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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4_0901_수요일_05:00pm
참여작가 강행원_곽은숙_김기호_김미혜_김보중_김상섭_김인순_김영진_김재홍_김정헌 김종례_김천일_남민혁_류충렬_박영균_박은태_박진화_박흥순_안창홍_양대원 양상용_여운_이명복_이성완_이인철_이흥덕_장호_지용수_최병수
책임기획_박응주
주최_서울민족미술인협회 / 후원_한국문화예술진흥원_(사)민족미술인협회
공평아트센터 서울 종로구 공평동 5-1번지 1층 전관 Tel. 02_733_9512
감각을 위하여 ● 이성을 절대적 우위에 두었던 근대주의로 말미암아 현대의 인간은, 물질문명이 쏟아내는 풍요로운 파라다이스가 언제나 인간의 것이기를 의심치 않아 왔다. 따라서 인간을 둘러싼 모든 것은 오로지 인간을 위한 필요조건으로 존재할 뿐이었으며, 자연 또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끝간 데 모를 자본의 포획력은 자연 마저도 자본화하기에 이른 것이다. ● 자본화된 자연, 그 자연을 완상하는 감각은 '자본화된 감각'이다. 나의 눈의 시각이 보고자 하는 것, 나의 코의 후각이 냄새 맡고자 하는 것, 나의 혀의 미각이 맛보고자 하는 것, 예컨대 모든 감각들은 자본화된 감각들이 되어있다. 소유라는 감각의 탄생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고 사유하고 직관하고 지각하고 의지하고 사랑하는 일까지도 어느 일방의 직접적인 향유, 즉 점유와 소유라는 의미로서만 파악하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주지하듯 인간적 현실성이라함은 그 인간적 '능동성'이요, 인간적 '수동성'이다. 즉 인간의 이러한 감각들과 속성들은 인간적으로 될 때, 곧 주관적인 동시에 객관적으로 될 때 비로소 '인간의 눈'으로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또한 다른 사람들의 감각과 향유가 곧 나 자신의 감각적 획득이 된다는 사실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개인의 감각들의 온전한 배치가 사회적 감각에로, 즉 사회적인 감관(感管)의 형식과 더불어 모색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이른바 '두뇌'에서 '사지(四肢)'의 수준으로 끌어내려, 구토, 오줌, 똥, 정액등의 조악한 신체를 운위하는 후기현대의 '감각론', 그것은 감각들의 정당한 해방이 아니다.
민미협 그림 ● 보다 진솔하게 우리 현실의 층위로 내려가 보자. 우리 산하의 저류에 흐르는 힘을 형상화하고 그 산하에 사는 우리네 삶의 바탕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여 민족미학의 한 전형을 창출했다고 평가되고 있는, 이제는 하나의 보통명사로 남아있는, 민미협 '민미협풍'이라는 조소섞인 이야기가 있다. 이는 그간의 '민미협 그림'에 생경하게 드러난 정치성 혹은 예술적인 장치에 대해서 몰안시한 투박성을 빗대는 말일 테다. ● 맞다. 그들은 트루(true)의 용법대신에 낱(not)의 용법만을 주도적으로 썼다. 말하자면 반(反)독재, 반파쇼, 반제국주의, 반세계화 등등의 '방어'적 정당성으로부터 그 존재근거를 삼고 있었던 것이다. "이게 더욱 시급하지 않냐"고, "무심(無心)의 미학을 바탕에 깔고 최저임금을 보장받는 사회적 예술로 승화(昇華)할 수는 없지 않겠냐"고... ● 우리는 그들을 '중심주의자'라 부르기로 했다. 그러나 그것은 다소 황망하게 변방에서 날아온 화살 때문에 그러했다. '중심'은 민족모순 같은 거라곤 애초에 없는 제국의 시장논리, 즉 포스트모던-이즘이 레닌의 동상과 같은 불유쾌한 대상으로 여겼던, 타도와 전복의 제1 기피대상으로 취급되었다. ● 1960년대 초 비엔날레의 거장 하랄트 제만은 이미 이를 미술적 버전으로 확인시켜주고 있다. 