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shing The Wall

김진혜 갤러리 개관展   2004_0901 ▶ 2004_0910

박기원_이면 behind_무늬목_가변설치_2004

초대일시_2004_0901_수요일_05:00pm

김진혜 갤러리 서울 종로구 인사동 149번지 2,3층 T. 02_725_6751

벽이란 무엇일까? ● 벽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기까지는 벽을 마주 대하는 경험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 경험은 아주 특별한 것인데, 우리는 단 한번도 벽이 없는 곳에서 살아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벽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는 데까지는 도달한 적이 없는 탓이다. 말이 되어 튀어나온 적은 없지만 먼 기억의 저편에서 어렴풋하게나마 그런 질문을 생각해본 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 벽을 마주 대하는 경험에 어떤 매뉴얼 같은 것이 있을 리 없지만, 그 특별한 경험은 다음과 같은 대강의 순서로 전개된다. 먼저, 그것은 하나의 벽과 한 인간의 만남에서 비롯된다. 어떤 이들은 이 단계에서 단지 막연한 느낌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며 또 어떤 이들은 그 느낌을 말로 끄집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대체 저것은 무엇인가?"라고. 다음으로, 그 경험은 세계의 수많은 벽들과 한 인간 사이의 만남으로 확장된다. 거기서 그는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는 수많은 벽들의 쉼 없는 탄생과 함께 소멸 또한 보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질문 할 지도 모른다. "대체 벽이란 무엇인가?"라고. 하지만 아직 하나의 단계가 더 남아 있다. 그것은 스스로 상상해 낸 세계의 수많은 벽들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일이다. 그것은 벽이 없는 곳에 자신이 있어본 적이 없다는 단순한 사실을 확인하는 것일 수도 있고, 벽이 없으면 자기도 없었을 거라는 데에까지 생각이 미치는 일 일수도 있으며, 나아가 자기가 곧 그 수많은 벽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에 도달하는 일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기에 정답 같은 것은 애초에 없다. 단지 '벽'과 '나' 사이에서 생겨나는 질서와 혼돈의 반복만이 있을 뿐이다. 벽은 이것이다, 라며 나름의 정의를 내리는 순간 또 다른 질문이 거기서 곧 생겨날 따름이다. ● 그래서 벽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벽이 흔한 것처럼 누구나 던질 수 있다는 점에서 보편적인 것이지만, 언제고 어디서나 던질 수는 없다는 점에서 매우 특별한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벽이 우리에게 그 질문을 허락할 때에만 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 벽은 무엇인가 하는 데 대한 수 없이 많은 견해들이 이미 있다. 건축의 한 요소로서 이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넘어서고 부셔야 할 장벽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나'와 '남'의 적절한 구분을 위한 정체성의 근거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모두가 벽에 대한 견해로서 손색이 없는 것들이다. ● 『Pushing The Wall』展을 보며, 벽에 대한 기존의 다양한 견해들을 한번쯤 떠올리는 일은 아주 좋은 일일 것이다. 누군가는 거기서 장벽을 볼 것이고, 누군가는 거기서 정체성을 볼 것이며, 또 누군가는 문학 작품 속에서 그려진 신비한 벽의 모습들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관객의 노력으로 인해 이 전시의 의미는 실제보다 더 풍부해질 것이다. 다만, 이 전시에서 관객들이 꼭 봐주었으면 하는 벽의 모습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모든 인간적인 것들, 모든 문화적인 것들의 시작이 벽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동굴에 벽화를 그리던 까마득한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사실이다. 물론 그때는 지금과 많은 것이 달랐겠지만, 지금과 같이 그때에도 그들은 벽에 의지해 생명을 지키고, 상상력을 키우며, 생명을 그려냈을 것이므로. 얼룩처럼 아주 작은 부분만을 밝힐 수 있는 희미한 불빛에 의지하여 생명을 그려냈던 그들의 모습 속에, 우리의 모습이 있다.

