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을 넘어서는 힘

김지인 개인展   2004_0827 ▶ 2004_0905

김지인_Layered Canvas_캔버스 천에 젯소, 아크릴채색_33×285×150cm_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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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4_0827_수요일_05:00pm

금산갤러리 서울 종로구 소격동 66번지 Tel. 02_735_6317

진정한 '여행'을 하고 싶다고 마음속으로부터 생각하는 사람은 평범한 여행을 하려 하지 않는다. 카메라를 늘어뜨리고 명소유적을 찾는다든지, 쾌적한 탈것과 숙소, 맛있는 식사와 쇼핑을 즐기더라도, 마음속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그런 것들은 모두 「여행」의 액세서리에 지나지 않고, 「여행」 그 자체로부터 주의를 흐트러뜨려 버리는 산만함(distraction)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 그렇기에, 진정한 「여행」을 원하는 사람은 어쨌든 걸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걸음에는 최소한의 반려와 액세서리가 필요할 것이다. 빈손으로부터는 「여행」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백은 시를 가지고, 지오토(Giotto)는 물감과 붓을 가지고 여행했다. 가와라 온(河原溫)은 '날짜 적은 그림(역자 주-그가 1966년부터 매일 지금 살아있다는 증명을 적은 것)'과 함께 이동한다.

김지인_Folded Canvas_캔버스 천_24×50×28cm_2004
김지인_Leaned Canvas_캔버스 천_64×65×90cm_2004

지금 우리들의 주인공인 김지인은 왁스, 동판, 캔버스, 티슈페이퍼라고 하는 최소한의 물질과 함께 여행하고 있다. 과대한 액세서리와 주위를 산만하게 하는 것들을 모두 던져버리고, 하지만 정처 없이 기분에 따라 휘적휘적 걸어가는 것이 아닌,「조각이라는 여행」을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최소한의 물질들과의 교섭을 반복해 나가는 과정에서, 아직 누구도 본적이 없는 「진정한 조각」의 그림자가 나타나리라는 것만은 기대하는 모습으로. ● 예술에서 소중한 것은 반어적으로 밖에 표현되지 않는다. 김지인의 '진정한 조각'에 이르는 여행도 역시, 언뜻 보기에는 반조각적, 비조각적 이라고 생각될만한 작법으로 짜여져 있다. 우선, 김지인은 소재를 고르는 단계에서부터 지금까지의 조각가들의 양괴(mass) 신앙에 등을 돌리고 있다. 좀더 얇은, 좀더 가벼운 소재에 대한 취향은 일찍부터 싹튼 것 같지만, 그 경향은 점점 과격해져서, 작년의 제3회 개인전에서는 왁스를 살짝 입힌 티슈페이퍼까지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도저히 취향이나 기질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의 과격함이며, 그러면서도 왁스를 입힌 티슈로부터 일상잡화의 성격이 사라져 있다는 점에서, 다다적인 반예술ㆍ일상지향의 움직임으로부터도 명확히 구별된다.

김지인_Traces_캔버스 천에 아크릴채색_5×182×466cm_2003
김지인_Traces_티슈_25×65×25.5cm_2003
김지인_Traces_동판_28×365×15cm_2003

명백히, 김지인은 조각을 의식하고 있기에 조각과 불가분이라고 생각되어온 양괴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도전은 정말로 양괴를 부정하기 위한 것일까. 아니면, 양괴에 대한 무관심에서 나온 것일까. 아무래도 그렇게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녀는 보통의 (범용한) 조각이 보여주는 양괴관에 모반을 시도하는 것으로써, 조각예술이 원래 「양괴」에 맡겨온, 더욱 본질적인 것, 더욱 소중한 것을 밝혀내려고 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이상의 것을, 김지인은 직감으로 숙지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녀가 극한까지 얇은 것을 추구하는 것은 「물질 내에 있고, 물질을 넘어서는 힘」, 즉 진정한 양괴성을 끌어내려고 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양괴에 등을 돌리는 그녀의 행위는, 조각에 한층 본질적인 몸매, 말하자면 청년기의 몸매를 되돌려 주기 위한, 반어법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 반어적 반(反) 양괴주의와 함께, 김지인의 작품에 조용한 「조각선언」의 모습을 부여하는 것은 소재의 단일성, 순일성(純一性)이다. 그녀는 나무조각, 철, 동, 납, 왁스, 시멘트, 종이, 캔버스, 티슈페이퍼 등 여러 가지 물질을 등장시켜 왔지만, 한 작품에 하나의 소재라는 원칙을 당연한 듯이 지켜왔다. 당연한 듯이, 라고 얘기하지만, 그것은 독자적인 조각! 관이 없으면 일관되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주목할만한 특질이다.