『태도가 형식이 될 때 When Attitude become Form』展을 기획한 그는 소위 '태도'로서의 미술을 주창함으로써 모든 중심적 테제로부터의 이탈을, 혹은 어떠한 중심적 코아(core)를 전제한 비판적 비평이 개입할 여지를 허락하지 않도록 했다. ● 그렇게 '중심'은 변론의 기회를 차단 당한 채 동구(東歐)처럼 묻혔다. 이제 그 누구도 미술은 비판하지 않는 것이 되었다. 모두에게 진리가 있고 모두는 어떠한 류의 비판으로부터도 초연할 수 있는 권리, 그러한 모순의 세월, 곳간 열쇠를 며느리에게 넘겨준 시어미처럼 그 생이 덧없는 세월이 지나가고 있다. ● 문제의 지점이 이 곳이다. 민미협의 '낱'의 용법을 두고 중심주의라 부르는데있어 문제는 없는가? 혹은 이것이 문제였다면 '트루'의 용법은 자체의 논리적 해체로의 귀결에 대해 혹은 나아가 나의 사회적 현존재에 대한 확인의 무망함에 대한 논리적 비약을 어떻게 피할 수 있는가? 이다. ● 전시(展示)는 그들을 변호하려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 그들을 중심주의자라 부르기에는 그들은 억울한 점이 있다. 거대한 역사망각의 몽매함을 무엇이라 부를 용어를 그들은 찾지 못하는 것이다. 아버지를 살해하고 표표히 떠나가고 있는 아우를 향해 무망한 손짓만을 휘적휘적 내젖고 있을 뿐 아직 그 죄명의 이름도 짓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 이런 심정적 변호를 넘어 그들의 실체로 접근해보자. 그들은 '중심'을 '주변'으로써 인식했다. 그것이 그들이 사용한 낱의 용법의 실체이다. 이를 위해 그들은 생의 실체적 변방, 즉 삶의 탈주선들에 대한 주목을 통해 기성의 편견과 맞서 싸우는 탈주의 방법을 취했다. ● 그것은 버스에서 노인이 타셨을 때 아무도 안 일어서는데 번쩍 일어나 자리를 양보하는 상쾌한 도덕적 탈주의 모습이다. 그것은 이미 피로 할대로 피로해진 코드화된 계열체로부터 벗어나 실천적이고 역동적인 '의미'를 발생시키는 생성으로서의 '중심'인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예컨대 총체화시키는 사유로서의 '중심의 고집'과는 궤를 달리하는, 하등 비난받을 종류의 것이 아니다. ● 위험한 것은 역사 몰각으로서의 탈주가 더욱 문제이다. 그것은 사물도, 삶도, 혹은 개개의 목적이나 역사마저도 모두 이성이나 정신과 같은 관념 안으로 밀어 넣어 오직 하나의 방향을 갖게 만드는 '관념의 집'인 것이다. 패륜적인 '똥고집'이 그곳에서 나온다. ● 예컨대 '민미협들'의 중심이란 중심을 비워두는 퍼즐의 '빈 칸' 같은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 곳에는 바깥들, 한 자연인의 삶을 결정하는 무수한 정치경제학적 바깥들이 회류한다. 그러나 그것은 엄밀히는 '낱-낱'의 다소간 밋밋한 계열체이다. '소통'이 목표가 될 수는 없는 일, 소통+생성을 사유해야 한다. 그것이 '낱-벋'이 되어야하는 이유다.
중심의 동요 ● 중심은 동요하고 가급적 요동쳐야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전시는 미술에 대한 위험의 징후이자 혹은 더욱 더 움직일 수 없는 미술의 아우라 세우기일 수도 있겠다. 동요 혹은 상실과 건립은 각자의 꼬리를 물고 있는 원환의 고리로 얽혀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우라 세우기'란 기실 매우 소박한 적금통장 일른지도 모른다. ● '낱-벋(not~A but~ B)'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겠다. '낱'의 용법이 전화해 가야할 '벋'의 대안(代案)으로 읽혀도 좋으리라. 거기에 사족같은 부언 하나는 그것은 낱-노어(not~nore)는 아니며 더욱이 퓨어-A(pure~A)는 더더욱 아니라는 것. 즉 초월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곧 '대중'의 얼굴이다. ● 대중(mass)의 얼굴이 정확히 보여야 한다. 대중이란 지식인과 대립하는 대중이 아닌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모습으로서의 대중을 뜻한다. 즉 그 '일상성' 속에서 포착되는 인간, 인간 존재론의 차원으로 진입했을 때의 대중인 것이다.