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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4_0818_수요일_06:00pm
토론회_2004_0831_화요일_03:00pm
서신갤러리 전북 전주시 완산구 서신동 832-2번지 Tel. 063_255_1653
소통-현실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 ● 인위적인 조명과 즉흥적인 번쩍거림, 세련된 곡선과 야한 색상으로 대변되는 현대도시의 현란함을 카메라로 포착한 뒤 그 빛깔을 버려진 돌멩이에 뿌리면 어찌될까? 그냥 버려진 돌멩이로 남겨질지, 아니면 쇼윈도우를 장식하는 화려한 보석으로 다시 태어나게 될지 궁금하다. 인간의 視지각이 빛의 입자와 파장에 의한 반사와 굴절이 만들어낸 사물 표면의 떨림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면, 버려진 돌멩이는 적어도 그 위를 감싸고 있는 화려한 조명이 꺼지지 않는 한 보석으로서의 새로운 소임을 부여 받게 될 것이다. 거꾸로 그 빛이 소멸함과 동시에 돌멩이는 다시 땅에 버려질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빛이 쏘여지기 전이나 후나 돌멩이는 그대로 인데, 달라진 점은 표면에 비추어진 빛이 사라졌다는 사실 하나이다. 사물을 지각하는데 있어 빛의 표피성과 시간에 따라 변하는 관점의 불안정함, 그리고 그로 인해 만들어진 가치의 가벼움을 깨닫는다면, 사물을 바라보는데 있어 보다 다양한 접근과 해석이 가능할 지인데 빛이 만들어낸 화려함 껍질에서 자유롭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그 껍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보다 통찰력 있는 안목을 가지고 직접 만져보고 느껴보며 視지각의 한계를 극복해야 할 것이다.
10여 년 넘게 작은 돌멩이를 애지중지 모아온 작가 김명숙에게 있어 이러한 긴 설명은 불필요한 듯 하다. 그는 이미 사물의 가치란 관찰자에 의해서 부여되는 것임을 알고 있다. 그래서 본래 가지고 있는 가치가 아무리 숭고한 것일지라도 그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인식능력의 한계를 인정하고 있기에 작가는 사실적인 그리기 방법부터 다시 시작한다. 한 겹 한 겹 덧칠하는 지루한 과정을 통해 뼈대가 만들어지고 색깔이 피어난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근본을 이루고 있는 원리 즉 질서를 찾아내는 과정이다. 이를 통해 작가는 보다 친밀한 거리에서 대상을 재조명하게 되고, 실제 사물에서는 발견하지 못한 조형질서를 선과 곡선, 색과 빛을 이용해 새롭게 재현해 놓는다. 이로 인해 그의 작품은 서로 다른 색깔의 옷을 입고 있지만 모두 하나의 질서에 의해 일관된 빛을 발하게 된다.
마치 슬라이드 프로젝트에 의해 어두운 암실 흰 벽면에 투사된 이미지처럼 빛을 발하는고 있는 김명숙의 그림은 사진에 가까운 재현력을 바탕으로 알록달록한 작은 돌들을 캔버스에 확대해 올려놓는다. 한치의 오차 없는 포토리얼리즘 계열의 작가 리차드 에스테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유리 표면에 반사된 이미지처럼 김명숙의 작품이 그려내고 있는 사물을 해부하기 위해선 빛과 시선의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빛의 반사에 의해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도록 한 에스테스의 작품 속 유리 표면을 예로 들어 빛과 시선의 문제를 살펴 보자. 화면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매끄러운 질감과 특히 자주 인용되고 있는 반사된 유리표면과 금속 표면으로 인해 관찰자의 위치에 있던 외부시선은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었던 특권을 박탈당하고 역으로 유리 표면 안쪽의 내부시선의 응시 대상이 되는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거울처럼 이미지를 반사시키고 있는 표면으로 인해 관찰자는 그 어느 때 보다 객관적인 위치를 점하게 되는데, 이를 통해 관찰자와 대상(사물)사이의 관계 역시 역전될 수 있으며, 그 경계 역시 모호해 질 수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김명숙의 작품 역시 빛이 굴절되고 반사되는 돌 표면으로 인해 관찰자와 대상이 동등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반투명한 구조 덕분에 관찰자는 표면의 번쩍임 뒤에 숨겨진 내부 속살을 살필 기회를 갖는다.