김지인_Yellow Colored Canvas_캔버스 천에 아크릴채색_21×42×31cm_2004
김지인_Yellow Colored Canvas_캔버스 천에 아크릴채색_21×110×35cm_2004
김지인_Blue Colored Canvas_캔버스 천에 아크릴채색_21×23×21cm_2004

김지인의 모든 작품은 사람과 물질과의 사이에 오고 가는 상호작용의 행위를 반복하는 것으로 성립하고, 또 그 반복의 사실을 흔적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실로 그것이 김지인에 있어서의 반복의 특이한 점이다. 그녀의 작품은 반복을 감추지 않는다. 반복이라고 하는 행위의 생생함, 그 메커니즘을 노정하고 싶어서 일까. 그럴 리는 없다. 반복이 기술의 연마라고 하는 목표를 가지는 것을, 즉 사람과 물질과의 상호작용의 작업에 종점이 설정돼 있는 것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반복은 기술을 위해서 불려 나온 것이 아니다. 사람과 물질간의 상호작용이라고 하는, 조각의 원형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작업으로 되돌아가기 위해서, 우선 반복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반복은 기술이라고 하는 종점은 물론, 무언가의 형태를 낳는다고 하는 임무를 띠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진정한 여행」을 추구하는 사람은 여행에 익숙한 것은 비루히 여기고, 일꾼들처럼 목적을 특정하는 것을 거부할 것이 틀림없다. 그처럼, 김지인은 반복이라고 하는 보행이 기술 연습이 되어버리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작품이 보행 이외의 무엇인가 의미와 형태라는 종점을 확정해 버리는 것을 주도 면밀히 피하고 있는 것이다. ● 반복은, 작가의 손(망치와 붓)이 직접 물건의 표면을 계속해서 두들기는 모습을 가지는 것도 있고, 물건의 틀이 다른 물건과 접촉함으로 인해 변형하면서 사출을 반복하는 casting의 모습을 취하는 것도 있으며, 더욱이는, 물질이 공간 속에서 반복해서 배치되는 모양을 가진 것도 있다. 그 어느 것에서도 김지인의 반복은 사람과 물질과 공간의 사이의 무상의 상호교섭이라고 하는 작업으로 일관하고, 그 이상의 의미(액세서리)와 사람의 눈을 기만하는 효과(distraction)를 띠고 있지도 않다. 지극히 당연한 정치적, 사회적 메시지라든지 환경보전에 대한 호소 등으로 양념을 한 불순물 투성이의 조형이 세계적 규모로 '좋다'고 일컬어지는 오늘, 이 정도로 초연한 무욕과 무목적으로 일관한 예술가가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감동적이 아닌가.

김지인_Blue Mosaicked Space_종이에 수채_41×33cm_2004
김지인_Yellow Mosaicked Space_종이에 수채_41×33cm_2004

하지만 그것은 정말로 대가 없는 무상(無償)의 작업일 것인가. 사람은 그렇게 무상의 행위를 견딜 수 있는 것인가. 만일 가능한 일이라면, 그것은, 생각건대, 하나의 거대한 야심이 그 작업을 만들어내며, 동기를 부여해 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조각」이 그 원형적인 모습을 극한까지 드러내는 듯한 황야를 하여간 걸어가는 것으로서, 예전에는 없었던 「진정한 조각」의 모습을 엿보여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그런 희망은 여러 가지 진리에의 갈망과 마찬가지로, 그것만으로도 사람을 일으켜 세워 걷게 할 수 있게 하는 무상의 동기인 것이다. 무목적처럼 커다란 목적은 없다. 무상처럼 커다란 대가는 없다. 김지인의 최대의 반어법이다. 왜냐하면, 혹시 개인적 관념의 환상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이 「진정한 조각」이, 실로 그 무상성을 고임돌로 하는 아르키메데스! 의 지렛대의 한 끝을 눌러줄 수 있을 때, 그 장대한 지렛대의 다른 끝에는, 인간과 물질의 관계에 대해 전혀 새로운 매너를 가진 한 문명의 총체가 들어올려져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_'조각'의 나그네, 제5회 개인전 전시서문 발췌 ■ 미네무라 도시아키

Vol.20040829a | 김지인 개인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