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계(界)들을 미시적으로 추적해야 하는 임무가 여기에 놓인다. 신문, TV, 만화, 영화, 각종 잡지들, 컴퓨터 문화, 패션, 스포츠 등등은 사회 위상학을 위한 당면의 논제인 것이다. 푸코의 미시 정치학이나 들뢰즈와 가타리의 노마돌로지에 입각한 사유를 펼치되 다른 한편으로 이런 작업들을 가로지르는 계열들을 창조해야 하는 임무, 이런 계열들이 형성하는 역동적인 디아그람을 통해 부활하는 총체적 사유, 이 때 예술은 현실의 층위로 내려와 다시금 비상한다는 것이다. 낱A와 벋B의 A B가 모두 그 안에서 요동치는 회류의 지점, 이 때 제기될 법한 '대중 추수주의', '대중 함몰주의'의 우려는 그야말로 기우일 뿐이다. 우리의 '빽(back)'은 세계에 대한 실제적 표현이 가능하게 되는 구체성을 확보하는 감상자들과의 묵계, '정신적 거리(physical distance)'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대중과 미술간 소통의 전면적인 단절을 돌파해낼 힘이다. ● 그래서 우리는 not A but B이되, B에 대해서는 여전히 시큰둥하겠다. 여전히 그것은 '소박'한 것이라는 말이다. 중요한 것은 '동요' 그것만이 남아야 한다는 말이겠다. 우리는 그것들이 일으킬 '생성'을 예감하되 또한 그걸 시큰둥히 여길 거라는 말이겠다.
일상의 탈주선, 바깥의 사유 ● 그리하여 다시금 문제는 '탈주선'의 문제로 된다. 근대란 모던의 윤리나 도덕률, 혹은 자체완결적인 규범이 머릿속에 남아있어 그것이 행동을 규율하고 판단의 준거틀로 작용하는 것이었다면, 이후 후기 근대 혹은 포스트모던은 모든 규율들을 깨끗하게 벗어던져 버린 욕망의 자유로운 개진, 즉 각급의 탈주선들을 방임하는 것이었다. 이른바 무의미와 역설의 세계인 것이다. 그러나 이 때 문제는 탈주의 방향과 정도이다. 소위 고전적인 가치와 탈주적인 가치사이에서 중용을 추구하는 밸런스를 말함이다. ● 미술에서는 그러한 탈주선의 하나가 일상, 보다 정확히는 일상으로의 탈출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는 기실 교조적으로 받아들인 결과이다.(관념적 사회주의를 지적하는 용어였던 '교조주의'는 포스트모던이 모던의 '탈' 혹은 '이후'를 의미한다하여 모든 탈주는 선(善)이며, 모든 일상은 반(Anti)이성으로서 그 정당성이 확보된다고 강변하려드는 비논리적인 태도 또한 교조적 해석인 것이다.) 일상 그자체가 어떤 혁명성을 담보하고 있다는 생각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 그것은 그저 과거 큰 담론을 얘기해오던 옛날로부터의 한갓 '도피처'요, 그간 회화로 그려진 적이 없었던 일상이 만만하게 잡혀져온 것일 뿐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오늘날 라파엘로 시대의 '신화'가 소재로써 그려진다면 어떨까? ● 큰일이라도 날까?, 혹은 어떤 무수한 비아냥이 쏟아질까? 대답이란 이러하다. 예컨대 일상이라면 '어떤' 일상이고, 설사 '신화'라 한들 당대의 인간과 어떤 '감응'을 지닌 신화인가가 문제인 것이다. 요체는 인간은 대상적이고 감각적인 존재로서, 감응하는 존재라는 점이다. 이른바 자신의 대상을 힘차게 추구하는 인간에게 열정(passion)이란 인간의 고유한 능력이라 말할 수 있다. 대상에 대한 힘찬 추구는 곧 그 대상으로부터 나 자신이 '대상 삼아짐'의 다른 말이다. 이는 다시 말해 자신의 '바깥'에 자신의 자연을 갖고 있음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자신의 바깥에 자연을 갖고 있음은 곧 그 바깥의 물(物)의 본질에 참여하고 있음이며, 곧 대상적 존재임을 의미한다. 제3의 존재를 위한 하나의 대상으로 존재하지 않는 존재는 대상적으로 처신하지 않으며 이것은 곧 비대상적 존재, '비존재'이다. 그는 고독한 단독자인 것이다. ● 그림이, 회화가 바깥 존재들의 참여, 바깥 존재들로의 참여가 되어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를 미술의'현상'으로 개념화시켜 본다면 이러한 표현이 가능할 것이다.