박기원_이면 behind_무늬목_가변설치_2004_부분

1. 박기원의 작품 「이면 behind」은 전시장 벽 전체에 걸쳐 있다. 20~30cm 폭의 세로로 긴 무늬목이 옆으로 연이어 포개진 형태로서 그 자체가 벽으로 보이는 작품이다. 차라리 그것은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만나게 되는 여느 벽들보다 더 벽 같다는 점에서 진정 벽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게 되는 벽들은 이미지나 문자로 늘 포장되어 있다는 점에서 벽 그 자체는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이미지나 문자를 위해 소용되는 것일 따름이다. ● 한편, 우리가 그의 작품을 보는 순간 우리가 서 있는 공간을 의식하게 된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은 벽이라기보다는 공간이 아닐까? 요컨대, 박기원의 「이면 behind」은 벽인가 아니면 공간인가? 먼저 그의 작품은 공간과 분리 표상 될 수 없다는 점에서 벽-공간이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그 순서를 바꿔, 벽-공간이라기보다는 공간-벽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머리 속에서 그의 작품을 지워버리고 공간만 남기는 일은 가능하지만 그 반대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기를 써보아도 그의 벽-작품을 공간과 분리하여 표상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 박기원은 자신의 벽-작업을 일컬어 공간을 확인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아주 조용히 공간에 개입하는 그의 작업은 아주 얇게 벽면에 찰싹 달라붙어 있다. 양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그 개입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불과 1cm 남짓한 두께의 차이가 생겨났을 뿐이다. 하지만, 질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큰 차이가 느껴지는 데, 그의 벽-작품으로 인해 공간이 한층 더 밝아지고 더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의 벽-작품이 있기 전에도 그 공간은 나름의 최소한의 크기로 존재했겠지만 그의 벽-작품이 놓임으로써 그 존재감이 한층 더 커진 것이다. 달리 말해 그의 벽-작품에 의해 그 공간의 氣가 살아난 셈이다. ● 그의 벽 앞에서 우리는 벽을 그 자체로서 느끼는 흔치 않은 경험을 하게 된다. 벽에 의해 氣가 살아난 공간과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거기서 우리는 벽이라는 존재의 의미와 우리의 실존을 느끼는 것이다. 우리의 몸과 마음과 그 존재와 그 무게를 느끼는 것이다. 우리를 살리며, 우리를 깨우치는 벽. 거기서 누군가는 면벽(面壁)의 깨달음을 어림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채미현_생명의 시작_레이저_가변설치_2004_부분

2. 어둠 속에서 세 개의 초록빛 레이저가 위를 향한 움직임을 반복하고 있다. 위로 향하는 전반적인 움직임 속에서 아래로 향하는 찰나의 움직임이 특징적이다. 채미현의 「생명의 시작」을 마주하는 순간 우리는 그 레이저의 氣에 의해 우리의 몸이 '어쩔 수 없이' 떨리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 빛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존재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 빛을 봄과 우리 몸의 떨림은 동시적인 사건이다. 그 빛은 곧장 우리의 몸을 향해 달려든다. 그 빛은 분명히 우리 앞에 저 밖에 있지만, 이미 여기에 우리의 몸 속에 언제나 있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마치 처음부터 우리 몸 속에 있었던 빛을 잠시 밖으로 꺼낸 것처럼. ● 그 빛은 어둠 속에서 자기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어둠을 몰아내지 않으면서 자기가 존재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빛만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 빛에 의해 어둠 가운데 약간의 밝음이 허용되고 무한했던 공간에 형태가 부여되며 그 형태의 끝에서 벽이 생겨나는 것이다. 하지만, 한번 더 생각해보면, 벽은 이미 거기에 있었고 그리고 나서 어둠 속에서 그 빛이 생겨난 것이다. 어쩌면 그 빛은 어둠이 아니라 벽에서 태어난 것은 아닐까. 얼룩처럼 아주 작은 부분만을 밝힐 수 있는 희미한 불빛에 의지하여 그려진 태고적 생명들이 태어난 곳도 벽이 아니었던가.

채미현_생명의 시작_레이저_가변설치_2004

그 빛은 마치 벽에서 태어난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보이는 데에는 실제적인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세심하게 본다고 해도 한참 후에나 볼 수 있는 그 빛의 궤적 때문이다. 대개 우리가 떠올리는 레이저의 모습은 공간을 가로지르는 궤적의 이미지이지만, 채미현의 「생명의 시작」에서 보이는 레이저는 작가의 미세한 조정으로 인해 그 궤적을 감추고 있다. 다른 하나는 위를 향해 움직이는 빛의 이미지가 벽에서 가장 강하게 드러난다는 점이다. 벽이 아닌 허공에서도 그 빛은 위를 향한 움직임을 보여줄 수 있다. 하지만 벽 위에서 그 움직임이 이루어질 때, 레이저의 점 하나 하나의 氣가 고스란히 살아날 수 있기 때문이다. 허공 속에서 그 빛은 단지 매끈한 선에 불과한 반면 벽 위에서는 그 하나 하나가 입체인 점으로 살아 있기 때문이다. ● 채미현의 레이저는 벽을 타고 기어오름으로써 자신의 생명력을 최대한으로 드러내며 우리 속으로 곧장, 어떠한 우회의 망설임도 없이 들어와 우리의 존재를 일깨운다. 그것은 우리 삶의 모습을 드러내며 우리의 존재를 일깨우는 생명의 빛이다. ■ 김성열

Vol.20040830b | Pushing The Wall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