김명숙의 이번 작품은 묘사 테크닉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개인적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고, 현실을 반영하며 한 목소리를 내고자 했던 이전 시기의 사실주의 회화 정신을 포기하는 모험을 감수하였다. 팝 아트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유쾌함을 대신해 진지함이 자리하게 되었고, 시대를 비판하고 풍자하였던 냉소를 대신해 작가 개인의 내밀한 기억과 순수한 미적 경험이 자리하게 되었다. 스타일 면에서 잡지에 실린 상업 사진의 유혹적인 화려함을 최대한 활용한 흔적이 보이지만 그렇다고 화면 표면까지 매끄럽게 만들어 키치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있으며, 내용면에서는 일관되게 보석을 연상시키는 작은 돌을 확대하여 그려진 대상이 단순히 묘사의 대상이 아닌 작가 자신 혹은 이 시대의 여성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래서 비록 실제 리얼리티하고 일정 거리를 두고 있지만, 대상과의 친밀한 관찰과 대화를 통해 그 안에 내재된 조형 질서를 구축하게 된다. 그리고 대상을 관찰자의 해석 속으로 함몰시키지 않기 위해 대상에 관찰자와 동등한 위치를 부여함으로써 보다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만들어 놓았다. ● 김명숙의 돌 그리기 작업이 빛을 산란시키며 화려한 여성성을 표현했다면 실제 모래를 캔버스에 입혀 흙 위에 남겨진 흔적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흔적」 시리즈는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여성성을 상징한다. 부드럽게 빛을 흡수하며 눌리면 눌리는 데로 무리 없이 흐르는 화면 구성은 생명을 잉태하기에 부족함이 없이 비옥하다. 모래 위에 남겨진 인간의 발자취는 이제 곧 사라질 유한한 인간 삶의 덧없음을 닮아 있기에 김명숙의 모래는 더욱 인간을 닮았다.
인간은 움직이지 않는 사물에 개인적인 상상의 옷을 입혀 자신만의 특별한 대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버릇이 있다. 더욱이 서로 오랜 세월을 함께 할 경우, 인간과 사물의 관계는 단순히 보여주고 관찰하는 주종의 관계를 벗어나 비슷한 눈높이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게 되는데 그것의 균형이 깨졌을 때 사물은 반복된 소비로 버려지거나 아니면 물신숭배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서로에 대한 보다 친밀한 관심과 상호 커뮤니케이션이 바탕이 된다면 이 둘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숨겨져 있던 질서와 원리를 발견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물을 이용해 자신의 생각을 표현 하고자 하는 작가는 사물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거기에서 무엇을 읽어 낼 것인가? 어떤 가치를 부여할 것인가의 문제를 결국 자기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무엇을 읽어 내고, 어떤 가치를 부여할 것인가의 질문으로 환원한다. 즉 작가에게 있어 표현대상은 관찰되는 사물이기 이전에 바로 자기 자신임을 알기에 김명숙은 자신이 선택한 소재를 독특한 관점과 철학을 가지고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데이비드 호크니와 수영장, 앤디 워홀과 캠벨 통조림 깡통, 백남준과 텔레비전이 보여주었던 친밀한 관계를 김명숙과 그가 수집한 작은 돌 사이에서도 역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 작가는 항상 홀로 남겨진다. 그러나 환영이 아닌 유토피아를 시각적으로 재현해낼 상상력이 있기에 그의 일상은 현실의 단조로움에서 벗어나 있다. 그리고 주변 사물과의 친근한 소통이 있기에 유토피아는 멀지 않은 곳에서 그를 기다릴 것이다. ■ 이대형
사물은 그것이 유일무이하다는 점에서 어떤 근원적 아름다움을 지닌다. 이 아름다움은, 사물이 명료하게 지각될 때만큼이나 흐릿하고 애매할 때에도 나타난다. 아니 애매할 때, 그리하여 불확정적 여운을 지닐 때, 사물의 아름다움은 더욱 강렬해 진다. ● 아무도 주의하지 않은 보잘 것 없고 하찮은 사물을 우리 앞에 드러냄으로써 작가는 사물에 빛을, 질서를, 의미를 부여한다. 작가의 세심한 시선에 의해 나름의 위치를 부여받음으로써 사물은 그 자체로서의 율동, 생명적 리듬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 정말로 보아야 할 것은 지금 여기 "보이는" 것들이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항상 자신을 내보이면서 숨기기도 한다. 따라서 그것은 곧 밝혀져야 할 대상이기도 하다. ● 말없는 사물은 관찰과 이해의 경험을 기다린다. ■ 김명숙
Vol.20040816b | 김명숙 회화展