첫째로 그것은 '기억하기', 이 땅의 모순들에 대한 순정한 따지기, 어쩌면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나의 외상(Trauma)들에 대한 속내 들려주기, 이것을 비로소 우리의 가감 없는 리얼리티로서 받아들이기이다. ● 외상은 식민지적 상황으로부터 왔다. 주지하듯, 식민지는 지식으로 작동되는 보다 은근하고 철저한 지배의 수단을 통해 권력을 행사한다. 즉 권력을 가진 보다 우월한 식민지인들, 곧 소수의 엘리트 지식인들에 대한 교화를 통해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우월한 것? 선진적인 것으로 내면화 하도록 하고 이어 이들 지식인들이 스스로 그 이념의 전파자들이 되어서 결국 식민지인들은 자신들이 지배자에게 종속되어있다는 사실을 확인시키는 재생산과정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안녕한 식민의 일상'이다. 이들이 퍼뜨리는 것은 '보편주의'이다. '합리성'을 앞장세운 보편주의 앞에 자연(自然)은, 피식민지인은, 소수자는 언제라도 깔아뭉개도 좋을, 개발의 대상, 가치의 괄호인 것이다. 전시는 이들의 상처를 드러내려한다. 반합리, 비합리, 초합리, 초보편 속에서, 흔들리면서 투명해지는 리얼리티가 여전히 유효한 독도법일 수 있는 이유이다.
둘째, 그것은 문화건설의 문제이다. 식민지적 현실이란 국가의 상실을 뜻한다. 도대체 국가가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한 집단의 가치나 도덕이 공공적으로 건립될 수 있으며 따라서 사회통합을 향한 콘센서스가 모아질 수 있겠는가? 그것은 '문화 진공'의 상태, 파편화되어 결코 맞춰질 수 없는 퍼즐들 그것이다. ● 식민화된 근대화는 역사를 망각하게 하며 역사망각은 철저히 개인화로 귀착되었고 소위 '문화'란 결코 '문명'의 문턱을 넘어서 보지 못한 표피적 '일루전 놀음' 이상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역사의 인용 불가능성에 맞서는 문제, 문명이라는 속류적 주도권을 전복하는 문제이다. ● 셋째, 그것은 '구체적'인 일상의 인과관계로 질문을 물어가는 형태일 것이다. 이러한 우리 시대의 진경산수는 답방의 형식을 띠고 이루어질 것이다. 시간과 공간이 서로 교차하면서 과거와 현재, 문명과 파괴가 서로 혼입되고 교차하는 시대의 한 가운데에 서서, 허물어짐으로써 비로소 획정되는 진솔한 경계선을 그어야 한다는 것. 문명의 실질, 파괴의 실체에 다가가 보자는 것. 어쩌면 그 가운데서 우리들이 망각했던 우리의 숨기고 싶었던 역사가 떠오를 지도 모르리라는 것이다.
에필로그 ● 마침내 패러다임이 변하고 있다. 이 전시는 변화하고 있는 중간 단계의 한 성찰로서 기획되었다. 전시는 그 성찰의 중심잡기의 한 방법으로 이 모든 소재적 접근의 근저에'나'를 산입시키는 종합의 힘, 즉 몸과 살을 놓았다. 필자는 그것에게 우리시대의 '제작운용규칙'(modus operandi : 미술사학자 파노프스키는 『고딕 건축과 스콜라주의』에서 어떤 예술작품의 표현의 변화에는 반드시 그 시대의 심적 습성(mental habit)이 정신적 맥락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들어 이를 '제작운용규칙'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고딕의 건축양식에는 그 당대의 철학의 근간이었던 스콜라주의의 숭고한 정신성의 표현인 수직성이 재료의 사용양식을 규정하기에 이른 것이며, 이처럼 제작운용규칙은 한 시대의 문화적 성향을 결정한다는 것이다)의 지위를 부여하고자 한다. 그것은 혹 '느림'이라든지, '휴식'이라든지, 섣부른 '화해'에 더 방점을 찍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줄 수도 있겠다. ● 인정한다. 그것은 '수동성'임이 분명한 것이다. 시대 속의 내가 '그리 할 수밖에 없음'의 수동성, 역사 사이에 '끼인' 존재로서의, 역사의 '써핑(surfing)' 그 물결에 몸을 싣는 행위에 다름 아닌 것이다. 실체는 '흔들리는 중심'이다. ■ 박응주
Vol.20040830c | 2004 조국의 산하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