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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4_0901_수요일_06:00pm
스페이스 셀 서울 종로구 삼청동 25-9번지 Tel. 02_732_8145
우리가 보는 세상은 그저 우리에게 보이는 세상 일 뿐, 실용적인 곤충의 눈에 보이는 세상은 모자이크 세상이고 자외선으로 사물을 판단한다. 인간에 비해 4~8배 멀리 볼 수 있는 매는 우리보다 훨씬 선명한 천연색 영상을 보며, 적외선으로 사물을 감지하는 뱀의 눈은 먹이가 발산하는 열을 느끼고 접근한다.
눈이라는 렌즈로 세계를 판단하는 우리의 인식은 너무도 제한적이다. 눈은 생존이 요구하는 필요조건을 만족시키는 정도의 한계를 갖고 그 한계는 우리의 가치 체계를 지배한다. 보고 싶지 않은 것이 우리의 망막으로 들어온다면 우리는 눈을 감는다. 볼 수 없던 것을 보게 될 때의 충격은 우리의 신념을 흔들고, 보이는 것을 외면하며 자신을 속이기도 한다.
지표면에서 50~ 80km지점인 지구 대기의 중간권이라 불리는 곳은 온도가 -93까지 내려가고 구름 한 점 없으며, 어떤 기상 현상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비도 눈도 내리지 않고 바람 한점 없다. 고요, 빔, 무의 세계에서 불과 80km 밑에선 태풍의 소용돌이로 아수라가 되고, 홍수에 수천 명이 죽음을 당한다. 비 한 방울 없는 뜨거운 땅에서 기아로 어린 아이가 쓰러지고, 옆 동네 라디오에선 달콤한 사랑 노래가 마치 샘플링한 음악처럼 멀리서 간간이 들리는 포탄소리와 섞여 흘러나온다.
이 세계가 절반의 평화와 절반의 투쟁의 반복뿐이라면 누군가가 말한 것처럼 삶의 부조리를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수용뿐이라는 말을 수용하고 싶다. 관계와 직면하는 나의 애매한 초점은 갈팡질팡, 당혹스럽다. 이 세계의 애매성은 우리 눈의 부정확성에서 기인하는 것인지 모른다. ● 모든 꽃은 피고 진다. 꽃 속에는 이미 '피고 짐'의 현상을 함께 담지하고 있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꽃이라는 이미지와 피고 짐의 현상 사이에서 오는 혼돈은 어쩌면 피고 짐 사이에 끼인 꽃, 아니 그 꽃을 바라보는 시각의 애매한 위치 때문일 것이다.
사물의 양가성을 이해하는 것은 가치의 이분화가 아니라 그 둘의 합병이다. 물고기의 눈처럼 화각을 넓히고 새의 눈처럼 심도를 깊게 하여, 더 보인다고 놀라 눈을 감지 말며, 보이지 않는다고 모른 척 하지도 말자. 부조리한 세계의 잔혹한 대립을 가까이와 멀리를, 줌인과 줌아웃을 반복하면서 우리 눈의 초점을 맞추자. ● 행성 전체가 다이아몬드 덩어리인 별이 빛나는 밤하늘 밑에서 왕다이아를 끼어주며 사랑을 약속하는 이 땅에서 해상도 200dpi와 800dpi의 차이는 분위기차이 정도일 뿐, 그 정도로 세계를 다 담지는 못한다. ■ 홍장오
Vol.20040904c | 홍장오 개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