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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4_0902_목요일_06:00pm
스페이스 사디 서울 강남구 논현동 70-13번지 보전빌딩 Tel. 02_3438_0300
1. 'De-sign'이라는 본 전시 주제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디자인이라는 용어에서 출발하였으나, 이 단어가 반드시 의상디자인, 산업디자인, 시각디자인 등의 구체적인 '디자인'의 영역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본 전시에서는 디자인의 정신이 순수 예술에 있어서의 작가 의도와 실행, 제작과 관련이 깊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한다. ● 우리가 흔히 쓰는 디자인(design)은 원래 무엇을 궁리 고안해서 만들어내는 과정을 말하는데, 이 개념은 이태리어 disegno에서 유래하고(불어의 dessein의 어원) 소묘(dessin, 데생)의 어원으로 과거 전통 예술에서부터 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 예술행위에 중요함을 준다. 앞서 지적했듯이 dessin과 dessein을 동시에 의미하는 disegno는 두 글쓰기 사이의 의미론적인 차이가 없었고, 18세기 중반까지 이 뜻은 회화라는 개념과 연관되어 유지되어 왔다. ● 그러나 오늘날은 여러 기능을 갖는 다양한 개념으로 발전되었다. 구체적인 어휘로서 소묘라는 단어는 '선'(線)에 형성되는 이차원적인 개념을 취한다. 이 소묘 역시 대상을 구분하는 기호적인 의미를 가지며, 그러한 관점에서 의미와 의도하다라는 뜻과 연관하여 살필 수 있다. ● 그래서 예술행위는 '무엇을 뜻하려는 의미'에서 시작된다는 관점에서, 그리고 '기호에서 부터'라는 (de signe) 생각을 본 전시회는 사진, 설치, 비디오, 인터넷, 회화 등으로 다양하게 제시한다. 실제로 수많은 미술은 세가지의 의미로서 대별할 수 있는데, 첫째 미와 감수성으로서의 의미(aesthesis) 와 '의미'로서의 뜻(semiotike), 그리고 무엇을 만들어낸다는 뜻으로서의 (poietike , plastikos) 의미가 있다. 본 전시는 미술을 semiotike라는 광의의 의미적 구조로 보는 것이며, 여기에는 다양한 이미지와 아이콘의 기능까지 포함한 기호의 의미를 갖는다. ● 현대 건축사의 거장인 오스카 니마이어(Oscar Niemeyer) 작품은 여러 현실적인 여건상 그 조형적인 건물을 촬영한 수준에서 만족하기로 하였다. 그렇지만 그 사진 촬영자가 니마이어 전공자인 저명한 건축사 교수 루이지(Gilbert Luigi)이다. 그리고, 프랑스 파리 1대학교 교수로서 조형예술의 학술적인 업적을 쌓아가고 있으며, 작가로서도 프랑스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하고 있는 겔톤(Bernard Guelton)은 파리와 서울을 웹상 연결하는 혼성적인 작품을 선보일 것이다. 그리고 시인이자 독어독문학과 교수인 고원의 구체시를 비롯하여, 작가 김창수의 사진작품, 임상빈의 외부에 대한 삶의 주체로서 반응하는 작품, 현정아의 설치작품, 배지현의 입체, 설치작품들을 통해, de-sign 즉 기호로 부터라는 주제를 다양한 조형성과 연관하여 살필 것이다.
