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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4_0825_수요일_05:00pm
갤러리 썬앤문 서울 종로구 관훈동 30-9번지 청아빌딩 2층 Tel. 02_722_4140
송지인의 인간들의 신체는 시멘트로 되어 있다. 그만큼 온통 굳은살이 베겨버린 신체, 아니면 그것들은 시체의 특별한 처리방식을 닮아 있다. 미이라처럼, 기억과 시간의 견고한 유폐일 뿐인 그것들엔 일체의 세부묘사도 허용되지 않는다. 고작 머리와 몸통, 사지의 겨우 구분 가능한 둔중한 연결이 조형적 참조의 거의 다이다. ● 그(것)들은 서있거나 앉아있고, 누워 있다. 때론 상체가 결여된 상태로, 때론 몸통 전체를 대지에 묻은 듯 겨우 머리와 가슴을 내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 어떤 경우에도 그것들은 오직 그들 자신의 고유한 방식으로만 존재한다. 다른 그 무엇도 아닌, 오로지 존재감만이 다인 느낌, 무표정하고 무채색인 일테면 질료 자체 외엔 아무 것도 아닌... 그들에선 표정이나 언어, 행위 같은 또 다른 생의 단서들이 목격되지 않는다. 특히 색의 부재는 그들을 더욱 단절된 외곬수적인 존재감에 붙박아두고 있다. 송지인의 인물들이 저 깊은 곳으로부터 도래한 것 같아 보이는 것은 아마도 이런 인상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그리고, 언어들은 분명 콘크리트에 짓눌려 있다. 하지만, 그것은 '매미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한 여름 오후, 끓어오르는 아스팔트 위로 흐르는 정적' 같은 언어다. 어떤 말씀, 어떤 행위가 있기 이전부터 존재해 온 아득한 심연의 웅덩이, 곧 '침묵'의 언어다. 우리가 듣는 방식을 잃어버린 고요의 언어이기도 하고. 그것은 혹 거리에 넘치는 말과 말도 안 되는 소리들로 삶이 부서져 내려앉을 때 막스 피카르트가 떠올렸던 치유의 언어 비슷한 것일 수도 있다. ● "침묵이 삶을 치유하고, 뒤틀린 삶의 궤도를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다." 그러니 혀를 각성시키고, 말의 어머니인 침묵으로 말하게 하라는 것이 피카르트가 권하는 바다. 떠들고 있는 동안 절대 알 수 없는, 자신을 드러내거나 세상을 추종하는 사유로는 절대로 들을 수 없는, 송지인이 이 언어를 채택한 것은 그것이 오로지 존재에 주목할 수 있게 하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토록 무표정하고 과묵하며 단지 무거운 '있음' 일 뿐인 그들이 존재 자체로 발화하는 이른바 '존재 언어'인 것이다. 여기까지가 다라면, 송지인의 인간 군상에서 생의 경이로움을 경험하기는 쉽지 않을 터이다. 회색의 모노크롬이 생의 결여와 주검의 인상에 훨씬 더 가깝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그것은 분명 주검에 더 가깝다. 아니 그 내부엔 고작 주검이 자리하고 있을 것 같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어떻든 대체 이 굳어버린 생의 표피에서 살아있는 다른 어떤 것을 기대할 수 있을까. 콘크리트 층은 너무나 빈틈없이 두텁고 육중할 뿐이다. 그 내부가 무엇이건, 이 견고한 틀을 부수기에는 역부족일 것이다.
하지만,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그 견고한 것들은 자신들을 열고 있다. 그들은 확연하게 때론 예리하게 갈라진 틈으로 자신을 세상 밖으로 확산시킨다. 온통 굳은살로 덮여버린 신체, 다만 주검에 가까운 우울한 존재감, 그리고 외부와의 깊은 단절은 이 자신을 가르고 쪼개는 봉헌으로 한순간 세계와의 소통과 화해의 미덕으로 나아간다. 이제 존재의 내면은 이 힘겨운 자기부정의 틈새를 타고 눈부신 푸른빛으로 쏟아져 나온다. 그것은 마치 한 겨울을 지나 쪼개어진 석류에서 홍보석 같은 알이 쏟아져 나오는 것만큼이나 경이롭다. ● "영혼의 가마솥에 들끓던 사랑의 힘 / 캄캄한 골방 안에 / 가둘 수 없구나 (...) / 온몸을 휩싸고 도는 / 어지러운 충만 이기지 못해 / 나 스스로 껍질을 부순다 / 아아, 사랑하는 이여 / 지구가 쪼개지는 소리보다 / 더 아프게 / 내가 깨뜨리는 이 홍보석의 슬픔을 / 그대의 뜰에" ● 『작은 틈새로 흐르는... 자아』같은 작품에 난 찬란한 빛의 통로들에서 생의 충만을 논한다 해도, 그것을 뜬금없는 영지주의적 오독쯤으로만 여길 것이 아니다. 사실, 그 육중하고 견고한 신체에 가늘고 예리한 틈새가 생겼을 때, 일순간 모든 것이 너무나도 극적으로 변해버렸다. 생의 부담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었던 콘크리트는 스스로를 파산하면서 생의 약동으로 나아간다. 마치 무겁고 느슨한 유물론적 존재에 갑작스럽게 생의 의지가 덧입혀지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육중한 존재감을 지탱하던 정태성, 폐쇄성은 빛의 돌연한 산란과 더불어 역동성, 개방성으로 화한다. 이전에 신체는 다만 피할 수 없는 생의 유배지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그 안에서 보이지 않게 생명을 키워 왔던 인큐베이터였음이 드러났다. 회색의 모노크롬조차 더 이상 주검을 상징하는 핏기 없음 대신, 스스로 꾸미기를 거부하는 어머니의 숭고한 정서를 대변하는 것이 된다. 이 모든 변화는 말 그대로 베르그송적인 생의 도약을 환기하게 한다. 콘크리트 신체에 균열이 가는 그 순간은 곧 생명이 자유와 해방의 신비로운 날개 짓으로 솟아오르는 시점이기도 한 것이다.
송지인이 콘크리트와 빛을 대비시키는 방식, 가장 물질적인 존재로의 유폐로부터 가장 찬란한 생의 도약에 이르기까지를 하나의 구조 안에 응집시키는 방식은 매우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특히 시각과 정신의 언어를 혼용하는 그의 방식은 매력적인 시작(詩作)의 한 유형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것은 물질계로 깊고 무거운 존재감을 형성한 다음, 그것을 다시 비물질적 약동의 질료로 환원시키는 설득력 있는 대비적 수사법에 의한 것이다. ● 송지인의 「견고」, 「인큐베이터」, 「견고함의 사이」, 「작은 틈새로 흐르는... 자아」로 이어지는 콘크리트 인간상 연작은 그의 작가로서의 재능을 충분히 입증하고 있다. 그는 질료를 감각적으로 이해하는 방식, 물질과 비물질을 어떻게 시각적으로 혼융하는가의 문제에 매우 효과적이고 지적으로 길을 찾아가고 있다. 그리고, 물질의 뉘앙스의 조절한다는 것, 비물질을 조형화하는 것의 의미를 알아가고 있다. 그가 이제 막 출발한 젊은 작가라는 사실로 인해 우리는 더욱 탁월한 성취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된다. ■ 심상용
Vol.20040825b | 송지인 조각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