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짓-상징적 질서와 의미의 은폐

한준희 영상展   2004_0825 ▶ 2004_0910

한준희_Into the drama_단채널 영상_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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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_0825 ▶ 2004_0831 / 갤러리 창 초대일시_2004_0825_수요일_06:00pm 2004_0904 ▶ 2004_0910 / 연수문화원 갤러리 초대일시_2004_0904_토요일_05:00pm

갤러리 창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6번지 창조빌딩 Tel. 02_736_2500

연수문화원 갤러리 인천시 연수구 동춘동 923-5번지 연수구청 내 Tel. 032_821_6229

구조화된 욕망의 차폐막 뚫기 ● 1. 인간은 자신이 속한 사회의 문화적 코드를 습득하고 받아들일 때만이 상징계 사회로의 진입이 가능하다. 그곳에서 인간은 안정된 자아를 획득하며 타자에 의한 언어와 의미의 네트워크로 이루어지는 진정한 의미의 욕망을 가질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상징계에서 형성되는 욕망의 주체는 다른 누구와도 교환이 가능한 언어에 지나지 않는다. 주체의 욕망은 누군가의 욕망을 모방한 결과일 뿐이다. 따라서 인간은 실제의 자신은 무엇이었고, 원래의 자신은 누구와도 교환이 가능치 않은 온전한 존재였던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을 갖게 된다. 작가 한준희의 작업은 이런 사유의 기반 위에서 구축하여가는 영상이미지들이다. 욕망은 타자의 언어이고 무의식조차도 구조화되어 있음을 보여주며 거기로부터 '나는 누구인가'라는 오래되었지만 언제나 새로울 수밖에 없는 물음을 다시 불러 세우는 것이다.

한준희_In a dream_영상설치_2004
한준희_daily life_단채널 영상_2004

2-1. 신이 사라진 시대, 외롭고 서러운 인간은 우상을 만들어 모방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인간이되 스스로를 독립적인 인간으로 표현할 수 없는 대중들은 그런 조작된 우상의 욕망을 전이하며 살아간다. 결핍에 의해 작동되는 이러한 욕망은 본능적이고 생성적인 욕망의 흐름을 단절시키며 구조화된다. 식민화된 욕망이 대중의 이상적 타자로, 상징적 질서의 창조자로 행세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중이 모방하는 것은 우상의 실체가 아니라 그것의 이미지일 뿐이기에 불안한 우상은 늘 대중의 욕망을 예리한 촉수로 더듬을 수밖에 없다. 우상의 욕망은 언제나 대중의 욕망을 모방한 대리 욕망인 셈이다. 이것이 우상의 욕망과 대중의 욕망이 뫼비우스 띠처럼 끝없는 자리바꿈을 시도하며 서로의 욕망을 모방하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이유이다. 이제 인간은 자신을 강제하는 행위규범이나 실천체계들에 대해 아무런 의심을 갖지 않는다. 온전한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본능적이고 자유로운 유목적 욕망의 흐름을 복원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린 지 오랜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한준희는 불안한 우상이 만들어 가는 상징적 질서는 불안정한 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전제하에 온전한 상태로의 복원 가능성을 탐지하고 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제도와 권력 사이사이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찾아내 밝힘으로써 인간의 욕망과 삶에 구조화되어 있는 여러 문제에 대해 재인식을 시도하는 것이다.

한준희_pray_2채널 영상_2004

2-2. 영상은 새로운 공간을 개척하는 특유의 산란장으로 뒤에 남겨 놓은 장소들로부터 벗어난다고 믿는다. 그러나 시간은 공간이 아니어서 그것의 앞에는 언제나 과거가 놓여 있고, 과거를 벗어난다 해도 그 거리는 좀처럼 멀어지지 않는다. 영상은 그것이 피하는 것을 만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한준희의 작업은 양식화된 일상의 행위들을 영상이미지로 기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것은 그가 상징적 질서의 공간 속에서 오히려 자유로움을 느끼는 시스템화된 인간의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 택한 방식이다. 그의 작업에 등장하는 인간들은 충혈된 눈을 충혈된 눈으로 바라보고, 드라마 속에서 드라마를 보며, 종교적인 문제들과 촛불시위에 광적인 반면 지하철에서 습관처럼 화장을 하고, 햄버거를 마치 외계인처럼 먹어댄다. 이런 다양한 문화적 양태들을 엿보기 방식으로 촬영한 후 그것을 반복, 연결, 영사 속도의 조절 등을 통해 해체, 재구축하면서 불안정한 상징적 질서 속을 오염 덩어리로 살아가고 있음을 스스로 깨닫게 만든다. 그러나 한준희의 작업은 작가 자신의 입장이나 어떤 하나의 귀착점을 미리 설정하고 있지도 않고 전제하지도 않는다. 그가 천착하고 있는 삶과 정체성에 대한 의문 제기는 희망적인 답을 찾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기표에서 기표로 이어지는 사유의 과정일 뿐이다. 따라서 한준희의 영상이미지들은 작업 과정 중의 일시적 정지로 존재하며, 오히려 그는 작업을 해나가는 과정, 그 자체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집단적 재현물을 통해 현실을 지시하고 개조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집합적 재현물 자체에 주목하여 사회적, 구조적 조망으로부터 이탈하려는 인식론적 시도라 할 수 있다.

한준희_재롱잔치_단채널 영상_2004
한준희_1호선_4채널 영상_2004

3. 영상이미지로 만들어지는 한준희의 사유와 실천은 오염으로 점철된 상징계에 균열을 만들어 혼란을 야기하고, 그 때 드러나는 수많은 문제들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통해 구조화된 욕망의 차폐막을 뚫어 열린 현실계를 체험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현실에서 관찰된 대상은 구조화된 사회시스템의 작동 결과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모든 시스템의 구성요소들은 시간적 결과를 고려한 위상공간 내에서만이 온전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이것이 욕망의 유목성을 향한 그의 작업이 절편된 시공간이 아닌 연장된 시공간 속에서, 같은 말이지만 그 시공간의 밖에서 다양한 방법론으로 지속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 박황재형

Vol.20040825a | 한준희 영상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