2. De-Sign 기호로부터라는 것은 또한 재현하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미술에는 과거 왕이나 역사적 사건 등이 항상 현장에 현재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대신 하는 '재현'의 기능이 요구되었다. 이 때 실제 존재를 대신하는 다른 기호와 상징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이는 기호로서 미술로서 중요한 기능을 갖게 되었다. 사실, 기호는 어떤 존재가 현실을 이중적으로 만드는 것이고, 다시 현재화하기, 즉 '재-현'(re-present)시키는 것이다. 이 기호는 여기서, 상징과 구분될 수 있다. 상징은 심리학자에게는 실제로 현실을 재생하는 것에 국한되는 데 반하여, 기호는 언어소통의 기능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것을 통합한 의미체로서 넓은 의미의 '상징-기호'를 엮는 의미로서 기호를 살핀다. ● 이러한 관점에서 이 전시는 '미술'을 특정한 '의미'들을 '재현'하는 것만이 아니라 실제 소통으로서의 기능을 강조한다. 삐아제(Piaget)는 "재생이 주제의 조작적인 활동(유사와 적응)에 의해서 구성되는 기표들이다"라고 주목하였다. 우리는 재생의 유사화시키는 활동과 적용하는 활동을 수반하는 재현적인 기능의 가능성을 살핀다. ● 기표(의미하는 요소-기호의 물질적 측면, 소쉬르에 의하면 청각적 요소)들은 바로 조형예술에 있어서, 작가들이 제시하는 '의미'이다. 퍼스(Peirce)의 설명을 빌면, "[기호]는 다른 것을 지시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대상을 지시하는 어떤 다른 [inter-pretant] 것을 결정하는 모든 것이다." 기호는 representamen적 요소가 interpretant 으로 되고, 다시 이것이 대상으로 이 대상이 representamen 으로 영원히 순환하는 기호적 체계이다. ● 기호는 '어떤 다른 것'을 지시(제시)하는 것이고 이 전시회에서는 공간적으로 다른 곳, 다른 것을 제시하는 기호적인 의미가 있다. 또한 이 기호는 자콥슨(Jakobson)에 따르면, '일종의 지시하는(renvoi) 관계'이다. 이러한 생각은 과거 뽀르 루와얄(Port-Royal)의 '생각과 재현'(l'idee et la repreentation)이라는 두 측면으로 연관된다. 즉, "기호라는 것은 두 가지 생각을 아우른다. 첫째, 재현하는 사물이고, 둘째는 재현된 사물이다." 이러한 생각은 훗날 페르난드 드 소쉬르(Fernand de Saussure)의 의미와 깊은 연관을 갖는다. ● 이 기호성은 어떤 존재가 다른 존재를 제시하거나 지시, 의미하는 과정이며, 이러한 관점에서 의미는 미적인 구조에서도 마찬가지로 등장된다. 이 기호의 지시성은 후설의 현상학적인 기호에 대한 입장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후설은 지시(indices)와 표현을 구분한다. 그 표현으로는 네 가지가 있는데, 첫째, 이것은 물리적인 표현이며, 둘째, 의미를 주는 행위와 대치하는 행위, 셋째, 순수하고 단순한 의미들(Sinn-Bedeutung), 넷째로, 기호의 지시성(리퍼런스)과 객관성(Objectivitat) 등이 있다. 이들의 의미(Sinn-Bedeutung)는 두 가지의 형태적인 특징을 갖는다. 여기서 제시되는 것은 바로 사물의 현상적인 세계와 연관되는 과정이며, 이러한 특성은 미술에 있어서도 시각적인 세계가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기호적인 세계라고 할 수 있다. ● 기호의 성격이 그 의미와 의미하는 실체(기표)의 구조가 일치하든 하지않든, 기호는 그 자신이 지시하는 존재의 문제를 제시한다. 이 기호의 성격과 의미 구조는 미술에 있어서도 같은 관점에서 출발된다고 볼 수 있다. 미술은 과거 이래로 이러한 의미 구조와는 별 무관한 관계로 보고 있으나 실제로, 그것이 어떤 대상을 대신해서 지시(제시)하며 이 과정에서 대상을 '의미'한다면, 기호적인 요소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그것이 의미소 등의 하위구조를 가지고 있다면 분명 기호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 보통은 이 기호가 의미하는 과정이나, 어떤 행위의 개념을 강조하지는 않았다. 현대들어 기호에 관한 이론이나 언어철학에서, 비트겐쉬타인을 비롯하여, 자콥슨의 구조주의적 언어학, 프라그마티즘 언어학과 기호학에서는 기호가 행위와 의미하는 과정을 강조하게 된다. 물론 퍼스(Peirce)는 세미오시스를 '기호-행위'(signe-action)라는 개념으로 제시하며, 실제적인 의미가 이뤄지는 과정을 강조한다. 이러한 과정은 바로 미술의 형성하는 과정의 의미화의 과정으로 볼 수 있을 것이며, 본 전시의 겔톤의 파리와 서울을 연결하는 웹적인 관계와 현실에 집을 짓는 행위 속에서 더욱 그러한 의미의 과정이 연관된다고 할 수 있다. ● 뿐만 아니라, 의미적인 기호에 관한 이론은 '감성'과 '충동'에 대한 이해에 대해서도 강조한다.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는 기호학(semiotique)은 "충동의 질서이고, 이것은 심리적인 각인이나 에너지가 쌓여가는 것 (charge) 을 동시에 지시하는 정신분석학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설명한다. 때로는 이 충동적 부분은 '형상'(욕망의 실현)이라는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고, 생산의 공간(Khora)을 포함한다. 이러한 이해는 바로 의미가 감성과 독립적으로 형성된다고 믿었던 과거의 생각을 반성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반성은 로고스와 파토스를 양분하던 구조주의적 생각을 떠나, 이것이 서로 소통하는 '의미'(즉 감성적 이성)를 형성하는 것이며, 우리 『de-sign』展에 중요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기호라는 것은 의미의 차원을 넘어 욕망과 실현의 문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 또한 물리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구분하려고 했던 전통에서 히에름스레프(Hjelmslev) 의 기호에 관한 이야기를 거론한다면, function은 바로 이와 같은 이분법을 통합시킨다. 언어의 행위로 인해 표현의 형태와 내용의 형태를 통합시키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바로 이러한 형태는 미술에 있어서도, '조형 행위' 과정 속에서 그것의 형식적인 틀과 내용이 서로 조화되는 '기호'로서 새로운 의미를 구성하고 제시한다.
