 그녀의 사진에는 동시대 한국 가족주의와 연인들의 풍속이 그렇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펼쳐져 있다. ● 그녀의 사진은 한편으로는 쓸쓸하고 가슴 아프기도 하고 신랄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우스꽝스럽다. 우리네 삶의 이 견딜 수 없는 코믹함, 빠져나올 수 없는, 떨어질 수 없는 희극적인 생의 드라마가 스며있기 때문이다. ● 공원을 돌아다니는 이 관찰자는 쾌락과 죄의식이라는 관음증 특유의 이중 감정을 느끼면서 소요한다. 그렇게 해서 찍힌 사진은 공원에 대한 일종의 임상의학적인 보고서 같기도 하지만, 이 공원풍경을 하나의 내러티브로 재현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임을 동시에 깨닫기도 한다. 그만큼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이 공원에 몰려든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읽을 수 있는 징후는 너무 넓고, 깊고, 그만큼 아득하다.
다큐멘터리 사진과 디지털 테크놀로지 ● 호수공원에서 휴일을 즐기는 그들의 풍경이 작가에게는 동시대인들의 사고방식은 물론 그들의 감성, 욕망, 가치관의 변화까지도 살펴볼 수 있는 거대한 문화적 풍경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모두 역사적으로 해석될 가치가 있는 이 문화적 풍경들은 그 가치를 담보하고자 사실성과 객관성을 잃지 않는 다큐멘터리로 기록된다. 다큐멘터리 사진이란 우리 사회의 정체성에 대한 총체적 자각이자 그것의 리얼리티를 말한다. 그것은 세상 읽기이며 사회를 해석하고 문화를 해석하는 하나의 실천적 방법론이다. 그래서 그것은 특별한 해석이 요청되는 현상적인 사진이다. ● 작가는 일산 호수공원을 찍은 이 사진들이 지금 우리 삶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현재 무엇이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변해가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가와 휴식, 가족주의와 연인들 간의 사랑, 전원과 공원생활에 대한 한국인의 이상적 관념과 그 관념이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서구에 대한 상상화 된 환상, 어떠한 가치판단도 보류한 채, 한국인의 무의식적 욕망에 침투한 허상을 기록한다. 그 허상을 담은 사진은 동화처럼 아름답고 환상의 기록이기에 더욱 매혹적이다.
가족과 개 ● 인효진의 사진 안에는 대부분 가족, 연인이 담겨있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사랑을 하고 가족을 이루는 일은 자연스럽기도 하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무척 기이한 일이기도 하다. 공원 안에는 가족의 행복, 연인들의 사랑이 부채처럼 펼쳐져 있다. 이 장소는 이성애적이고 가족주의적이며 가정의 화목과 남녀간의 사랑을 낭만적으로, 환영적으로 증폭시켜 놓는다. ● 그녀의 사진 속 가족들이 보여주는 낭만적 풍경은 그들이 그리워하는 유토피아적 가족사의 자발적 연출이다. 동시에 한국 사회에서의 가족에 대한 강고하고 질긴 이데올로기가 표상화 되고 있다. 이 척박한 현실 속에서 언제나 개인의 유일한 위안처이며, 최초이자 최후의 근거지가 가족이라는 굳건한 믿음은 이 절대적인 자연풍경 앞에 기념되어야 할 것으로 다가온다. 공원에 모인 이들은 다시 한번 가족주의를 재현하고 있는 셈이다. 가족은 다양한 사회의 모순과 이데올로기에 온통 맞닿아 있지만, 이것들과 결별함으로써 언제든 '가족 자체'로 재생할 수 있는 무한한 힘을 갖고 있다. 그래서 가족은 현실적으로는 사회적이지만 이상적으로는 비사회적 또는 반사회적이다. 사진 속 가족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기족에게만 몰입해 있다. 타인들은 가족의 경계 밖에서 위험한 존재로 상정된다. 우리사회의 이 이기적 가족주의는 지나친 가족의 집착과 가족애로 인한 폐해를 은닉한다. ● 동시에 이 사진들에는 한결같이 개들이 등장한다. 여기서 '개'란 존재는 동시대의 또 다른 가족사의 시뮬라크르를 보여주는 결정체이다. 인간 상호간의 관계가 갈수록 계산된 목적성을 띠면서 냉랭한 소외감을 드러내는 시대에 처한 우리 인간은 그 어느 때보다 자율적이고 인간적인 접촉이 필요하게 되었다. 하지만 인간 상호간에 그와 같은 접촉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 조건없이 친밀한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애완동물을 점점 더 찾게 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배신당하고 굴곡심한 감정으로 인해 사람과의 관계가 두려워질 때 개는 그 빈틈으로 파고 들어와 대체된다.
쇠라와 인효진 ● 인효진의 사진을 보다보면 마치 조르주 쇠라(1859~1891)가 그린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1884-1886」라는 그림이 떠오른다. 19세기의 쇠라와 21세기 인효진의 랑데뷰! '교촌 치킨' 광고에 등장하는 그 그림은 당대의 풍속화이자 점묘주의에 따른 그림이란 점에서 유사점이 많다. 인효진의 사진도 디지털로 재현된 이미지, '점'(Dots)로만 이루어진 그림이기 때문이다. 두 작품 모두 동시대의 과학적 산물에 힘입어 재현된 풍경이자 동시대의 풍속를 반영하고 있고, 비판과 풍자적 성격이 강한 다큐멘터리에 가깝다는 점에서 공유성을 지닌다. ● 일산 호수공원에 모여든 한국의 도시인들, 뒤늦은 후발 근대화의 주자들이 공원에서 만들어내는 삶의 만화경을 보고 있노라면 쇠라의 그림 속 등장인물들과 겹쳐지면서 야릇한 층, 결들이 생겨나고 또한 미끄러진다. 인효진의 사진 역시 외형적으로는 동시대의 쇠라적인 그림으로 다가온다. 물론 그 함축하고 있는 의미나 내용은 상이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차이야말로 매우 의미 있는 텍스트를 생산해내는 핵심적인 공간일 것이다. ■ 박영택
Vol.20040908b | 인효진 사진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