고원_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_2003
3. 작가 고원은 문자를 그림처럼 형상적으로 제시한 '구체시'를 통하여, 문자의 의미 요소와 함께 시각적인 의미를 연관시킨다. 작품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은 '일과과과과' 등으로 형성되며, 일과 일에 대한 생각 그리고 '일과'라는 의미를 강조한다. 또한 마지막행의 '과과과과일'로 끝냄으로써, 너무 지나친 일로 과중한 일과를 표현하는 '과'함이면서도, '과일'로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과일'이라는 의미를 동시에 갖는다. 그는 이러한 동음이의어를 이용하거나 임의적으로 붙여서 다양하게 단어를 형성하고, 더욱 풍부한 의미를 강조한다. 그가 제시하는 개념은 바로 문자가 갖는 조형성에 기초한 다의적인 태도이며, 이들이 제시하는 다양한 의미와 기표간의 문제를 복합적인 '관계'로 형성하면서 말의 놀이를 만들어내는데 특징이 있다. ● 말의 놀이는 비트겐쉬타인의 이야기처럼, 곧 용례(usage)의 확장을 통해서 새로운 의미를 형성한다는 뜻을 여기서도 연관시킬 수 있는데, 새로운 의미를 형성하는 과정으로서 시와 예술의 기호적인 관점을 주의 깊게 보게 된다.
김창수의 방법은 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두 개념으로 구별된다. 첫째, Flickering으로 이는 전자/디지털매체의 확장에 따른 시각 경험이 변화되는 과정에 기초하며, 인식의 변화를 유발한다고 작가는 생각하고, 전자매체의 '깜박거림'으로 형성되는 시각 인식의 새로운 전자매체적 방법을 형성한다. 둘째 요소는 Synthespians로서, 이는 Flickering과 함께 사용된다. 본래 의미로서의 Synthespians는 '인간이나 동물의 실제 움직임을 컴퓨터로 만든 이미지에 연계시켜 만들어 내는 새로운 기술'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합성어이자 신조어라고 할 수 있고, 다른 측면으로는 '합성해서 만든 인물'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작가에게, 이는 Flickering적 인식을 전제로 현대인의 정체성 상실에 대한 포괄적 문제제기라고 할 수 있겠는데, 거리에서 촬영된 여러 관계없는 인물들을 겹치거나 반복 사용함으로써 전혀 다른 새로운 인물을 만들어 내는 작업방식에 따른 시각적 표현방식의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작업방식을 통해, 수많은 물적, 인적 환경과 시간적 공간적 환경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우리는 내게 그리고 타인에게 어떠한 존재이며 개인적 자아란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묻고 그 본질적 탐구의 필요성에 대해 재조명한다. 이런 의미에서 Synthespians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지칭하는 종족적 개념으로서의 신인류를 의미하며, 이를 통해 현실 비판을 해나간다. ● 이러한 작품은 소립자적인 군상들 속에서 펼쳐내는 1차 층위와 그것이 형성하는 다른 형태들, 예를 들어 '집'의 형상 속에서 이차적 층위를 형성한다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것은 기호로서 즉 분절과 종합이 가능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언어적 기호의 분절성, 즉 음소와 단어 그리고 구문과 문장으로 이뤄지는 '층위'구조와 의미구조의 코노테이션과 디노테이션의 층위구조, 수사적인 층위구조를 갖는데, 이러한 구조를 시각적으로도 구현한다고 할 수 있다.
작가 배지현은 일상에 나타난 조그마한 자취와 단편들에 관심을 갖는다. 빨래 용구같은 통, 스타킹으로 된 옷 등의 소재를 통하여, 그녀는 작품에서 삶을 은유적으로 그려낸다. 한 존재자로 삶을 영위하면서 만들어내는 소시민적인 작품들은 자기 독백적인 측면을 면과 스타킹의 재료 위에 몸 없는 옷을 형상화한다. 작가가 만든 물건들은 유년기적인 관점에서 감정 이입된 것 같으면서도 작은 소품이 갖는 '인형'의 상징성을 갖는다. 원래 인형은 아이들의 인형놀이를 쉽게 생각하게 하는데, 이 때 인형이란 실제로 아이가 원하는 존재나 그 역할의 '대용', '대치'로서의 기능을 갖는다. 이러한 대치는 인간의 모습과 같은 인간동형적인 특성을 갖는다. 여기서 그려진 인간동형적인 특성은 몸없이 옷만 걸려 있어서 존재적인 불안과 허무를 설명하기도 한다. 작가는 또한 꽉 조여진 형태 속에서 더욱 속박되어 살고 있는 존재의 문제를 형상화(figuration)한 것이며, 이 형상적인 기호를 사용한다. ● 작가 임상빈은 맨하튼에서 펼쳐지는 이방인으로서의 경험을 사회 체계의 상이함 속에서 읽어낸다. 그는 공간, 그리고 영상의 시간에서 유영한 형태를 다루거나 여러 몸과 존재들의 변화를 이뤄내며, 이 과정에서 전개되는 시선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이를 통하여 그는 이질적인 요소 속에 발견되는 시각적인 의미와 영상으로서의 내러티브의 가능성을 기호적으로 전개한다. 이러한 작품은 실제로 영상이 제시하는 도시 풍경, 움직이는 시점 등으로 현실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어, 여기서는 디자인이 아닌 (필자가 말놀이를 다시 한다면) 다-자인 da-sein 으로 현존재적 특성을 강조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이것 역시 기호화의 과정으로 현실과 연결하거나 아니면 지시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리퍼런스적인 의미)
그런데 이러한 리퍼런스적인 의미는 현재만이 아닌, 과거를 담은 시간을 동반한 제시(지시)로 구조화된다. 작가 현정아는 잘려진 오래된 기억을 회상하듯, 오래된 흑백 사진이나 빛 바랜 사진을 키치적인 액자 속에 걸어 놓아 우리의 현재 삶이 갖는 독백적이면서도 이질적인 성격을 설치 작품으로 제시한다. 이러한 작품들은 그의, 아니면 다른 타인의 이야기(his-story)를 만들어낸다. 사진을 통해 개인사적이고 서술적 향수로서의 '의미'의 기호를 제시한다. ● 또한 그녀는 생물학 실험실을 연상하듯, 조그마한 유기체의 한 부분, 신체의 부분을 연상시키는 물질들을 모아놓아, 더욱 비인간화된 현실과 삶의 본질에 대한 끊임없는 우리 인간의 관심을 제시한다. 이 작품들은 "celle"이라는 개념, 곧 세포이자, 칸막이된 단위로서 제시되며, 이러한 단위는 곧 분절화의 가능성으로 볼 수 있으며, 바로 이것이 시각 예술에 있어서, 기호로서의 측면을 제시하는 것이며, 이러한 병은 마치 실험실이나 의사들의 표본 모음처럼 보인다. 그것은 더욱 잘려지고, 어떤 존재로부터 이탈된 요소로 인간의 생과 죽음을 상징하는 기호로서 등장하며 이러한 의도 속에 작가는 실존적인 주제를 제시한다. ● 겔튼은 앞서 설명하였듯이, 서울과 파리에 전통 동양가옥 모양의 찻집을 반쪽씩 설치하고 나머지 반쪽 공간에는 상대측 설치 이미지를 전송받아 투사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실제 가옥들이 빈 공간의 가성 이미지와 결합됨으로써, 가상과 실제의 성격을 넘나드는 특성을 보여준다. 이러한 가상-실제의 대치는 기호의 기능이며 특성이다.
본 전시회는 세계적인 건축가인 오스카 니마이어 (Oscar Niemeyer)의 작품을 사진(Gilbert Luigi)을 통해, 현대의 기하학적인 이해와 연관해 본다. 몽드리안 (Mondrian)의 추상미술, 루드비히 미즈 반 데어 로헤 (Ludwig Mies van der Rohe), 그리고 르꼬르뷔제 (Le Corbusier)등을 거쳐 회화와 건축 그리고 바우하우스에서도 발견되는 순수 형태의 등장은 대량생산 양식에 적합하다는 현실적인 요구만이 아니라, 형태가 단순화되는 기호화된 측면을 보여준다. 사실 언어에 있어서의 기호화는 단순화되고 추상화된다. 미술에서도 특히 현대미술에서 이러한 추상화는 그 기호적 내용이 비어있는 경우가 있더라도 기호화의 또 다른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순수 조형기호적 특성을 오스카 니마이어를 통해 살펴보며, 그 기호들에 스며있는 추상적인 아름다움을 감상할 것이다. 이 다양한 기하학적인 형태는 단순하게 사각과 원, 곡선, 직선 등의 도형을 쌓아가는 것이 아니라, 공간에 따라 그림처럼 연출된다. 그의 작품은 또한 자연과 환경에 대한 철저한 이해 속에 더욱 독립적이면서도 유기적인 조형물을 탄생시킨다. ■ 강태성
Vol.20040905c | De-sign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